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헌력(時憲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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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년부터 1896년에 서양의 태양력으로 개력할 때까지 243년 동안 사용된 조선후기 역법.

개설

명말청초(明末淸初)에 중국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이 주도하여 만든 서양식 역법으로 중국에서는 1644년(청 순치 1)에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되었고, 조선에서는 1653년(효종 4)에 관상감(觀象監) 제조(提調)김육(金堉)의 건의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시헌력은 절기 계산에 있어 종래 평기법(平氣法) 대신 정기법(定氣法)을 쓴 점이 특징으로 1896년 태양력으로 개력하기 직전까지 사용하였다.

내용 및 특징

시헌력은 명말청초에 중국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이 주도하여 만든 서양식 역법으로 중국에서 1644년(청 순치 1)에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시헌력이 조선에서 사용된 것은 1653년(효종 4)으로 1645년(인조 23)에 관상감 제조김육에 의해 그 사용이 건의된 이후, 10년이 경과한 후였다. 김육의 건의 이후 10년간 조선은 시헌력을 습득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시헌력은 종래 대통력(大統曆)과는 계산법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1646년(인조 24)에 사신이 역관(曆官) 2명을 데리고 북경에 갔지만 배우는 기회를 얻지 못했고, 1651년(효종 2)에 김상범(金尙范)이 중국 흠천감(欽天監)에 뇌물을 주고 배워 와 1653년부터 시헌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1653년에 시헌력으로의 개력이 결정되고 그 이듬해 역서부터 시헌력을 사용하기에 이르렀지만, 사용에 있어서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시헌력의 계산법인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에 관한 지식이 미흡했고 오성(五星)입성(立成)도 얻지 못해 오성추보(五星推步)는 여전히 기존의 역법인 칠정산법(七政算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결국 시헌력의 완비를 위해 1655년(효종 6) 관상감의 요청으로 또다시 김상범을 북경에 보냈으나, 불행히도 김상범이 도중에 사망하여 수포로 돌아갔다. 시헌력은 김상범이 죽음으로써 태양의 운행인 일전(日躔)과 달의 운행인 월리(月離)의 계산법이 미진한 채로 계산되었다. 이에 따라 달의 대소(大小)가 중국과 계속 다르게 되었고 이 일은 결국 관상감 관원들을 문책하는 일로까지 이어졌다.

1704년(숙종 30)에 시헌법에 의거하여 그 다음해인 을유년(乙酉年) 역서를 완성시켰는데, 청국의 역서와 비교하여 11월과 12월의 대소가 틀리는 일이 발생했다. 역서의 오차가 발견되자 조정에서는 즉시 관상감의 역관들에게 다시 계산하게 했는데, 역관들은 자신들의 계산이 맞다고 계속 주장했다. 결국 이 문제는 시헌력을 토대로 만든 중국의 일전월리표(日躔月離表)인 문자책(文字冊)을 인간(印刊)하는 과정에서 역관들이 구하려고 하는 해의 천정동지(天正冬至)의 다음날 자정(子正) 초각(初刻)의 태양의 위치가 동지점에서 떨어진 평행경도(平行經度)로서 멀어진 태양이 다시 지구에 접근하는 회귀점을 말한 연근(年根)을 제대로 기입하지 않아 시헌력이 아닌 대통력의 추보법(推步法)으로 계산하여 생긴 문제임이 판명되었다. 역관들의 잘못으로 역서가 틀리게 되자, 관상감은 역서를 다시 수거하여 고쳐 인쇄하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매년 틀린 역서를 간행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05년(숙종 31)에 관상감의 추산관(推算官)허원(許遠)을 북경에 보내 흠천감 역관인 하군석(何君錫)으로부터 방술서(方術書)를 사가지고 오게 했다. 그 뒤부터는 달의 대소와 24절기, 상하현망(上下弦望)의 시각과 분초가 모두 잘 맞았으나, 이백항년표(二百恒年表) 가운데 일전의 최고충(最高衝)과 금성, 수성의 인수(引數) 및 연근이 계산법과 맞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허원은 다시 흠천역관하군석으로부터 서신으로 추보술(推步術)을 배워 의문점을 해결했는데, 이때 허원이 북경에 가지 않고 하군석과 서신만으로 왕래한 이유는 보다 정확한 역의 계산을 위한 의기(儀器)가 완성되지 않았고 그때까지 산법(算法)을 미처 습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허원과 하군석 간의 서신 왕래로 연근법(年根法)에 대한 의문점은 어느 정도 해결됐으나, 완전히 터득한 것은 아니었다. 연근은 역을 짓는 기본법인데 1713년 이후로 연근을 추계(推計)할 길이 없어지게 되어 일식(日食), 월식(月食)의 시각 분초가 번번이 틀릴 가능성이 컸다. 이에 관상감은 하군석이 사망하기 전에 배워둬야 한다며 허원을 북경에 보내 연근법을 완전히 배워 오게 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연근법에 앞서서 시헌력의 오성법(五星法)은 1708년(숙종 34)년에 이르러 비로소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허원이 북경에 들어가 흠천감에서 시헌법칠정표(時憲法七政表)를 사가지고 오자 이를 바탕으로 추보하여 가능해진 것이었다. 이와 같이 시헌력의 사용은 김상범, 허원 등 관상감 관원들이 그 계산법을 터득하려고 노력한 지 60여 년 만에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하겠다.

시헌력은 종래 대통력과 비교하여 윤달 및 절기 계산법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예컨대 1734년(영조 10)에 청에서 보내온 역서에는 소만(小滿) 중기(中氣)가 4월 29일 밤 자시초(子時初) 2각 11분에 있으므로 그다음 달에 중기가 없어 윤달이 되지만, 조선에서는 소만 중기가 4월 29일 야분(夜分) 후 자정(子正) 1각 8분에 있어 다음 달 초 1일에 속하게 되므로 청나라의 4월은 조선의 윤3월이 되었다. 이는 조선과 중국 간의 지리적 차이로 인한 것이므로 조선의 절후를 따른다면 윤3월이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으나, 청력(淸曆)을 따라야 하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결국 청력과 동일하게 윤4월을 두게 되었다.

이처럼 시헌력의 사용 이후, 윤달을 정하는 문제가 제기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즉, 시헌력이 사용되기 이전에 윤달을 정하는 법은 중기가 없고 1절기(節氣)만 있는 달을 윤달로 했다. 그런데 시헌력에서 정기법을 채용한 결과 중기에서 그다음의 중기까지 기간이 때로 태음력(太陰曆)의 한 달보다도 짧은 때가 있어 이런 경우, 1개월 속에 3개의 절기를 포함하게 되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 문제는 시헌력의 절기계산법에서 비롯된 것인데, 시헌력의 정기법 계산은 절기와 중기 사이의 시간 간격이 14.42일부터 15.73일 사이로 변동하여 중기로부터 다음 중기에 이르는 기간이 29.48일로 줄어들 수 있으므로 한 달 동안에 두 개의 중기가 들어갈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중기를 윤월(閏月)로 하는 종래의 치윤법(置閏法)은 부적당하게 되어 윤달을 두는 문제에 상당한 혼선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편을 가져온 것은 서양 천문학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서양 역법을 무리하게 재래의 중국 역 전통에 적용하려는 데서 일어난 일이었다.

한편, 시헌력법에 의거한 역서가 사용된 것은 1654년 갑오년(甲午年) 역서부터였다. 실제 김상범은 1652년에 시헌법을 터득하여 역서 제작에 착수했지만, 역서 제작일이 촉박하여 1653년 계사년(癸巳年) 역서는 대통력에 따라 제작되었다. 따라서 1653년에 시헌력으로 개력했다고는 하나, 곧장 역서의 사용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고 시헌력은 정확히 1654년(효종 5) 갑오년 역서부터 반영되어 사용되었다.

변천

1653년부터 사용한 시헌력은 1896년에 완전한 서양 역이라 할 수 있는 태양력으로 바뀌었는데, 200여 년간 아무런 문제없이 사용되었던 시헌력이 1896년에 태양력으로 개력된 것은 역법상의 문제가 아닌, 당시의 국제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중국과 밀접한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던 조선은 1876년 한일수호조약의 체결을 시작으로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더 이상 시헌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힘든 상황에 처했으며,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고 일본의 입김이 작용한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추진되면서 중국 중심의 역법 질서가 서양 중심의 역법 질서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참고문헌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이은성, 『曆法의 原理分析』, 정음사, 1985.
  • 정성희, 『조선후기 우주관과 역법의 이해』, 지식산업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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