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安止)
총론
[1377년(고려 우왕 3)~1464년(세조 10) = 88세]. 조선 초기 태종(太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부제학(副提學)과 중추부(中樞府) 영사(領事) 등을 지냈다. 자는 자행(子行)이고, 호는 고은(皐隱)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본관은 탐진(耽津)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종사랑(從仕郞)안사종(安士宗)이며, 할아버지는 안윤기(安允基)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안현(安顯)이다. 오랫동안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였다.
태종~세종 시대 활동
1414년(태종 14)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박사(博士)가 되었다.[『방목(榜目)』] 이어 1416년(태종 16)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이 되었으며, 얼마 후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으로 옮겼다.(『태종실록(太宗實錄)』 16년 8월 17일),(『태종실록』 17년 6월 9일),[『방목』]
1420년(세종 2) 세종(世宗)은 인재 양성과 학문의 진흥을 목적으로 학문 연구 중심기관인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유망한 젊은 문학(文學)의 선비를 뽑아 집현전의 관리로 임명하였다. 이때 안지(安止)도 집현전 수찬(修撰)으로 선발되었다.(『세종실록(世宗實錄)』 2년 3월 16일) 이후 집현전 부교리(副校理)가 되었으며, 1424년(세종 6) 유계문(柳季聞)·최흥효(崔興孝) 등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아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써서 완성하였다.(『세종실록』 5년 9월 21일),(『세종실록』 6년 4월 20일) 그는 집현접 응교(應敎)와 집현전 직전(直殿) 등을 거쳐, 1434년(세종 16) 집현전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세종실록』 9년 10월 8일),(『세종실록』 12년 8월 10일),(『세종실록』 16년 8월 17일) 그리고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자치통감훈의(自治通鑑訓義)』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1436년(세종 18)에는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흥천사(興天寺)를 철거 후 새로 짓겠다는 세종의 의견에 집현전을 대표하여 적극 반대하였다.(『세종실록』 17년 6월 8일),(『세종실록』 18년 6월 10일) 그러나 세종은 흥천사의 사리각(舍利閣)이 낡아서 위험하기 때문에 철거하고 새로 지으려는 것이지 흥천사 중수가 아니라며 반박하였다. 이후에도 안지는 계속하여 집현전 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1438년(세종 20)에는 정인지(鄭麟趾) 및 권제(權踶) 등과 함께 외교 문서인 사대문서(事大文書)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어 1439년(세종 21)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인 1440년(세종 22)에는 이조 참판(參判)을 역임하다가 1441년(세종 23)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 및 승문원(承文院) 제조(提調)가 되었다.(『세종실록』 21년 12월 1일),(『세종실록』 22년 12월 19일),(『세종실록』 23년 3월 9일),(『세종실록』 23년 8월 22일) 그런 가운데 1442년(세종 24) 세종은 『태조실록(太祖實錄)』을 보니 태조(太祖)의 기록이 매우 소략하다며 안지와 남수문(南秀文)에게 태조가 활동한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그 활동을 조사하게 하였다.(『세종실록』 24년 3월 2일) 이때 조사한 내용들은 안지가 권제 등과 함께 그해 8월 편찬을 완료한 『고려사(高麗史)』에 포함되었으며, 이후 그들은 이전에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이 간략하니 고쳐 수찬할 것을 건의하여 세종의 허락을 받았다.(『세종실록』 24년 9월 4일),(『세종실록』 31년 2월 22일)
1444년(세종 26) 공조 참판이 된 안지는 이듬해인 1445년(세종 27) 정인지·권제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완성하였다.[『세종실록』 26년 윤 7월 14일 1번째기사],(『세종실록』 27년 4월 5일) 그리고 그해 중추원 부사를 거쳐 인순부윤(仁順府尹)에 임명된 후에 『태종실록』과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조실록(太祖實錄)』을 전주사고(全州史庫)에 보관하는 일을 담당하였다.(『세종실록』 27년 8월 6일),(『세종실록』 27년 10월 4일),(『세종실록』 27년 10월 18일) 이어 예문관 제학과 호조 참판, 중추원 부사, 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다가, 1448년(세종 30)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세종실록』 28년 5월 7일),(『세종실록』 28년 5월 23일),(『세종실록』 28년 12월 2일),(『세종실록』 29년 5월 12일),(『세종실록』 30년 7월 1일) 그런데 이듬해인 1449년(세종 31) 안지가 권제와 함께 편찬한 『고려사』가 권제의 사적인 개입으로 공정하지 않으며 왜곡된 부분들이 많다고 지적되면서 권제는 고신과 시호가 추탈되었고, 안지 또한 고신을 빼앗겼다.(『세종실록』 31년 2월 22일) 이후 그는 호남 지방을 유람하다가, 문종(文宗) 대에 이 일은 권제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여 고신을 돌려받았다.(『문종실록(文宗實錄)』 2년 4월 11일),(『세조실록(世祖實錄)』 10년 8월 4일)
단종(端宗) 대에 안지는 문과 출신 가운데 정2품 이상의 70세가 넘은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455년(단종 3)에는 중추원 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단종실록(端宗實錄)』 1년 10월 17일),(『단종실록』 3년 3월 7일) 이어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안지는 경연청(經筵廳) 지사가 되었고, 이후 세조는 안지가 나이가 많은데도 건강하다며 중추원 판사(判事)의 관직을 내렸으며, 아울러 그의 사위 황맹수(黃孟粹)의 품계도 더하여 주었다.(『세조실록』 1년 7월 21일),(『세조실록』 7년 6월 5일) 1462년(세조 8)부터 안지는 중추원 동지사(同知事), 중추원 첨지사(僉知事), 중추원 영사(領事), 봉조청(奉朝請)에 임명되었다가, 1464년(세조 10) 노병을 들어 관직에서 물러났다.(『세조실록』 8년 1월 5일),(『세조실록』 8년 4월 11일),(『세조실록』 9년 9월 20일),(『세조실록』 10년 4월 12일) 그리고 그해 8월 세상을 떠나니, 당시 나이 88세였다.(『세조실록』 10년 8월 4일)
성품과 일화
안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안지는 충후(忠厚)하고, 문장을 읽어서 잘 지었으며, 해서(楷書)에 능하였다. 마음가짐이 유연하여 세정(世情)에 얽매이지 않았고, 집이 매우 가난하고 쓸쓸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형편이었는데, 스스로 ‘고은’이라 불렀다. 시를 잘 지었으며, 간고(艱苦)한 일을 각박하게 처리하지 않고 여유 있는 태도를 취하였다.(『세조실록』 10년 8월 4일)
또 안지의 집이 본래 빈한(貧寒)하여 그가 고향에 돌아갈 적에 행장(行裝)이 몇 바리의 짐에 차지도 않았고, 풍모가 중인(中人)에 지나지 않았는데, 눈썹이 기다랗고 머리가 하얗게 희었다. 광화문(光化門)을 지날 때 들것에서 내려 궁궐을 향하여 배사(拜謝)하고 통곡하다가 가니, 사람들이 모두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세조실록』 10년 4월 12일)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정이다. 묘소는 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 예촌리에 있다. 경산의 조곡서원(早谷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감무(監務)송충손(宋忠孫)의 딸로 1남 3녀를 두었는데, 1남 안건(安健)은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를 지냈다. 1녀는 운봉현감(雲峰縣監)을 지낸 황맹수의 처이고, 2녀는 중추원 첨지사조득인(趙得仁)의 처이며, 3녀는 참의(參議)임호(任灝)의 처이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삼탄집(三灘集)』
- 『용재총화(慵齋叢話) 』
- 『청선고(淸選考)』
- 『해동잡록(海東雜錄) 』
- 조춘호, 「조선왕조실록 수록 졸기와 족보편찬 - 세종조 문신 고은 안지 선생을 중심으로」, 『동양예학』12, 동양예학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