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익(愼天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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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2년(선조 25)∼1661년(현종 2) = 70세]. 조선 후기 광해군~효종 때의 문신.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자는 백거(伯擧)이고, 호는 소은(素隱)이다.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거주지는 전라도 영암(靈巖)이다. 아버지는 신인(愼諲)이고, 어머니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충순위(忠順衛)이용(李溶)의 딸이다. 예조 좌랑(佐郞)신천익(愼天翊)의 쌍둥이 형인데, 형제가 현곡(玄谷)조찬한(趙纘韓)에게 수학하여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강원도 관찰사신희남(愼喜男)의 증손자이고, 유일(遺逸) 신사철(愼師哲)의 고조부다. 택당(澤堂)이식(李植)의 6촌 동생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2년(광해군 4) 신천익은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바로 그해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1세였다.[『방목』] 동생 신해익은 당시에는 합격하지 못했으나 이듬해 22세 때 알성시(謁聖試)에 장원 급제하여, 쌍둥이 형제가 “전라도 천재”라고 소문이 널리 났다. 1615년(광해군 7)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임명되었다가,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예조의 낭관(郎官)에 임명되었다. 1616년(광해군 8) 동생 신해익이 고질병으로 고생하다가 25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때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생각하였다. 당시 광해군 시대 북인(北人)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 등이 서인(西人)들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幽閉)시키는 것을 보고 신천익은 정치에 대한 혐오감(嫌惡感)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평생 신천익이 정치를 멀리 하고 초야(草野)에 묻혀 살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그는 “뼈대 있는 농담”을 잘 하기로 소문이 났는데, 그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대부들은 그를 매우 비판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2월 신천익이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었으나, 고향 영암에 노모(老母)가 있다고 핑계하여 사신으로 가기를 사양하였다. 이때 누르하치가 만주의 여진족을 통일하여 후금(後金)을 세우고 명(明)나라와 요동(遼東) 지방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모두 기피하였다. 당시 중국 명나라 서울 북경(北京)으로 사신으로 가는 육로(陸路)는 전쟁이 한창인 요동 지방을 거쳐야 하고, 해로(海路)는 바닷길이 험하여 풍랑에 배가 곧잘 전복되었다. 신천익이 노모가 있다고 핑계하고 사양하자, 광해군이 노하여, “신천익은 노모가 있다고 하지만, 노모가 겨우 50여 세라고 한다. 그가 사신으로 가는 것을 싫어하여 회피한 정상을 알 만하니, 우선 그 관작을 삭탈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신천익은 파직당하여 고향 전라도 영암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나이가 32세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서인(西人) 정권이 신천익을 불렀으므로, 그는 반정파의 새로운 정치를 적극 지지하여, 서울에 올라와서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그해 4월 정언신천익이 아뢰기를, “김덕함(金德諴)은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날 당시에 굳건하게 절개를 지켰으니, 참으로 세상에서 얻기 힘든 인재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를 내버려두고 쓰지 않는다면, 어찌 새로운 조정(朝廷)의 일대 결함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김덕함을 강력히 추천하였다. 폐모론은 광해군 시대에 일어났던 인목대비를 폐위하자는 논의이다. 이리하여 성옹(醒翁)김덕함은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인조 때 대사간 · 대사헌을 지냈다. 이때 신천익은 추탄(楸灘)오윤겸(吳允謙)과 잠와(潛窩)이명준(李命俊) 등을 천거하였는데, 이들은 인조 때 영의정과 대사간을 지냈다. 김덕함 · 오윤겸 · 이명준 등은 서인의 온건파로서 인조 시대 정계의 중진으로 활동하였으므로, 그의 정치적 배경이 되었다.

1623년(인조 1) 8월 사간원 정언에서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옮겼다. 그해 9월 전라좌도(全羅左道)에서 시행된 과거의 감시(監試)에서 응시하는 유생들이 집단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으므로, 과거 시험을 감독하기 위하여 전라도에 파견되었던 지평신천익 등 사헌부 대관(臺官)들이 그 책임을 지고 사직하였다. <인조반정> 직후 새로운 정부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8도(道)에서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를 시행하여 새로운 인재를 많이 뽑았는데, 전라좌도에서 시행된 감시에서 전라도 응시생들이 과거장에 너무 많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사헌부의 몇 사람으로 통제가 불가능하였다. 많은 응시생들이 감시의 과장(科場)에 한꺼번에 몰려 들어가면서, 호패(號牌)를 대조하고 『소학(小學)』을 고강(考講)한 증서인 ‘조흘첩(照訖帖)’을 내놓지 않은 자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이름을 대장에 기록하는 녹명(錄名)도 제대로 하지 않은 자가 많았다.

조선 시대 과거는 초시(初試) · 감시(監試) · 전시(殿試)의 3단계를 거치는데, 초시(初試)나 감시(監試)를 응시하기 며칠 전에 승문원의 국자관(國子官)이 먼저 호패를 대조하여 신분을 확인하고 『소학』을 배강(背講) 곧 시관과 등을 돌리고 글을 외우는 간단한 테스트를 하였는데, 이것을 ‘조흘강(照訖講)’이라고 하였다. 승문원에서 이 조흘강을 통과한 자에게 증명서를 발급하는데, 이것을 ‘조흘첩’이라고 하였다. 응시생은 반드시 조흘첩을 제출하고 자기 이름을 장부에 기록한 다음에야 비로소 과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조흘강과 조흘첩의 시행한 목적은 국가에서 응시생을 제한하여 과거 시험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는 데에 있었다.

시관(試官)정백창(鄭百昌)이 전라좌도의 감시를 중지시켰는데, 이를 감독하는 사헌부의 관리들은 조흘첩을 제출하지 않고 입장(入場)한 유생 1백여 명을 초시 합격자 명단에서 삭제하였다. 이리하여 생원시와 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게 된 전라도 유생들이 집단으로 항의하고, 또 새로 임금이 된 인조에게 그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때 정5품 지평신천익은 국가에서 감시에 조흘강을 시행하는 폐단을 거론하며 전라도 유생들의 편을 들어서 모두 생원시와 진사시에 응시하도록 허락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정4품 장령(掌令)윤황(尹煌)이 이를 반대하여, 두 사람이 크게 논쟁하고 서로 인피(引避)하였다.

지평신천익이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 폐단이 많은 조흘강과 조흘첩을 폐지하고 과거 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자, 인조가 말하기를, “사피(辭避)하지 말라. 삭방(削榜) 된 유생은 30여 명에 불과하다. 1백 명이라는 말은 지나치다. 국가가 법금(法禁)이 없다면 모르거니와, 만약 법금이 있다면 어떻게 유생들이 호소한다고 그 법금을 폐지할 수 있겠는가? 유생들 가운데 쫓아다니면서 억울하다고 부르짖는 자들은 반드시 염치가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을 위해 법령을 폐지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지도 모르겠다. 대간의 말도 이처럼 구차스러워서는 안 된다.” 하였다. 지평신천익은 전라도 유생들의 억울한 사정을 대신 변명하고 모두 생원시와 진사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과거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다가, 도리어 인조의 질책을 받고 <인조반정>의 개혁 정치에 크게 실망하여, 사직하고 고향 전라도 영암으로 돌아와서 은거(隱居)하고 그 뒤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인조 시대 27년 동안 신천익은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에 30여 차례 임명되었으나, 모두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 기록된 신천익의 관직 임명 횟수를 찾아보면, 사헌부의 정5품 지평 1회, 종3품 집의 4회이고, 사간원의 정6품 정언 1회, 정5품 헌납(獻納) 4회, 종3품 사간(司諫) 10회이고, 홍문관의 종6품 부수찬(副修撰) 1회, 정6품 수찬(修撰) 4회, 정5품 교리(校理) 1회, 정4품 응교(應敎) 4회이고, 의정부 사인(舍人) 1회이다. 실록을 편찬할 때 사실을 모두 발췌하여 기록하는 것이 아니므로 실제로 신천익의 관직 임명 횟수는 이보다 더 많았을는지도 모른다.

『현종실록(顯宗實錄)』 「신천익 졸기(卒記)」를 보면, 사신이 “반정한 뒤에 조정에서 3사의 관직에 임명하고 잇따라 조정으로 불러들였으나, 신천익은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그를 고상한 인물로 여겼다.”라고 하였다.[『현종실록』현종 2년 6월 28일 「신천익 졸기」] 또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신천익 졸기」를 보면, “인조반정으로 뒤에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벼슬에 진출하였는데, 신천익은 조정의 기색(氣色)을 보고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어서 갑자기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가끔 조정에 나오기도 하였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하였다.[『현종개수실록』현종 2년 6월 26일 「신천익 졸기」]

1636년(인조 15)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으면서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45일 동안 청(淸)나라 군사에게 포위당하였다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淸)나라 태종(太宗)홍타지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런데 당시 신천익은 전라도 영암에 은거하면서 한번도 인조에게 문안(問安)하지 않았다. 1637년(인조 15) 3월 사헌부에서 그를 탄핵하기를, “임금이 수모를 겪고 신하들이 죽어가는 때를 당하여, 비록 일반 관료라고 하더라도 달려와서 문안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사간원 사간신천익은 일찍이 대관을 역임한 사람으로서 끝내 달려와서 문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직을 제수한 뒤에도 아직 오지 않으니, 그를 파직하소서.” 하니, 인조가 관직을 교체하라고 명하였다.(『인조실록』 인조 15년 3월 9일) 이를 보면, 신천익이 비록 관직에 부임하지 않더라도 관직에 근무하는 사람처럼 파직되고 교체당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부임하지 않는 관직은 실제 근무하지 않더라고 명예직으로 직위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효종 시대 활동

1649년 5월 인조가 돌아가고, 효종이 즉위하자, 효종은 <북벌(北伐) 계획>을 세우고 인재를 널리 구하였다. 효종은 봉림대군(鳳林大君)으로서 병자호란 이후에 형님 소현세자(昭顯世子) 내외와 함께 청나라 심양(瀋陽)에서 오랫동안 볼모생활을 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귀국하여, 형님이 갑자기 죽은 뒤에 왕위에 올랐는데, 그때 마침 청나라가 남쪽 지방의 <3번(藩)의 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므로, 그때를 틈타서 중국의 명나라 잔존 세력과 손을 잡고 청나라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이리하여 당대의 유명한 인재로서 거론되는 신천익을 비롯하여 독신재(獨慎齋)김집(金集)과 송애(松厓)김경여(金慶餘) 등을 모두 불러서 만나보고자 하였다. 그해 6월 신천익을 홍문관 응교와 전한(典翰)에 임명하였으나, 신천익은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또 그해 7월 신천익을 홍문관 부응교(副應敎)와 사헌부 집의로 삼고, 정부에서 거듭 불렀으므로, 신천익은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와서 효종을 알현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 7월 27일 효종이 신천익 등을 인견(引見)하였다. 효종이 승정원에 분부하기를, “김집 등을 오래 전부터 만나보고 싶었으나 병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 오늘 김집 · 김경여 · 신천익 등을 모두 입시(入侍)하게 하라.” 하였다. 김집 등이 들어오자, 효종이 김집 등에게 이르기를, “경들이 선왕(先王)의 은혜를 잊지 않고 모두 서울에 왔으니 고맙다. 나라의 보배는 오직 현자(賢者)뿐인데, 나 역시 경들을 보배로 여긴다.” 하니, 김집 등이 일어나서 사례하고 이어서 진언하기를, “임금의 한 마음이 만화(萬化)의 근원이니, 반드시 임금이 도심(道心)을 기르면, 인심(人心)이 언제나 도심을 따르게 되므로, 일마다 과불급(過不及)의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자주 신료들을 접견하여 치도(治道)를 강론하면, 신하들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붕당(朋黨)이 비록 오늘날의 고질이 되었으나, 그 사람의 처심(處心)과 행사(行事)를 관찰하면,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이 저절로 판별될 것입니다.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물리친다면 붕당은 자리잡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효종이 세 사람의 건의를 가납(嘉納)하였다.

효종 초기에 신천익은 의정부 사인 · 사헌부 집의 · 홍문관 응교 등에 임명되었는데, 조정에 나와서 임금에게 사례하고 벼슬에 부임하여 며칠 지내다가, 병을 핑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신천익과 김경여는 서울에 머물 때에 집을 마련하지 않고 임시로 여사(旅舍)에서 머물렀는데, 효종이 이들을 걱정하여, “김경여와 신천익의 여사가 초야(草野)의 사람들과 다름이 없이 냉랭할 것이니,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특별히 옷가지를 가져다가 주게 하라.” 하였다. 그해 10월 효종이 신천익을 홍문관 부응교로 삼았으므로, 신천익이 서울에 올라와서 효종에게 사은(謝恩)하고, 임금의 정심(正心)이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근본이라고 역설하였다. 1650년(효종 1) 4월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가, 홍문관 수찬을 거쳐 홍문관 응교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모두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51년(효종 2) 5월 효종이 그를 임금의 곁에 두려고,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 신천익이 서울에 올라와서 사은하고 승지를 체직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효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1651년(효종 2) 6월 효종이 주강(晝講)에 나아가서 강독(講讀)하다가 묻기를, “신천익을 승지로 발탁한 것은 항상 서로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는 이미 고향으로 돌아갔는가?” 하자, 경연(經筵)동지사(同知事)조석윤(趙錫胤)이 대답하기를, “아직 도성 안에 있습니다. 전하께서 그 사람을 가상하게 보신다면 한번 사대(賜對)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효종이 한숨을 쉬면서, “서울에 있는 기간만이라도 근시(近侍)의 일원으로 나와서 있으면 서로 볼 수가 있을 터인데, 신천익이 관직에 나오려고 하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하였다.(『효종실록(孝宗實錄)』 효종 2년 6월 9일) 사대는 임금과 독대(獨對)하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효종이 다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붙잡아 보려고 하였으나, 신천익은 끝내 동부승지를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52년(효종 3) 4월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부제학으로 옮겼는데, 1653년(효종 4) 1월 부제학신천익이 상소하여 병을 핑계하고 사면하기를 청하니, 효종이 허락하였다.

1654년(효종 5) 2월 영의정김육(金堉)이 대동법(大同法)을 전국에 실시하려고 하자, 신천익이 삼남(三南)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므로, 잠곡(潛谷)김육이 사임하였다. 이때 효종이 신천익의 전라도 · 경상도 · 충청도 지역에 폐단이 많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서 대동법의 폐단을 자세히 들었다. 그는 조정에 임금을 만나면, 민생의 질고(疾苦)를 그대로 고하였다. 그해 3월 대사간에 임명되어, 서울에 올라와서 사은하고, 호남 지방에 전염병이 돌아서 연해(沿海) 지역이 사망자가 많아서 폐농(廢農)할 지경이라고 보고하였다. 그해 5월 이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는데, 신천익이 상경하여 면직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효종이 하교하기를, “신천익이 이처럼 심한 더위를 당하여 먼 곳에서 왔으니 얼마나 수고가 많을는지 상상할 수 있다. 더구나 객지(客地)에서 생활하자면 넉넉하지 못할 것이니 특별히 식량과 땔감을 주도록 하라.” 하였다.

1655년(효종 6) 7월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1656년(효종 7) 5월 이조 참의로 옮겼다. 1657년(효종 8) 3월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1658년(효종 9) 11월 이조 판서송시열(宋時烈)이 종2품 대신의 관원이 부족하다고 하여 정승들로 하여금 추천하게 하여, 신천익은 좌의정원두표(元斗杓)의 추천에 의하여 이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다. 판서송시열과 참판신천익이 불화하였는데, 당시 송시열의 명성이 굉장히 높았으나, 신천익이 항상 송시열을 조롱하고 비웃었으므로, 송시열의 계열의 유학자들과 사이가 크게 나빠졌다. 그해 12월 효종이 서로 갈라놓기 위하여 신천익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승진시켜 내보냈다. 사헌부 집의김시진(金始振)이 신천익을 탄핵하고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나, 효종이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효종은 신천익에게 관직을 제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송시열과 송준길이 권력을 잡고 있어서 효종은 불화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659년 5월 효종이 승하하고, 그 아들 현종이 즉위하자, 송시열이 조정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신천익은 고향 전라도 영암으로 돌아와서 정사(精舍)를 짓고 이름을 ‘이우당(二友堂)’이라고 하여 동생 신해익을 기리면서 만년을 보냈다. 그는 이우당 정사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다가, 1661년(현종 2) 6월 26일 노병으로 영암의 고향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70세였다. 시문집에 『소은유고(素隱遺稿)』가 남아 있다.

호남학파의 신천익과 기호학파의 송시열

1649년(효종 즉위) 7월 효종이 김집 · 김경여 · 신천익 등을 인견하였을 때,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제자 김집과 김경여는 얼마 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우암(尤庵)송시열을 적극적으로 변명하기를, “송시열이 조관(朝冠)을 벗어던지고 곧장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점잖치 못한 점은 있으나, 벼슬에 나오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절개를 격려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효종이 “내가 잘 조처하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다. 송시열의 스승 김집이 다시 아뢰기를, “송시열이 잠저(潛邸)에서 전하를 오랫동안 모셨으니, 이 사람의 성품이 강하고 행동이 과감한 것을 전하가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그를 좌우에 두고 다듬어 쓰시면 반드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효종이 두 사람의 건의를 받아 들여서, 송시열을 다시 불렀다. 송시열은 서인의 예학파(禮學派) 김장생 · 김집 부자에게 수학하였는데, 김집은 그 제자 송시열 · 송준길을 효종에게 강력히 추천하여, 마침내 효종이 그들을 중용하여 북벌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리하여 기호학파가 효종 · 현종 때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서인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 10월 홍문관 부응교신천익이 상소하기를, “신은 정심(正心)이란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금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하면 말과 행동이 모두 바르게 되니, 그것을 날마다 쓰면 어디에 시행한들 바르게 되지 않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은 모두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근본임을 알았으므로, 그 누군인들 정심에 마음을 쓰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 나중에는 게을러져 끝내 정심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심을 한결같이 가지지 못한 까닭은 정성[誠]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성을 다함은 바로 이른바 ‘지극한 정성에는 쉼이 없다.[至誠無息]’고 하는 것이니, 그것이 『중용(中庸)』의 ‘대공(大公)이 지정(至正)의 도리를 끝까지 다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성을 다해야만 지극함을 다할 수 있으니, 성명께서는 마음에 새기소서.” 하니, 효종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1651년(효종 2) 7월 효종이 주강에 나아가서 『서전(書傳)』의 강독(講讀)을 끝마치고 난 뒤에 전 승지신천익을 불러서 만나보았다. 효종이 신천익에게 묻기를, “저번에 그대를 승지에 임명한 것은 내가 그대를 내 곁에 머물려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병으로 직무를 보지 못하겠다고 하였으므로, 내가 매우 섭섭하였다. 요즘은 그대의 병이 나았는가?” 하니, 신천익이 대답하기를, “아직도 아픈 데가 있습니다.” 하였다. 뒤이어 신천익이 직언(直言)하기를, “전하가 즉위하신 지 3년인데, 나라의 정치가 이와 같이 어지럽고 천재(天災)가 거듭 나타나니, 전하의 정령(政令)에 미진한 바가 있지 않은가 신은 염려됩니다. 임금이 희노(喜怒)를 너무 드러내면, 천지를 포용하는 덕에 손상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가 화평한 정치를 하면, 조야(朝野)가 모두 화평한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여 효종의 직설적이고 과격한 성격을 언급하였다. 이에 효종이 웃으면서, “지금 그대의 말들은 지론(至論)이 아닌 것이 없으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또 변명하기를, “천재(天災)가 매달마다 생기고 있으므로 나는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담당자를 신칙(申飭)하고 있는데도 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신천익이 갑자기 물러가자, 효종이 입시한 승지조계원(趙啓遠)을 돌아보면서, “신천익이 왜 이렇게 갑자기 물러가는가? 내가 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미처 말하지 못했다. 이 사람은 행동거지가 보통 사람과 다르고, 말씨가 꾸밈이 없이 바르다. 문채(文彩)를 숭상하는 일반 유학자와는 다른 점이 있다.” 하였다. 효종이 “문채를 숭상하는 속된 유학자”는 송시열과 송준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효종은 송시열의 예론(禮論)보다 신천익의 꾸밈이 없는 직설(直說)을 더 좋아한 것 같다.

1658년(효종 9) 11월 이보다 앞서 이조 판서송시열이 아뢰기를, “관리 후보자를 추천할 때에 종2품 대신 관원이 항상 부족하여 걱정이니, 정승들로 하여금 당상관(堂上官) 중에서 승진시킬 만한 자를 가려서 뽑게 하소서.” 하였으므로, 효종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대신들이 윤문거(尹文擧) · 신천익 · 박장원(朴長遠) · 유경창(柳慶昌) 등 4인을 천거하였는데, 이때 좌의정원두표가 신천익을 추천하여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송시열은 신천익보다 15년 후배였으나, 직위상으로 판서송시열이 참판신천익보다 높았다. 비록 신천익이 관직에 나오지 않았으나, 두 사람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는데, 당시 송시열의 명성은 굉장히 높았으나, 신천익은 그를 무시하고 항상 송시열을 조롱하고 비웃었기 때문이다. 당시 거유(巨儒) 송시열의 학문을 무시하고 비웃은 사람은 전라도 유학자 신천익 한 사람뿐이었다. 1658년(효종 9) 12월 효종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하다가, 신천익을 교체하여 한성부 우윤으로 승진시켜 내보냈다.

그해 12월 사헌부 집의김시진이 신천익을 탄핵하기를, “국가에서 덕이 있는 사람에게 벼슬을 주는 목적은 천직(天職)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이지, 구차하게 당사자 한 몸을 영광스럽게 해 주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새로 제수된 한성부 우윤신천익은 실없이 괴이한 짓을 하는 사람으로서, 벼슬에서 물러가서 향리에서 뜨내기처럼 세상을 살고 있으니, 이러한 사람은 발탁할 만한 어떤 실상도 없습니다. 새로 제수한 관직을 교체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효종이 따르지 않았다. 반고(盤皐)김시진은 송시열 · 송준길 계열로서 기호학파의 중진이었다.

그해 12월 좌의정원두표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지난번 이조 판서송시열이 대신으로 하여금 등용할 만한 자를 의논하여 추천하게 하였으므로, 신들은 감히 명망을 지니고 청백하며 일을 주간할 국량이 있는 인물을 추천하였습니다. 세상일과 무관하게 자기 지조를 지켜나가는 신천익 같은 자는 응당 그 속에 포함시켜야 마땅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사헌부에서 논박하는 것을 보고 신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신천익은 일찍이 광해군 때 종적을 감추고 스스로 은둔하였으며, 그 뒤에 <인조반정> 때 제일 첫번째로 불러서 청요직을 제수하였으나, 오직 굳은 지조를 지키면서 끝내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상께서 즉위하던 초기에 높은 벼슬을 주고 그를 예우했으나, 그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갈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신천익이 사람들로부터 증오를 받을 만한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에게 자급 하나 올려준 것까지 빼앗으려고 한다는 말입니까. 가령 신천익에게 탄핵받을 일이 있다고 한다면, 곧바로 근거를 대면서 논박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신이 대신으로서 아는 사람 하나를 천거했다가 대간으로부터 크게 논핵을 받았으니, 신이 잘못 천거한 죄가 큽니다.” 하니, 효종이 대답하기를, “대간의 논의에 대해서는 내가 그 불가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따르지 않았다. 경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하였다.

신천익은 서인(西人) 가운데 탄수(灘叟)원두표 · 추탄오윤겸 · 택당이식 등 온건파의 신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호남의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송시열의 외고집 때문에 서인은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 나누어졌다.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이 조선조 후기 2백여 년 이상 정권을 장악하면서, 송시열을 송자(宋子)라고 일컫고 공자(孔子) · 주자(朱子)와 같은 반열에 올리고 그 권위를 신성시하였으므로, 송시열을 무시하고 항상 조롱하고 비웃었던 신천익은 발붙일 여지기 없었다. 호남학파에서 수은(睡隱)강항(姜沆)의 계열이 있는데, 강항은 우의정강귀손(姜龜孫)의 5세손으로서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전 가족이 납치되어, 3년 동안(1597~1600) 일본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돌아와서 『간양록(看羊錄)』을 짓고, 낙향하여 전라도 영암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 제자 가운데 윤선거(尹宣擧) · 윤순거(尹舜擧) 형제 등은 중앙에 진출하여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나중에 송시열과 틈이 벌어져서 송시열의 제자 윤증(尹拯)을 지지하여 소론파가 되었기 때문에, 권력에서 소외되었다. 이에 비하여 신천익의 제자는 모두 고향에 은거하여 유일(遺逸)로 남았으므로, 이름을 남긴 사람이 드물었다.

성품과 일화

신천익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기개(氣槪)가 있었으며, 해학(諧謔)을 좋아하고 권세(權勢)에 대항하고 굴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권력을 붙쫓는 사람들을 경시하고 그들에게 오만한 자세를 취하였다.[『현종실록』현종 2년 6월 28일 「신천익 졸기」] 신천익과 신해익은 쌍둥이 형제로, 형 신천익이 조금 먼저 태어났고 아우 신해익이 바로 다음에 태어났다. 두 쌍둥이 형제는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수려한 용모가 너무나 닮아서 비록 가까운 친척들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6]

광해군과 인조 때 당파 싸움이 치열하고 정변이 일어나자,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이들을 유일이라고 불렀다. 그 중에서 인조 때 대간이나 시종(侍從)의 청요직에 임명하더라도, 이를 사양하고 재야에 묻혀 살았던 사람이 호남에 신천익, 영남에 김령(金坽), 기호에 이필행(李必行)의 3명이 가장 유명하였다. 김령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경상도 예안(瘞安) 사람이고, 이필행(李必行)은 광주 이씨(廣州李氏)로 경기도 여주(驪州) 사람인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다가 당파 싸움을 싫어하여 낙향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 영암의 신천익 · 예천의 김령 · 여주의 이필행에게 대간과 시종의 청요직 벼슬을 주고 조정으로 불렀으나 모두 병을 핑계하고 벼슬에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세 사람은 처음부터 벼슬할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사람은 모두 학식과 덕망이 있었으므로, 그 지방의 유생들로부터 추앙과 흠모(欽慕)를 받았다." 『인조실록』 인조 17년 7월 11일)

1654년(효종 5) 5월 효종이 주강에 나아가서, 이조 참의신천익을 불러서 만나보고, 호남 지방의 기근과 전염병에 대한 상황을 물으니, 신천익이 아뢰기를, “거듭 기근이 든 나머지에 전염병이 또 크게 돌고 있는데, 온 도가 똑같으나 강진(康津)과 해남(海南) 등의 고을이 더욱 심합니다.” 하였다. 효종이 이르기를, “이는 내가 실덕(失德)한 소치이다. 그대가 품은 생각이 있거든 숨김없이 모두 펼쳐서 나의 미치지 못한 점을 도우라.” 하니, 신천익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허물을 들으려 하는 그것이 바로 허물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하였다. 신천익이 물러가자, 효종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신천익은 말을 꾸미지 않으니, 이것이 가상하다.” 하였다.(『효종실록』 효종 5년 5월 26일)

1654년(효종 5) 천재가 발생하자, 효종이 구언(求言)하였는데, 황해도 도관찰사김홍욱(金弘郁)이 소현 세자빈인 강빈(姜嬪)의 옥사(獄事)를 거론하고 강빈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그 한을 풀어줄 것을 상소하였다. 8년 전에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자, 강빈을 싫어하여 <강빈 옥사>를 일으켜서 강빈과 그녀의 두 아들을 죽이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효종은 자신의 왕위 계승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격노하여 김홍욱을 체포하여 하옥(下獄)하고 친히 국문(鞫問)하였다. 김홍욱은 국문을 받다가 장살(杖殺)되었으나, 조정의 어느 누구도 감히 만류하지 못하였다. 그때 신천익이 마침 서울에 올라와서 효종을 알현하였는데, 사람들이 신천익이 효종에게 바른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김홍욱이 죽음을 당했지만, 그는 모르는 체하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전라도 영암으로 돌아가 버렸으므로, 송시열의 제자들이 모두 그를 비웃고 욕하였다. 그러나 실록의 사관은 그가 조용히 물러나서 지조를 지킨 것은 참으로 남보다 뛰어난 점이라고 하였다.[『현종개수실록』현종 2년 6월 26일 「신천익 졸기」]

『현종실록』의 「신천익 졸기」를 보면, “효종 때 신천익이 대사간에 임명되어, 조정에 부름에 응하여 입경(入京)하였다. 조사(朝士)들이 그를 찾아가서 시사(時事)를 묻기라도 하면, 그는 번번이 허튼 소리로써 농담하고 진심으로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가 매사에 처신하는 것을 보면 그도 일반 유학자와 다르지 않았다. 그가 자기 집안에서 하는 행동을 보더라도 유학의 정양(靜養)하는 공부는 하지 않고 오로지 계속 술만 마시고 남과 우스갯소리를 즐겼는데, 어떤 사람은 혹시 그가 무료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하였다.[『현종실록』현종 2년 6월 28일 「신천익 졸기」] 그러나 이것은 송시열의 제자들이 신천익을 일부러 헐뜯고 비난한 글이다.

택당이식은 서인의 온건파를 대표하는 유명한 유학자였는데, 종종 때 사장파(詞章派)의 영수 좌의정이행(李荇)이 현손(玄孫)이었다. 이식의 아버지 이안신(李安信)과 신천익의 어머니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4촌간이고, 용재(容齋)이행의 둘째 아들 이원상(李元詳)의 손자 · 손녀였다. 이식은 나이가 신천익보다 8세 위였는데, 두 사람은 서로 뜻이 통하여 교류가 잦았다. 전라도 영암의 신천익이 편지와 함께 『이소경(離騷經)』의 문체로 글을 한 편 지어서 부쳤으므로, 이식이 화답(和答)하는 시(詩)를 지어서 보냈다. 택당이식은 ‘소은(素隱)신백거(愼伯擧)에게 사례하는 시를 부친다’라는 제목의 율시(律詩) 한 편을 지어서 신천익에게 사례하는 뜻을 표하고, 그의 굳건한 지조를 격려하였다.

그 시의 첫 번째 련(聯)을 보면, “일찍이 호남의 바다에서 노닐던 흥취는 이미 식었으나[湖海曾遊興已闌], 그대와 함께 즐겁던 추억으로 마음이 되돌아가고 있소[歸心尙憶對君歡].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도 노송(老松)은 곧게 뻗어가고[大冬嚴雪貞松老], 천 리의 미친 물결에 부대껴도 지주(支柱)는 끄떡없네[千里狂湍砥柱安].” 하였다. 두 사람은 평소 자주 만나서 전라도 해남의 바닷가에 배를 타고 노닐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 속 ‘엄동 설한의 추운 겨울’은 광해군 시대를 말하고, ‘천 리의 미친 물결’은 서울의 조정에서 송시열 일파의 전횡을 말한다. 이식은 신천익을 노송과 지주에 비교하면서 굳건하게 지조를 지키는 신천익을 격려하고 칭찬하였다.[『택당집(澤堂集)』 속집 권6]

묘소와 후손

그의 사망일을 『현종실록』에서는 1661년(현종 2) 6월 28일이라고 하였으나, 『현종개수실록』에서는 1661년 6월 26일이라고 하였는데, 개수실록이 고쳐서 기록한 것이므로, 기일(忌日)이 6월 26일이다. 전라도 영암의 영보사(永保祠)에 제향되었다.

부인 고흥 유씨(高興柳氏)는 유동립(柳東立)의 딸인데, 자녀는 아들 신성삼(愼聖三)을 두었다.[『거창 신씨 족보(居昌愼氏族譜)』] 그의 고손자 신사철(愼師哲)은 고조부 신천익을 본받아 과거를 보지 않고 평생 초야에 묻혀서 유일로서 살았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택당집(澤堂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약천집(藥川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현주집(玄洲集)』
  • 『거창 신씨 족보(居昌愼氏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