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식(月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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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 표면의 일부 혹은 전부가 가려지는 천변(天變) 현상.

개설

월식(月食)은 일식과 반대로 태양과 달 사이에 지구가 위치하는 경우이며, 지구의 그림자가 달의 표면을 잠식하는 현상이다. 월식은 보름날인 망일(望日)에 일어나며, 일식은 해-달-지구가 일직선인 합삭(合朔)일 때 일어난다. 황도면(黃道面)과 백도면(白道面)이 서로 교점에서 만나면 식 현상을 일으킨다. 매달 삭망이 되풀이되지만 매번 일식·월식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백도면이 황도면에 대해 약 5°9′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일식·월식을 천구(天狗)가 해나 달을 잡아먹는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한(漢)나라 화상석(畫像石)에는 태양과 달이 동시에 중첩되는 일월합벽(日月合壁)의 그림이 때로 그려졌는데 이는 일식·월식을 의미한다.

월식은 1년에 세 번 일어날 수 있으며, 달이 지구의 본영에 완전 가려지면 ‘개기월식’이 되고, 지구의 본영과 반영 사이에 달이 위치할 때는 ‘부분월식’이 된다. 일식은 월식보다는 자주 발생하나 일식의 관측 범위가 매우 좁아 짧은 시간과 한정된 지역에서만 일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월식은 지구 표면상 밤인 곳은 어디서나 볼 수 있어 훨씬 자주 관측된다.

내용 및 특징

『천문류초(天文類抄)』에서는 달의 운행이 보름에 있을 때는 태양과 충(衝)한 것이어서 이때 달이 어둡고 빈 속으로 들어오면 태양에게 먹히는데, 이것은 양(陽)이 음(陰)을 이긴 것이므로 그 변괴는 가볍게 여긴다 하였다. 그런데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월식도 음에게는 또한 재앙이 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일식이 있으면 덕을 닦고, 월식이 있으면 형벌을 잘 다스릴 것을 강조하였다.

월식은 일식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천변 현상으로 인식되었기에 정확한 관측 예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월식을 오보하여 문책당하고 엄벌된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1398년(태조 7)에 겸서운주부(兼書雲注簿)김서(金恕)가 월식을 오보하였다. 간관(諫官)박신(朴信) 등은 김서가 추보(推步)를 전문으로 하는 직책에 있으면서 월식을 오보하여 사람들을 속이었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직첩(職牒)을 거둘 것을 상소하였다. 왕은 간관과 헌사(憲司), 형조(刑曹)를 불러, 일관(日官)의 추보가 잘못되었으면 법관(法官)이 마땅히 죄주기를 청하여야 하는데 이 상소 자체가 늦었다면서 간관박신 등에게 오히려 책임을 물었다(『태조실록』 7년 4월 17일). 왕이 천문을 추산하는 일이란 전심전력해야 그 묘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이며, 일월식과 성변 및 운행 도수가 본래 약간의 오차가 있는 법이지만 지금껏 선명력법만을 썼기 때문에 착오가 더욱 많았고 정초(鄭招)가 수시력법을 연구하여 밝힌 뒤로는 책력이 좀 바로잡혔다지만 이번 일식의 휴복(虧復) 시각에는 차이가 심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옛날에는 책력을 만들되 착오가 있으면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는 법이 없었고, 일월식 때마다 그 시각과 휴복의 분수(分數)를 모두 기록하지 않아서 뒤에 상고할 길이 없으니, 이제부터는 일월식의 시각과 분수가 비록 추보한 숫자와 맞지 않더라도 서운관으로 하여금 모두 기록하여 바치게 하여 뒷날의 고찰에 대비토록 하라고 명하였다(『세종실록』 12년 8월 3일). 잘못된 값도 의미 있는 것이니 세세히 기록하고 그 기록을 보관하여 개선할 때 참고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세종은 역법의 교정에 관심을 두어, 1423년(세종 5) 『선명력(宣明曆)』, 『수시력(授時曆)』, 『보교회(步交會)』, 『보중성역요(步中星曆要)』 등 여러 역서의 차이를 비교 연구시켰다. 1432년(세종 14)에는 정초(鄭招),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칠정추보(七政推步)』, 『대통통궤(大統通軌)』, 『태양통궤(太陽通軌)』, 『태음통궤(太陰通軌)』 등의 서적을 연구토록 하였다. 특히 1432년부터는 원나라의 『수시력』과 아랍의 『회회력(回回曆)』을 연구케 하여 10년 뒤인 1442년에는 이순지(李純之)와 김담(金淡)이 그 원리와 방법을 해설한 『칠정산(七政算)』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1444년에는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3책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 5책이 활자본으로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월식은 하늘이 견책하는 경고라고 보고 왕에게 근신할 것을 요구하였다. 문종 때에는 사우제(四虞祭)를 묘시(卯時)에 행하였는데, 본래 모든 제사는 축시(丑時)에 행하는 것이지만, 이날은 월식이 인시(寅時)에 복원(復元)하였으므로 묘시에 제사한 것이었다(『문종실록』 즉위년 6월 17일). 세조 때에는 월식으로 인해 왕세자의 생신 하례(賀禮)를 정지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5일).

성종 때에는 능성군(綾城君)구치관(具致寬)이 사찰의 종은 치지 못하도록 요청하였다. 구치관은 옛날에 일식에는 북을 쳐서 양기를 돕고 월식에는 종을 쳐서 음기를 도왔는데, 지금 도성 안의 종각·종루와 선종(禪宗)의 원각사에서 모두 종을 치니 이것은 모두 음기를 북돋우는 바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근년에 난신(亂臣)과 도적이 많이 주살된 것은 음기가 성하여 초래된 듯하니 앞으로는 여러 절의 종을 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신숙주도 이에 호응하여, 군주가 드나드는 문을 열고 닫을 때 종을 쳐서 호령으로 삼는 것인데 요즘은 여러 곳에서 종소리가 들려 호령과 혼동되니 절의 종은 울리지 못하도록 하자고 요청하였다(『성종실록』 1년 1월 11일). 이처럼 월식이란 양기가 음기를 먹어 훼손하는 현상이므로 월식 때에는 음의 금기(金氣)인 종을 쳐서 음기를 북돋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관서가 아닌 절에서까지 매일 종을 치는 것은 지나치게 음기를 양산하여 난신·도적을 조장하는 것이니 중지토록 요청한 것이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 『한서(漢書)』 「천문지(天文志)」
  • 『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 『천문류초(天文類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일권, 『(동양 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김일권,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고구려 하늘에 새긴 천공의 유토피아』, 사계절, 2008.
  • 김일권,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대부터 조선까지 한국 별자리와 천문 문화사』, 고즈윈,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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