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만용(梁曼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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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8년(선조 31)~1651년(효종 2) = 54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효종(孝宗) 때의 문신. 사복시(司僕寺)정(正) 등을 지냈고,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자는 장경(長卿)이고, 호는 오재(梧齋)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거주지는 전라도 나주(羅州)이다. 아버지는 양산축(梁山軸)이고, 어머니 장흥 고씨(長興高氏)는 효렬공(孝烈公)고종후(高從厚)의 딸이자, 충렬공(忠烈公)고경명(高敬命)의 손녀이다.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양팽손(梁彭孫)의 증손자이고,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양응정(梁應鼎)의 손자이며, 충민공(忠愍公)양산숙(梁山璹)의 조카이다.

인조~효종 시대의 활동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진사(進士)에 모두 합격하고,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6세였다[『방목(榜目)』]. 급제한 그날 한림(翰林)에 임명되었고, 그해 6월에는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1634년(인조 12)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設書),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다. 그때 김자점(金自點)이 전권징병(專權徵兵)하고 있었는데, 신료들은 두려워 몸을 움추렸으나 양만용이 홀로 그의 죄를 물을 것을 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자점은 그를 원망하여 중상(中傷)하였으나 김상헌(金尙憲)이 그를 구호하니 해를 면할 수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호당(湖堂)에 천거되었고, 검열, 예조 좌랑(佐郞), 예문관 봉교(奉敎) 겸설서에 임명되었다[『오재집(梧齋集)』 부록(附錄) 권2 「행장(行狀)」 이하 「양만용 행장」].

한편 후금(後金)의 차사(差使)가 조선에 왔을 때,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서 인견(引見)하였는데, 후금의 하인이 전(殿) 안에 난입하였다. 이에 양만용이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소(疏)를 올려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양만용 행장」] 그런 가운데 1636년(인조 14) 양만용이 고향에서 휴가를 취하고 있었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여 청(淸)나라 병사들이 도성을 범하고, 대가(大駕)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갔다. 변고를 들은 양만용은 옥과현감(玉果縣監)이흥발(李興浡), 순창현감(淳昌縣監)최온(崔蘊), 전(前) 찰방(察訪)유즙(柳楫) 등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1637년(인조 15)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미 강화도가 함락되었고, 남한산성도 출성(出城)하여 적들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들을 파하여 돌아갔다[「양만용 행장」].

1638년(인조 16) 양만용은 전남도사(全南都事)에 임명되었고, 연서찰방(延曙察訪)에 제수되었다. 이어 1639년(인조 17) 부사직(副司直)으로 임명되었으나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것을 들어 사양하자, 흥양현감(興陽縣監)에 임명되었다. 1641년(인조 19)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양만용 행장」] 이후 관직에 계속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645년(인조 23)에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가 되었다. 그리고 차자(箚子)를 올려 병자호란 때 김상헌과 정온(鄭蘊)만이 절의를 지켰다고 하면서 김상헌에게는 예로써 대우하고, 정온에게는 시호를 내려주길 청하였다.[『인조실록』인조 23년 2월 30일, 인조 23년 3월 18일] 그해에 홍문관 수찬(修撰),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 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다. 이어 1646년(인조 24) 사헌부 집의(執義),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부교리(副校理), 부응교(副應敎), 사복시 정에 임명되었고, 8월에는 영국원종공신 2등 제2에 녹훈되었다. 1648년(인조 26) 관직에서 물러나서 예전에 살던 나주의 박산리(朴山里)로 돌아갔다.[「양만용 행장」]

1649년(효종 즉위년)에 인조가 붕어하고, 효종이 즉위하였는데, 그해 7월 선조(先朝)의 옛 신하라 하여 특별히 홍문관 부응교에 제수되었다.[「양만용 행장」] 그러나 국상(國喪)이 난 지 여러 달이 되었는데도 달려와 곡을 하지 않다가 관직에 제수되자 올라왔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원년 8월 21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효종 원년 8월 14일]

1650년(효종 1) 청풍군수(淸風郡守)가 되었고, 1651년(효종 2) 8월 26일 관사(館舍)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4세였다.[『오재집(梧齋集)』 부록(附錄) 권2 「묘지문(墓誌文)」] 시문집으로 10권 2책의 『오재집(梧齋集)』이 있는데, 1917년 후손인 양선묵(梁璿默)이 편집 및 간행을 하였다.

성품과 일화

양만용의 가문은 굳은 절개로 유명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양만용의 큰 아버지들인 양산룡(梁山龍)과 양산숙(梁山璹)이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양산숙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26년 6월 1일, 『승정원일기』인조 13년 3월 10일]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생하자 양만용의 아버지인 양산축은 어머니와 형님들의 가족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다가 무안 삼향포(三鄕浦)에서 왜적을 만나게 되었고, 이에 양만용의 할머니를 필두로 큰아버지 양산룡과 아버지 양산축, 고모, 큰어머니, 그리고 양산축의 여자 조카가 물에 빠져 순절하였다. 양산숙의 부인은 여종들이 건져내자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하여 언덕에 숨어 있다가 왜적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고 칼로 목을 찔러 순절하였으며, 양산룡의 얼녀(孼女)도 왜적을 만나자 물에 빠져 순절하는 바람에 이때 세상을 떠난 이가 8명이었다. 임진왜란 때 세상을 떠난 양산숙까지 하면 총 9명이 순절을 하였던 것이다.[『선조수정실록』선조 26년 6월 1일, 『승정원일기』인조 13년 3월 10일] 다만 당시 임신 4개월이던 양만용의 어머니만이 가문의 대가 끊긴다며 종들이 만류하는 바람에 살아남았다고 전해지는데, 이때 뱃속에 있던 아이가 바로 양만용이다.

이렇게 태어난 양만용은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들보다 뛰어났고, 15~16세 때 문장이 이미 넉넉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학문이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여 복천(福川)의 묘산(墓山) 아래로 들어가 고문(古文)과 제자(諸子)의 글 및 『사기(史記)』를 밤낮으로 3년 동안 읽은 뒤에야 나와서 사마양시(司馬兩試)에 모두 1등으로 합격하고, 문과에서도 우수한 등급으로 급제하였다.[「양만용 비명」]

승문원에 선발되고 세자시강원 설서와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는데, 문장과 필치가 모두 민첩하여 수작과 대응이 물 흐르는 듯하므로 동류들이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으로 옮겼다가 어머니를 위하여 흥양현감으로 나갔으며, 은혜와 교화로 다스리니 이민(吏民)이 즐겁고 편안하게 여겼다. 그러나 바닷가라서 장기(瘴氣)가 많아 마침내 병으로 사임하고 해임되어 돌아왔는데, 얼마 안 되어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다.[「양만용 비명」]

복제(服制)를 마치고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깨끗한 명망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두 흡족해 하였다. 그러나 본래 벼슬길의 진취를 서둘지 않았으며, 일찍이 나그네 같은 벼슬살이를 더욱 즐겨하지 않아 마침내 옛 전원으로 돌아와 밭 갈고 고기 낚는 것을 일삼으며 날마다 가까운 친구와 서로 만나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며 여유 있게 왕래하였다.[「양만용 비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광주광역시 관산구 동호동 산32-2에 있는데, 부인 광주 이씨(廣州李氏)와 합장되었으며, 신천익(愼天翊)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소은유고(素隱遺稿)』 권1 「고통훈대부 행사간원 사간 양군 비명 병서(故通訓大夫 行司諫院 司諫 梁君 碑銘 幷序)」]

부인 광주 이씨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대흥현감(大興縣監)이태남(李泰男)의 딸이다. 자녀는 2남 4녀를 낳았는데, 1남은 양화남(梁華南), 2남은 양세남(梁世南)이다. 큰 딸은 송지하(宋之河)에게, 둘째 딸은 최거옹(崔擧翁)에게, 셋째 딸은 이정룡(李廷龍)에게, 넷째 딸은 임치(林治)에게 각각 시집갔는데 모두 문벌의 뛰어난 인사들이다.[『소은유고』 권1 「고통훈대부 행사간원 사간 양군 비명 병서」]

참고문헌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오재집(梧齋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소은유고(素隱遺稿)』
  • 『송천유집(松川遺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