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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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3년(인조 11)에 묘향산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옮겨 보관하기 위해 무주 적상산에 건립한 사고(史庫).

개설

조선전기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역사 기록이나 주요 서책을 춘추관과 외사고(外史庫)인 충주(忠州)·전주(全州)·성주(星州) 사고에 보관하는 4사고 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다 임진왜란으로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사고 등 모든 사고가 불에 탔고, 사고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은 전주사고본만 소실을 면하고 보존되었다. 이 전주사고본을 기초로 임진왜란이 평정된 이후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2년 9개월 사이에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804권의 『조선왕조실록』 3부를 활자로 출판했다. 이리하여 『조선왕조실록』은 전주사고에 있던 원본과, 간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교정본을 합하여 5부가 있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 조선전기 읍치(邑治) 지역에 사고를 두었다가 전쟁과 화재를 당해 『조선왕조실록』 등이 소실된 경험을 바탕으로 사고를 산간과 섬에 두어 실록 등의 보관에 만전을 기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605년(선조 38)에 수축된 강화 사각(史閣)을 시작으로 1660년까지 태백산(太白山)·오대산(五臺山)·적상산(赤裳山)·정족산(鼎足山) 등에 4개의 외사고를 건립하고 그 모두에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 등을 보관하게 하였다. 이와 관련되어 적상산사고는 1628년(인조 6)에 강석기(姜碩期)가 전년에 시작된 적상산성(赤裳山城)의 보수와 연관시켜 재인본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관하고 있는 묘향산사고(妙香山史庫)는 정묘호란 이후로 단지 승려 한 사람이 수직하기 때문에 관리가 소홀하니 적상산에 사고를 건립하여 옮기자고 한 건의로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또 이와 관련되어 1631년에 윤방(尹昉)이 묘향산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을 서울로 가져와서 춘추관사고에 합하여 보관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지만, 평안도가 전쟁으로 피폐하였다 하여 실행을 미루었다. 그러다가 1633년에 묘향산사고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 등을 적상산사고로 옮겨 보관하였다(『인조실록』 11년 1월 23일).

위치 및 용도

적상산사고는 충청도 무주군 적상산 정상 부근 분지에 있었다. 적상산사고에는 5부의 『조선왕조실록』 중 왜란 후에 새로이 인쇄한 재인본과 선원보 등을 보관하였다.

변천 및 현황

적상산사고에 보관된 재인본 『조선왕조실록』은 일제강점기에 구황실문고로 옮겨 져 보관되다가 6·25 동란 중에 분실되었다. 이와 관련되어 북한이 1975~1990년에 『조선왕조실록』을 완역하고, 1993년에 『이조실록』의 명칭으로 출판하였는데, 아마도 번역의 저본이 된 책이 6·25 때 분실된 적상산본 『조선왕조실록』인 듯하다. 사고의 건물은 1938년에 촬영된 사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후에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1992년 양수발전소를 건립할 때 안국사와 사고지가 물에 잠겨, 안국사는 호국사 근방으로 이건하였고, 사고는 원 위치보다 높여 1999년에 중건하였다.

형태

사고의 구조는 목조 기와집 2층으로, 2동이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되었다. 북쪽 건물이 사고이고 남쪽 건물은 선원보각(璿源寶閣)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위에 방화벽으로 낮은 돌담이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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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국사편찬위원회 편, 『사고지(史庫址) 조사 보고서』, 국사편찬위원회, 1986.
  • 김경수, 『조선시대의 사관 연구』, 국학자료원, 1998.
  • 배현숙, 『조선 실록 연구 서설』, 태일사, 2002.
  •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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