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관(諫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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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쟁(諫諍)을 담당하던 관원.

개설

유학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원칙적으로 모든 신하가 간관(諫官)이 될 수 있다. 언로(言路)를 통한 비판과 견제가 유학에서 말하는 정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언로는 소통의 수단이자 원칙이기도 했다. 그러나 통상 간관은 사간원(司諫院)의 관원을 가리킨다. 이들은 국정에 대한 간쟁과 왕의 정치에 대한 비평, 관원에 대한 탄핵 등 언론을 담당하였다. 간관은 간언(諫言)을 통해 방만하게 흐를 수 있는 왕권을 견제하고, 왕권과 신권의 조화와 견제를 추구하는 한편, 관료 사회의 비리와 부패를 감시했던 유학 정치의 소산이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도 간관이었던 문하부 낭사는 왕의 출납까지 담당하던 중심 관원이었고, 유학을 근간으로 사회를 운영했던 조선시대에는 간관의 중요성이 더욱 컸다.

담당 직무

조선시대의 간관은, 1401년(태종 1) 의정부 직제를 정비하면서 문하부(門下府) 낭사(郎舍)를 사간원으로 독립시키면서 처음 성립하였다. 문하부 낭사는 고려 성종대에 문하부를 설치하고 정3품 산기상시(散騎常侍) 이하의 관원을 편제하며 간쟁(諫諍)·봉박(封駁)을 관장하게 하면서 성립되었던 관직이었다. 조선 건국 당시에는 고려의 낭사 제도를 계승했다가, 1401년에 사간원이 되면서 독립 관청이 된 것이다.

이때 간원의 직제는 그대로 계승되었지만 관원의 수는 대폭 줄었다. 좌·우 산기상시, 내사사인, 기거주가 혁파되었고, 좌·우 간의대부가 좌·우 사간대부(司諫大夫)로, 직문하가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좌·우 보궐이 좌·우 헌납(獻納)으로, 좌·우 습유가 좌·우 정언(正言)으로 각각 개칭되는 등 7관직 11명이 4관직 7명으로 조정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사간원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우선 고려시대 낭사가 가졌던 간관의 기능만이 계승되어 조선시대 사간원은 간쟁을 담당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리고 낭사의 왕명(王命)·문서 출납 업무는 승정원으로 넘어갔다. 이 기능이 1466년(세조 12) 간쟁·봉박(封駁)으로 정리되었고, 이것이 그대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간관의 주된 기능인 간쟁은 왕에 대한 언론으로서 왕의 언행과 시정(施政)에 잘못이 있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봉박은 왕이 내린 조서에서 잘못한 일이 있으면 신하가 조서를 받들지 않고, 이를 봉함하여 되돌려 주어 공박하는 일종의 거부권 행사이다. 『경국대전』 「이전(吏典)」 ‘사간원(司諫院)’ 조(條)에, 간관의 직임 중 논박이라는 규정이 있는데, 이것이 봉박과 같은 것이었다. 사간원의 제도상 직무는 왕과 정치에 대한 언론이었으나 실제 기능은 법제적인 언론 활동은 물론, 현실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으로 확대되면서 전개되었다.

이들의 탄핵 활동은 그 직무를 보장하고 장려하기 위해 면책의 특권을 누렸다. 사실이 확인된 경우에는 물론 풍문(風聞)에 의해서도 탄핵을 행했다. 이때 탄핵을 받은 관원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직무 수행이 중지되며 다시 직무를 보기 위해서는 임명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간관은 가계가 좋고 재행이 뛰어난 인물을 제수했다. 사간원 관원은 홍문관·사헌부 관원과 함께 체직(遞職)이나 승자(陞資)에서 의정부·육조(六曹) 관원에는 뒤떨어졌다. 그러나 그 외의 같은 품직보다는 우대되고 우월한 지위를 누렸던 요직(要職)이었다. 그중 정5품의 헌납과 정6품의 정언은 대개 같은 품직인 의정부·육조 관직에 임명되었다가 같은 직에서 2년 6개월 미만의 근무 후 정4품과 정5품에 승자·승진되었다. 사간원 관원은 사헌부 관원과 함께 대간(臺諫)이라 통칭되었고, 모두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고과(考課)를 받지 않았다. 당상관도 이들의 인사에는 정중히 답례해야 한다고 규정되는 등 우대를 받았다.

특히 간관은 언론의 대상이 왕이었기 때문인지 관리의 잘못을 감찰하던 사헌부 관원이 제수되지 못했다. 정6품 정언은 처음 소속된 관아의 지위에 따라 사헌부 감찰의 아래에 놓였지만 1471년(성종 2) 이후에는 위로 개선되었다. 또 사헌부 관원은 상관·하관의 위계와 질서가 엄격했지만, 간관은 상관·하관 사이에 격의가 없었고 직무 중에도 음주가 허용되는 등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들의 언론 활동은 크게 간쟁·탄핵·시정·인사 등으로 구분되었다. 왕을 대상으로 한 언론인 간쟁은 제도상으로는 사간원 고유의 기능이지만 사헌부·홍문관에서도 행했다. 탄핵은 관원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언론으로, 부정·비위(非違)·범법한 관원을 논란·책망하여 그 직위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었다. 시정은 그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의 시비를 논하여 바른 정치로 이끌어가는 언론이었다. 인사는 부정·부당·부적합한 인사를 막아 합리적·능동적인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언론이었다. 이를 위해 사간원 내부에서 의견의 합의를 보아 논핵하는 통간(通簡), 자신이 관련된 논핵을 피하는 피혐(避嫌), 형제나 부자가 사간원 등 언관에 같이 임용되는 것을 막는 상피제(相避制) 등의 운영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간관은 왕이 중신을 접견하여 정치적 보고와 자문을 받는 조계(朝啓)·상참(常參)에 참여했고, 의정부·육조와 함께 정치와 입법에 관한 논의에 참가했다. 왕을 모시고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경연과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에 참여했고, 왕의 행행에 따라갔다. 사헌부 관원과 함께, 5품 이하 관인의 제수와 관련된 고신(告身)과 법령의 제정·개정과 관련된 의첩(依牒)을 심사하고 동의했는데, 이를 서경(署經)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간관 전원은 춘추관(春秋館)의 사관직을 겸직하면서, 국가의 중요 기록을 보존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변천

간관은 1401년 낭사에서 사간원으로 바뀐 뒤 『경국대전』의 관제에 따라 조선시대 내내 간쟁과 봉박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1505년(연산군 11)에 일시적으로 간관 가운데 정6품 정언(正言)이 혁파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다시 설치되었다. 이후 간관의 관서인 사간원은 큰 변동 없이 유지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의정부 소속의 도찰원으로 개편되면서 소멸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박용운, 『고려시대 대간제도 연구』, 일지사, 1980.
  • 최승희, 『조선초기 언론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4.
  • 최이돈, 『조선중기 사림정치 구조 연구』, 일조각, 1994.
  • 구덕회, 「언론과 언관」, 『역사비평』 37, 1997.
  • 김돈, 「중종대 언관의 성격변화와 사림」, 『한국사론』 10, 1984.
  • 최승희, 「조선초기의 언관에 관한 연구: 대간제도의 성립과 그 기능의 분석」, 『한국학논집』 1,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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