국청(鞫廳)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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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국청 |
한글표제 | 국청 |
한자표제 | 鞫廳 |
동의어 | 추국청(推鞫廳) |
관련어 | 친국(親鞫), 정국(廷鞫), 추국(推鞫), 삼성추국(三省推鞫) |
분야 | 정치/사법/재판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고종 |
집필자 | 정순옥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국청(鞫廳)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즉위년 12월 5일 |
조선시대 모반(謀反), 대역(大逆), 강상(綱常) 범죄와 같은 국가 체제를 위협하는 범죄를 신문하기 위해 왕명에 의해 임시로 설치한 비상설 특별 재판 기구.
내용
국청(鞫廳)은 왕명에 따라 설치되는 임시적 기관으로 상임 관원이나 상설 청사가 없으며, 국청이 설치될 때마다 궁중에 특설 재판정을 설치하고 의정부 및 원임대신, 삼성의 고위 관직자를 위관(委官)으로 임명하여 합동으로 심리하고, 실무진도 특별히 임용하여 구성하였다. 임시로 임명된 재판장과 실무진에 의하여 죄인을 심리하여 국왕의 재결을 받는 임무를 마치면 폐쇄되었다.
국청에는 친국(親鞫), 정국(庭鞫), 삼성추국(三省推鞫) 등이 있다. 친국 외에는 재판장격인 위관을 중심으로 국문(鞫問)이 진행되었다. 국청의 운영 사항과 판결은 추안(推案)과 국안(鞫案)을 작성하여 보관하고, 승정원에서는 친국 사건을 중심으로 『국청일기』를 작성했다.
조선후기에는 국청이 상설기구화 되었다. 그 과정에서 국청에서 결정권을 행사하는 관리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정치적 재판의 성격을 지닌 까닭에 국청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었으며 전제 왕권 횡포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용례
前佐郞李台徵上疏言 (중략) 而今此庭鞫 雖與本府稍異 捧招等事 付諸攸司 任其踈忽 臣不勝慨恨 而今又移送本府 則縱緩尤甚 況輸情吐實 必在於嚴刑究問 採得端緖, 專係此一着 而竊見鞫廳諸臣左右營護之狀 自初彰著 則今雖迫於嚴命 黽勉設鞫 凶逆情節 必不肯一一究覈 設有據證援告之事 安保其無周遮彌縫之慮耶 曾於辛巳國恤 因山前 有親鞫之擧 雖不得一遵此例 而其中緊重當問之事 則臨殿親問 恐無所妨也 至於鞫廳用刑 揆諸前例 尤無拘礙之端 伏願亟降明旨 特賜施行 以解國人之疑惑(『영조실록』 즉위년 12월 5일)
참고문헌
- 金淇春, 『朝鮮時代刑典』, 삼영사, 1990.
- 조윤선, 「숙종대 형조의 재판 업무와 합의제적 재판제도의 운영」, 『사총』68, 역사학연구회, 2009.
- 오갑균, 「朝鮮朝 鞫廳 運營에 대한 硏究」, 『湖西文化硏究』第3輯,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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