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사고(全州史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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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9년(세종 21)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전라도 전주에 설치한 사고.

개설

조선 건국 직후에는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사고(史庫)가 있었다. 경복궁을 지어 한양으로 천도한 뒤에는 조선에서도 고려의 사고 제도를 계승하여, 초기부터 충주(忠州)와 한양의 춘추관 두 곳에 사고를 두었다. 1439년에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새로 사고를 증치하였다.

위치 및 용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志勝覽)』에 따르면 조선초에는 전주에 실록각(實錄閣)이 없었다. 그리하여 1445년에 안지(安止)를 보내 『태조실록』 15권, 『공정왕실록』 6권, 『태종실록』 36권을 봉안할 때에는 부내 승의사(僧義寺)에 보관했었고, 1464년(세조 10)에는 다시 진남루(鎭南樓)로 옮겼다.

1472년(성종 3)에 김지경(金之慶)이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실록각 건립을 추진하여 경기전(慶基殿) 동쪽에 자리를 정하고, 순창군수 김극련(金克鍊)을 책임자로 하여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하였으며, 진남루에 보관되던 실록 등을 옮겨 봉안하였다.

성종 때에 이르러 『조선왕조실록』 정본은 필사가 아닌 인쇄를 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한 부만 필사하여 보관하던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을 모두 활자로 출판하여 4사고에 1부씩 보관했다. 이리하여 전주사고에도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이 추가로 봉안되었다.

변천 및 현황

한양에 있는 춘추관 뿐 아니라 충주(忠州)·전주(全州)·성주(星州) 모두 읍치(邑治)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전란이나 화재 등 인재(人災)의 영향을 받기 쉬웠다. 이렇게 읍내에 있던 사고가 인재에 노출되어 있었던 까닭에 임진왜란 때 사고가 모두 소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유일하게 남은 사고가 전주사고였다. 전주사고는 당시 전주사고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만이 유일하게 보존된 것이 아니라, 사고 건물 자체도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었다.

전주사고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은 왜군에게 전주가 함락되기 직전에 내장산으로 옮겨져 보관되었고, 이후 왜란중에도 불구하고 태인, 익산, 용인, 임화, 부여, 정산, 아산, 해주, 강화를 경유하여 묘향산사고에 안치되었다. 한편 임진왜란 때 전화를 면하고 보존된 전주사고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실록각이 소실되었다.

한편 조정에서는 왜란 후에 이 전주본을 저본으로 교정본을 만들고 교정본 3부를 인쇄하여 확보된 5부를 서울 춘추관사고와 지방에 새로이 건립한 오대산·태백산·마니산·적상산사고에 1부씩을 보관하였다. 이 때 묘향산사고에 있던 전주본은 마니산사고로 이전되었다.

이에 따라 전주사고는 실록각이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지 못하였기에 사고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 후 1699년(숙종 25) 소실된 실록각 자리에 별전이 건립되었고, 1963년 소실된 별전 자리에 전주시립박물관을 건립하였다. 이어 1990년에 실록각을 복원하기 위해 전주시립박물관을 철거하고 실록각 터를 발굴하였으며, 1991년에 실록각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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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실록각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1층은 넓게 트였으며 2층은 사다리를 통해 올라갔다. 사다리는 돌 위에 세워져 있었고 건물 주위에 담을 쌓았다. 조선시대 전형적인 사고 건물 형태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조선전기의 『조선왕조실록』이 임진왜란 중에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이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경기전(慶基殿)참봉(參奉)오희길(吳希吉)이 『조선왕조실록』 보존에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전라도 유생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 등은 1592년(선조 25) 6월에 일본군이 금산(錦山)에 침입했다는 말을 듣고 사재를 털어 『태조실록』부터 13대 『명종실록』까지 804권의 『조선왕조실록』과 기타 사고에 소장되어 있는 도서를 정읍현 내장산으로 운반하였다. 그리고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1년여를 번갈아 지켰다. 그리고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후속 조치가 이루어졌다.

조정에서는 1593년 7월 『조선왕조실록』과 어진 이송에 들어갔다. 7월 9일에 정읍현감 유탁(兪濯)의 주도로 정읍현에 옮기고, 7월 11일에 손홍록과 안의를 배행 차사원(陪行差使員)으로 정하여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싣고 정읍을 출발하여 태인현, 익산군, 용안현, 임천군 부여현, 정산현을 경유하여 19일 아산현에 도착하였다.

이때는 왜적이 한양에서 퇴각하여 경상도로 물러가 있었으며 전쟁이 소강상태에 있었으므로 충청도검찰사(忠淸道檢察使)이산보(李山甫)가 수용(晬容)을 행재소까지 모시기 어렵다고 선조에게 진언했고, 선조는 수용을 아산현에 안치하고 『조선왕조실록』은 해주목으로 운반하도록 전교했다. 그 뒤 『조선왕조실록』은 해주에서 강화도를 거쳐 다시 묘향산으로 옮겨졌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이후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을 기초로 1603년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2년 9개월 사이에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804권의 교정본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고, 이 교정본 3부를 활자로 출판했다. 이리하여 『조선왕조실록』은 전주사고에 있던 원본과, 간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정본을 합하여 5부가 있게 되었다(『선조실록』 39년 4월 28일). 5부 중 1부는 옛날과 같이 서울 춘추관에 두고 다른 4부는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경상북도 봉화군 태백산(太白山),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妙香山),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五臺山)과 같이 병화를 피할 수 있는 심산유곡과 섬을 택하여 사고를 설치하고 1부씩 분장했다.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는 신인본(新印本), 마니산에는 전주사고본,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각각 봉안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국사편찬위원회 편, 『사고지(史庫址) 조사 보고서』, 국사편찬위원회, 1986.
  • 김경수, 『조선시대의 사관 연구』, 국학자료원, 1998.
  • 배현숙, 『조선 실록 연구 서설』, 태일사, 2002.
  •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7.
  • 정구복, 「조선초기의 춘추관과 실록편찬」, 『택와허선도선생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일조각, 1992.
  • 이희권, 「전라인의 역사의식과 조선왕조실록의 수호」, 『우리문화연구』3, 2001.
  • 한우근, 「조선 전기 사관과 실록 편찬에 관한 연구」, 『진단학보』66,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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