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흠지(鄭欽之)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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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흠지 |
한글표제 | 정흠지 |
한자표제 | 鄭欽之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태종~세종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요좌(堯佐) |
시호 | 문경(文景)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378년(우왕 4) 6월 |
사망 | 1439년(세종 21) 6월 16일 |
본관 | 동래(東萊)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장현리 |
증조부 | 정호(鄭瑚) |
조부 | 정양생(鄭良生) |
부 | 정부(鄭符) |
모_외조 | 고성 이씨(固城李氏) : 이희필(李希泌)의 딸 |
처_장인 | 전주 최씨(全州崔氏) : 최병례(崔丙禮)의 딸 →(자녀)6남 2녀 |
자녀 | (1자)정갑손(鄭甲孫) (2자)정인손(鄭麟孫) (3자)정흥손(鄭興孫) (4자)정창손(鄭昌孫) (5자)정희손(鄭喜孫) (6자)정육손(鄭六孫) (1녀)박거완(朴去頑)의 처 (2녀)이계기(李啓基)의 처 |
저술문집 | 『진서(陣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흠지(鄭欽之) |
총론
[1378년(우왕 4)∼1439년(세종 21) = 62세]. 조선 초기 태종(太宗)~세종(世宗) 때의 문신이자 과학자. 중추원(中樞院)동지사(同知事)와 형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자는 요좌(堯佐)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한성부윤(漢城府尹)정부(鄭符)이며, 어머니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고려 때 삼사좌사(三司左使)충정공(忠靖公)이희필(李希泌)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대광(重大匡)봉원군(蓬原君)정양생(鄭良生)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중대광내산군(萊山君)정호(鄭瑚)이다. 영의정정창손(鄭昌孫)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태종 시대 활동
1390년(공양왕 2) 고려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 13세였으므로 천재라는 소문이 났다.[『방목(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속고2 「정흠지(鄭欽之)」 이하 「정흠지묘비명」으로 약칭]
1396년(태조 5) 나이 19세 때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다.[「정흠지묘비명」] 처음에는 음직(蔭職)으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포천현감(抱川縣監)을 지냈는데, 정사에 힘을 써서 그의 치적(治績)이 1등으로 꼽혔다. 임기 만료 후,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전임되었다.[「정흠지묘비명」]
1401년(태종 1) 사농서(司農署) 주부(注簿)가 되었는데, 종묘(宗廟)와 여러 제사에 쓰인 제주(祭酒)의 맛이 나빴다고 하여, 그를 순군옥(巡軍獄)으로 보내어 죄를 다스렸다.[『태종실록(太宗實錄)』태종 1년 6월 23일] 1408년(태종 8) 10월 사헌부 지평이 되었는데, 그해 11월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옥사>와 관련이 있는 영의정하륜(河崙)을 탄핵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전라도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다.[『태종실록』태종 8년 10월 13일, 태종 8년 11월 1일] 이듬해인 1409년(태종 9) 4월 유배에서 풀려나 외방종편(外方從便)되면서, 고향인 경상도 동래(東萊)로 돌아가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과거 공부에 매진하였다.[『태종실록』태종 9년 4월 4일]
1411년(태종 11)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4세였다.[『방목』] 과거에 급제한 뒤에 병조 정랑(正郞)과 이조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는데, 1412년(태종 12) 4월 그가 병조 정랑으로 재임할 당시의 일이 문제가 되면서 이조 정랑에서 파직 당하였다. 그가 병조 정랑으로 있을 때, 갑사(甲士)사정(司正)김윤수(金允壽) 등 13인을 부사직(副司直)과 사정(司正)으로 잘못 임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헌부에서 이 사건을 문제 삼아 그를 탄핵하면서 파직을 청하였던 것이다.[『태종실록』태종 12년 4월 11일] 이후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3년 상을 지냈다.[『태종실록』태종 12년 6월 17일] 복상(服喪)을 끝마치자, 사간원(司諫院) 좌헌납(左獻納)에 임명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겨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그는 두 차례나 대성(臺省 : 사헌부와 사간원)에 들어갔는데, 영의정하륜 같은 대신을 탄핵하였다가 파직을 당하고 귀양 갈 정도로 법을 지키고 윗사람에게 아부하지 않았다.[「정흠지묘비명」] 심지어 그는 태종의 절친한 친구인 좌의정박은(朴訔)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박은은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정탁(鄭擢)과 더불어 노비 문제로 소송하였는데, 결국 그 노비를 속공하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박은은 내각에 들어와서 왕에게 정사를 아뢸 때, 노비를 속공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며 자신의 사적인 일을 가지고 왕에게 하소연하였다. 그러자 당시 사헌부 장령이던 정흠지는 “조계청(朝啓廳)은 대신이 도리를 의논하는 곳입니다. 박은은 수상으로서 국가의 큰일은 말하지 않고, 자주 사사로운 일을 진달하였으니, 특히 대신의 체모를 잃었습니다.”며 핵청(劾請)하였다.[『태종실록』태종 17년 6월 12일] 당시 장령정흠지가 좌의정박은을 탄핵하고 죄를 청한 사건에 대하여, 그의 말이 매우 적당하고 간절하였다며, 당시의 논의가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 되어 파면 당하였다.[『세종실록』세종 21년 6월 16일]
세종 시대 활동
1418년(세종 즉위년) 세종이 즉위하자, 봉상시(奉常寺) 소윤(少尹)으로 기용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에 임명되었다. 1422년(세종 4) 윤12월 서운관(書雲觀)에서 추보(推步)하는 관원이 산술법(算術法)을 잘 알지 못하자,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정흠지를 서운관 제거(提擧)로 임명하여 산술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세종실록』세종 4년 윤12월 16일] 1423년(세종 5) 3월 전시(殿試)대독관(對讀官)이 되어, 지신사(知申事 : 도승지)조서로(趙瑞老) 등과 함께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가 과거시험을 보였다.[『세종실록』세종 5년 3월 27일] 5월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고, 8월에는 사재감(司宰監)판사(判事)가 되어, 형조 지사(知事)를 겸임하였으며, 9월에 동부대언(同副代言 :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세종실록』세종 5년 5월 27일, 세종 5년 8월 26일, 세종 5년 9월 29일] 1424년(세종 6) 3월 『개원점(開元占)』을 교정하였다.[『세종실록』세종 6년 3월 25일] 1426년(세종 8) 9월 좌부대언(左副代言 : 좌부승지)을 거쳐, 11월 지신사로 영전되었다.[『세종실록』세종 8년 11월 25일] 지신사에 오른 정흠지는 국가의 기밀(機密)을 맡아서 세종에게 계옥(啓沃)한 바가 많았다.[『세종실록』세종 21년 6월 16일]
1429년(세종 11) 9월 이조 참판이 되었다.[『세종실록』세종 11년 9월 30일] 1430년(세종 12) 9월 관반(館伴)에 임명되어 함길도(咸吉道)로 갔는데, 명(明)나라 사신이 여진의 땅에 갔다가 돌아왔기 때문이었다.[『세종실록』세종 12년 9월 21일] 윤12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431년(세종 13) 2월 형조 판서(判書)가 되었다.[『세종실록』세종 12년 윤12월 3일, 세종 13년 2월 1일] 1432년(세종 14) 9월 전라도도순찰사(全羅道都巡察使)가 되어, 대굴수영(大窟水營)을 옮겨 배치할 장소를 살펴보았다.[『세종실록』세종 14년 9월 9일] 1433년(세종 15) 7월 형조 판서로서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정초(鄭招)와 병조 우참판(右參判)황보 인(皇甫仁) 등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진서(陣書)』를 편찬하였다.[『세종실록』세종 15년 7월 4일] 그해 예문관 제학정인지(鄭麟趾)·대제학정초 등과 함께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하였다.[『해동역사(海東繹史)』 권17] 세종이 인재를 등용하는 원칙은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는 것이었는데, 이때 세종은 과학의 발명에 관한 일에 그의 과학적 재능을 활용하였다.
1435년(세종 17) 2월 형조 판서로서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이맹균(李孟畇)과 함께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였다.[『세종실록』세종 17년 2월 23일] 한편 조선에서는 함경도 회령(會寧) 등지에 진(鎭)을 설치하고 그곳에 이민(吏民)들을 새로 이주(移住)시켰는데, 이들이 그곳에 야인(野人: 여진)들과 뒤섞여 살게 되면서 군기(軍機)와 민무(民務)를 조치하는 일이 매우 어려웠다.[「정흠지묘비명」] 이에 그해 3월 세종은 정흠지를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에 임명하였다.[『세종실록』세종 17년 3월 27일] 그가 하직 인사를 하자, 세종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제 나는 북쪽 변경을 돌아 볼 걱정이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당시 정흠지 어머니의 나이가 80이 넘었으므로 세종은 그에게 계속 왕래하며 어머니의 안부를 살피도록 명하였다.[「정흠지묘비명」]
1436년(세종 18) 12월 왕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와서 그가 어머니에게 헌수(獻壽)하니, 세종이 풍악과 주찬(酒饌)을 내려 주었다.[『세종실록』세종 18년 12월 6일] 이 해에 가뭄이 들어 농사가 흉작이었던 까닭에 세종은 감선(減膳)하고 금주(禁酒)하였으나, 그에게는 특별히 술과 음악을 하사하여 모부인의 장수를 경하(慶賀)하였다. 세종은 그가 집에 올 때마다 반드시 그를 인견(引見)하여 일처리에 관하여 자문하고 상의하였는데, 그가 계획한 것들이 세종의 마음에 척척 맞았으므로 즉시 모두 허락하고 윤허하였다.[「정흠지묘비명」] 1437년(세종 19) 1월 중추원 동지사가 되었으나, 그 해 가을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였고, 이에 세종이 특별히 조위(弔慰)하였다.[『세종실록』세종 19년 1월 26일, 「정흠지묘비명」]
1439년(세종 21) 5월 정흠지의 병이 위중해지자 세종이 전지하여, 5월 25일부터 7월 그믐까지 매일 얼음 1정(丁)씩을 하사하였다.[『세종실록』세종 21년 5월 25일] 여름에는 세종이 환관을 보내어 고기를 먹도록 권하였고, 의원과 문안하는 사신을 계속 파견하였다. 그러나 정흠지는 그해 6월 16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62세였다. 그가 운명하려 할 때 그는 자식들에게 ‘상사(喪事)와 장례를 되도록 검약(儉約)하게 치루고, 불사(佛事)를 벌이지 말라.’는 글을 남겨 훈계하였다.[「정흠지묘비명」] 그가 죽자 세종이 슬퍼하여 이틀 동안 철조(輟朝)하고, 사자를 보내어 조문(弔問)하였으며, 부의(賻儀)를 내렸다.[『세종실록』세종 21년 6월 16일]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한 정흠지
우리나라의 역법은 고려 때 최성지(崔誠之)가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元)나라로 들어가서 구해온 수시력법(授時曆法)을 추보(推步)하여 준용(遵用)한 것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에는 명(明)나라 태조홍무제(洪武帝)가 반포한 『대통력(大統曆)』을 준용하였으나, 역법(曆法)은 『수시력』을 그대로 썼다.[『해동역사』 권17]
그런데 서운관(書雲觀)에서 추보하는 관원이 태양과 달의 일식 및 월식과 오성(五星)의 행도(行道)에 대하여 서술한 곽수경(郭守敬)의 산술법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였다. 이에 1422년(세종 4) 윤12월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정흠지를 서운관 제거(提擧)로 임명하여 산술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정흠지는 곽수경(郭守敬)의 산술법(算術法)에 능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시력』에 일태양과 달의 일식 및 월식과 오성의 입성(立成)이 빠졌으므로, 1433년(세종 15) 세종은 정인지·정초·정흠지 등에게 명하여 이것을 추보하도록 하였다. 또 명나라 『대통통궤(大統通軌)』를 취하여 약간의 오류를 수정하고 조금 첨삭한 후 합하여 『칠정산(七政算) 내편(內篇)』을 만들었다. 이어 『이슬람 역법[回回曆法]』을 구해서 이순지(李純之)·김담(金淡) 등에게 명하여 고찰하고 교정하여 『칠정산 외편(外篇)』도 만들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5] 당시 정흠지는 형조 판서로 있었는데, 예문관 제학정인지·대제학정초와 함께 『칠정산 내편』을 편찬하였다. 형조 판서정흠지는 정인지보다 19세나 나이가 많았으나, 『칠정산』에 대한 산술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때 정인지가 『대통통궤』의 오류를 수정하고 보완 첨삭하는 실무 작업을 총괄하였으며, 대제학정초와 형조 판서정흠지가 이를 자문하였다. 편찬자 명단에 정인지·정초·정흠지의 순으로 기록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1432년(세종 14) 세종이 정인지·정초·정흠지 등에게 『칠정산 내편』을 편찬하게 하고, 이어 이순지와 김담 등에게 『칠정산 외편』을 교정하게 한 결과, 1442년(세종 24) 『칠정산 내외편(內外篇)』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444년(세종 26) 내편 3책과 외편 5책이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내편은 원나라 수시력을 해설한 책인데, 십진법을 사용하여 천구(天球)를 365도 25분 75초로 나누어서 이를 1년의 길이로 하였다. 외편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정확했다는 『이슬람 역법』을 교정한 책으로, 육십진법을 사용해서 천구를 360도로 나누어, 1년의 길이를 365일 5시 48분 45초로 하였다. 현대의 천문 계산과 비교하더라도 단지 1초가 짧을 뿐이다. 다만 외편에는 윤달이 없다.
1445년(세종 27) 3월 『칠정산 내외편』의 미진한 점을 보완하여 모두 4권으로 이루어진 『제가역상집(諸家歷象集)』을 편찬하였다.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이순지(李純之)가 발문(跋文)을 쓰기를, “천문에는 칠정산을 가지고 중외(中外)의 관아에 별 자리를 배열하고, 거기에 들어가는 별의 북극에 대한 몇 도(度) 몇 분(分)을 다 측정하게 하였다. 또 고금(古今)의 천문도(天文圖)를 가지고 같고 다름을 참고하여 측정하여 바른 것을 취하게 하였다. 그 28수(宿)의 도수(度數) · 분수(分數)와 12차서의 별의 도수를 일체로 『수시력』에 따라 수정해 고쳐서 간행하고, 역법에는 『대명력』·『수시력』·『회회력(回回曆)』과 『통궤(通軌)』·『통경(通徑)』의 여러 책을 본받아 모두 비교하여 교정하였으며, 또한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오히려 미진하다고 여겨, 또 신에게 명하여, 천문 · 역법 · 천체 기구 등에 관한 글을 찾아내어, 산삭하고 부문별로 분류하여 책을 만들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세종 때에 편찬한 『칠정산 내외편』은 이후 계속 쓰였다. 그러다가 1644년(인조 22)에 이르러 관상감(觀象監)제조(提調)김육(金堉)이 서양인 아담 샬(Adam Schall)의 『시헌력(時憲曆)』을 쓰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1653년(효종 4) 비로소 서양의 태양력인 시헌력법이 시행되었다.
민무구⋅민무질 옥사와 정흠지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태종과 정비(正妃) 원경왕후(元敬王后) 사이에서는 궁녀의 빈잉(嬪媵) 문제로 불화가 일어났고, 이 갈등은 점차 커졌다. 1402년(태종 2) 12월 원경왕후의 몸종 김씨(金氏)가 경녕군(敬寧君)이비(李裶)를 낳자, 원경왕후가 질투하여 모자를 내쫓아서 혹한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이것을 <참고(慘苦) 사건>이라고 하는데, 후일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대간을 시켜서 원경왕후의 형제인 민무휼(閔無恤) 형제를 죽이는 빌미로 삼았다. 당시 왕가에서는 적서(嫡庶)의 구분이 없어서 궁녀가 낳은 서자(庶子)도 왕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이제(李禔)는 자주 일탈된 행동을 하여 물의를 일으켰으므로, 태종의 눈 밖에 나서 세자의 자리가 위태로웠다. 이에 불안을 느낀 원경왕후의 형제인 민무구(閔無咎)와 민무질(閔無疾)은 누이 원경왕후와 세자인 양녕대군을 적극 비호하였으므로 태종의 미움을 받았다. 그런데 1406년(태종 6) 태종이 갑자기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때 태종은 실제로 양위하기보다는 세자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시험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태종의 장인인 민제(閔霽)는 사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영의정하륜과 공신 조영무(趙英茂) ・ 이숙번(李叔蕃) 등과 함께 선양이 옳지 않다고 적극 만류하였다. 그리고 아들인 민무구 ・ 민무질에게도 언행을 조심할 것을 거듭 경계시켰다. 그러나 1407년(태종 7) 세자의 정혼(定婚) 문제로 인하여 민무구 ・ 민무질 형제의 옥사가 일어났다. 민무구 형제는 대역 죄인으로 몰려서 연안(延安)과 대구(大丘)로 각각 귀양을 갔다. 이 일로 태종은 원경왕후가 친정과 연락하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태종의 금령(禁令)에도 불구하고, 4개월이 지난 후 원경왕후가 친정아버지 민제와 연락을 주고받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부녀는 더욱 곤경에 빠졌다.
이러한 가운데 1408년(태종 8) 10월 정흠지가 사헌부 지평이 되었는데, 그해 11월 민무구 ・ 민무질 옥사와 관련이 있는 영의정하륜을 탄핵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사헌부 집의정수홍(鄭守弘), 사헌부 장령허모(許謨) 등도 모두 귀양을 갔다. 당초에 태종이 하교(下敎)한 조목 중에, “왕위를 사양하려고 하였을 때에 민무구가 들어와서 나와 말하기를, ‘고론(高論)하는 사람이 비록 많으나, 대신이 아버지 민제의 집에 가서 이미 승교(承敎)하기로 의논한 자가 있습니다.’ 하였다.”라는 말이 있었다. 사헌부에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게 이첩(移牒)하여 민무구에게 그 대신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민무구가 대답하기를, “하륜이 일찍이 아버지 민제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주상의 뜻이 이와 같으니, 청(請)을 얻지 못할 것 같다.’고 하였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이날 사헌부 지평정흠지와 사헌부 집의정수홍 등은 상소를 올려 하륜이 민씨(閔氏) 집안에 당부(黨附)한 불충 죄를 탄핵하였다. 그리고 그 직첩을 거두고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였다. 이어 사헌부에서 아전을 보내어 하륜의 집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태종의 왕지(王旨)가 있었는데, “대신이 죄를 범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조목조목 왕에게 아뢰고 왕의 허락 받은 뒤에 그 사람을 탄핵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사헌부에서 먼저 하륜을 탄핵하고 뒤에 태종에게 아뢰었던 것이다. 태종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밤중에 순금사(巡禁司) 부사직(副司直)최규(崔揆)를 불러 정흠지와 정수홍 등을 잡아서 하옥(下獄)하게 하였다. 또 승전환자(承傳宦者)윤흥부(尹興阜)를 하륜의 집에 보내어 집을 지키고 있는 사헌부의 서리(書吏)소유(所由)를 쫓아냈다.[『태종실록』태종 8년 11월 1일]
성품과 일화
정흠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채가 수려하고 수염과 눈썹이 그린 것처럼 멋있었으며, 식견이 명철하고 도량이 넓었다. 겉으로는 온화하면서도 속으로는 강직하여 남을 대하거나 사물을 접할 때에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화기(和氣)가 흘러넘쳤다. 대절(大節)에 임해서는 늠름하여 남이 범접할 수가 없었고, 벼슬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할 때에는 대체(大體)에 따르고자 하였으며, 남다른 이론을 세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법을 지키고 남에게 아첨하지 않았으므로, 태종 때 영의정하륜을 탄핵하다가 먼 지방으로 쫓겨나서 오랫동안 고생하였다.[『세종실록』세종 21년 6월 16일]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워 배움에 힘썼다. 평소 집에서 지낼 때 그는 가산(家産)을 늘이는 데에 힘쓰지 않았고, 책을 보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특히 『강목통감(綱目通鑑)』을 숙독(熟讀)하여 언제나 한 가지 일을 의논할 때마다 번번이 그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말하였는데, 그 일의 원인과 결과를 환히 파악하여,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꿰뚫고 있었다.[『세종실록』세종 21년 6월 16일, 「정흠지묘비명」]
평상시에 한사(漢史 : 중국 한나라 역사)를 줄줄이 외워서 말하므로, 세종이 일찍이 윤회(尹淮)에게 이르기를, “정흠지가 언제 사기(史記)를 이처럼 익혔는가.” 하고 놀라워하였다. 일찍이 황보 인과 함께 『진설』을 지어 올렸고, 천문에도 밝아 정인지와 함께 이슬람 역법을 정리하여,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하였다. 그는 임종할 때에 유서(遺書)로 여러 아들들에게 불사를 행하지 말도록 부탁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세종 21년 6월 16일]
정흠지가 판서로 재임 할 때, 아들 정갑손(鄭甲孫)이 참찬이 되면서 부자가 동시에 재추(宰樞)가 되었는데, 부자 모두 용모가 남자답게 잘 생기고 수염이 길고 아름다웠다. 하루는 거리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판서인 아버지 정흠지는 초헌(軺軒)에 타고 가고, 참찬인 아들 정갑손은 말에서 내려 초헌을 붙들고 따라가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감탄하며 영화롭게 여겼다.[『해동잡록』 권6]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장현리에 있고, 묘표(墓表)가 남아있다.[「정흠지묘비명」] 원래 조성되었던 정흠지의 묘소는 그 풍양이 매우 뛰어나서 훗날 세조(世祖)의 묘소인 광릉(光陵)이 조성되었고, 이에 정흠지를 비롯하여 가족묘 8기가 이장되었다.[『예종실록(睿宗實錄)』예종 즉위년 9월 18일, 예종 즉위년 10월 1일, 예종 즉위년 10월 2일]
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형조 전서(典書)최병례(崔丙禮)의 딸인데, 자녀는 6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정갑손(鄭甲孫)은 과거에 급제하여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고, 차남 정인손(鄭麟孫)은 함길도경력(咸吉道經歷)을 지냈다. 3남 정흥손(鄭興孫)은 호군(護軍)을 역임하였고, 4남 정창손(鄭昌孫)은 과거에 급제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5남 정희손(鄭喜孫)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나 일찍 요절하였고, 6남 정육손(鄭六孫)은 동부녹사(東部錄事)를 지냈다. 장녀는 소윤(少尹)박거완(朴去頑)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주부(注簿)이계기(李啓基)에게 시집갔다.[「정흠지묘비명」]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동각잡기(東閣雜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총화(慵齋叢話)』
- 『임하필기(林下筆記)』
- 『춘정집(春亭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역사(海東繹史)』
- 『해동잡록(海東雜錄)』
- 『호정집(浩亭集)』
- 『야은집(冶隱集)』
- 『춘정집(春亭集)』
- 『인재집(寅齋集)』
- 『경재집(敬齋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이재유고(頤齋遺藁)』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담정유고(藫庭遺藁)』
- 『무송헌집(撫松軒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