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각(實錄閣)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실록각 |
한글표제 | 실록각 |
한자표제 | 實錄閣 |
상위어 | 사고(史庫) |
관련어 | 강화사고(江華史庫), 내사고(內史庫), 선원각(璿源閣), 선원록각(璿源錄閣), 선원보각(璿源寶閣), 『실록(實錄)』,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 외사고(外史庫),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족보(族譜), 춘추관(春秋館),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강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실록각(實錄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1년 7월 3일, 『현종실록』 1년 11월 8일 |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건물.
개설
실록각은 조선시대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건물로서 사고(史庫)를 구성하는 여러 건물 중 하나이다. 조선전기의 사고는 하나의 건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전주사고(全州史庫) 및 이와 유사했던 것으로 보이는 성주사고(星州史庫)는 누각식 단일 건물이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실록각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보관하는 선원각(璿源閣)으로 이루어진다. 선원각은 선원보각(璿源寶閣) 또는 선원록각(璿源錄閣)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현재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강화사고(江華史庫)에서 살펴볼 수 있다.
1439년(세종 21)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신설하여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내사고인 춘추관(春秋館)과 외사고인 충주·성주·전주사고 4곳이 있었다(『세종실록』 21년 7월 3일). 그런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한 전국의 모든 사고가 불에 타 버렸다. 이때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1593년(선조 26) 내장산, 해주 등을 거쳐 평안도로 옮겨 임진왜란 중 사라지지 않은 유일한 사고본으로 남게 되었다. 그 후 전주사고본을 원본으로 하여 정본 3부와 초본인 교정본 1부를 인쇄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5부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피할 수 있도록 깊은 산중이나 섬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였다. 지방에는 정족산(鼎足山), 적상산(赤裳山), 태백산(太白山), 오대산(五臺山)에 사고를 두고 부근의 전등사(傳燈寺), 안국사(安國寺), 각화사(覺華寺), 월정사(月精寺)를 수호사찰(守護寺刹)로 지정하여 주지(住持)를 총섭(總攝)에 임명하고 지키게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는 사고를 두어 역대 왕실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의궤류(儀軌類)와 경서(經書), 나아가 개인의 문집(文集)과 보첩(譜牒) 등을 보관했다. 가장 중요한 사고는 도성 내 춘추관에 있는 내사고(內史庫)였으며, 소실이나 분실의 우려를 감안해 도성 이외의 지역에 외사고(外史庫)를 동시에 운영했다.
사고는 대개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는 실록각과 『선원록』이 보관되는 선원각 2개의 건물로 구성된다. 조선전기의 사고는 단독 건물로 읍성의 중심 관아와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후기의 사고는 산속 경사면 외진 곳에 숨겨 두었다. 사고의 건물은 방향에 관계없이 실록각과 선원각을 앞뒤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주변에는 부속 건물을 두어 돌담이나 토담을 타원형으로 둘러쌓고 1~2개의 출입문을 두었다.
태백산사고 터의 발굴 조사 결과를 보면 실록각 터, 선원각 터, 책을 볕에 쬐게 하는 포쇄관(曝曬館) 터, 근천관(近天館) 터 등 당시의 사고 건물의 배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오대산사고와 태백산사고의 건물들은 2층 구조에 상층과 하층의 지붕을 따로 설치하였고 내부도 2층 구조이다. 정면 칸수가 4칸으로서 일반적인 관아 건물이 홀수의 칸수를 갖는 것과는 구별된다. 적상산사고, 성주사고, 전주사고 역시 2층 구조로 되어 있지만 상층에만 지붕을 설치한 점이 다르다. 건물들은, 1층이 되는 부분에 바닥이나 벽·문을 설치하지 않고 기둥만 세워 두며 2층에 바닥을 설치하는 필로티(pilotis) 구조로 되어 있다. 널빤지로 된 판벽(板壁)이 설치되었고 우물마루가 깔렸으며 칸 사이에 살창을 두었다. 이는 통풍을 원활하게 하고, 동물이나 곤충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다.
강화사고는 단층 건물로 일반 목조 건축과 외형상 큰 차이는 없다. 다만 벽체의 일부를 화방벽(火防壁)으로 쌓았는데 이는 화재에 대비한 것이다.
변천
임진왜란 이후, 유일한 원본인 전주사고본은 강화의 마리산에 두었다가 정족산사고로 옮겼다. 새로 인쇄한 정본 가운데 1본은 춘추관에 두고 나머지는 태백산사고와 묘향산사고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초본인 교정본은 오대산사고에 보관하였다. 얼마 후 묘향산사고는 북방 후금(後金)의 확장에 대비하여 적상산으로 옮겼다.
적상산사고는 1614년(광해군 6) 실록각을 짓고 『조선왕조실록』을 옮겨온 후, 1641년(인조 19) 선원전이 더해졌다. 여기에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을 봉안함으로써 완전한 사고가 되었다. 적상산사고의 실록각은 현재 소멸되었고 선원각은 현재 안국사 천불전(千佛殿)으로 바뀌었다.
정족산사고는 1653년(효종 4) 마리산사고 화재 후 건립이 추진되었다. 1660년(현종 1) 정족산성이 완성되면서 장사각(藏史閣)과 선원각(璿源閣)이 건립되었다(『현종실록』 1년 11월 8일). 건물은 1930년경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장사각과 선원각의 현판만이 전등사에 보관되어 있다.
오대산사고의 건물은 한국전쟁 때 불타, 터만 남았다가 1989년 선원각이 복원되었다. 선원각 앞 사고 터에는 영감사(靈鑑寺) 법당이 자리 잡고 있다.
태백산사고는 명종 이후에 편찬 간행된 역대 왕들의 『조선왕조실록』을 계속 보관·관리하였다. 1910년(융희 4)의 국권 침탈 뒤 『조선왕조실록』 등 서적들이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어 종친부(宗親府) 건물로 옮겨짐에 따라 그 기능이 정지되어 건물도 폐허화하였다.
참고문헌
- 김흥섭·박언곤, 「조선시대 사고건물의 건축특성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144, 2000.
- 박대길, 「조선후기 적상산사고 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