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번(申碩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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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6년(선조 29)∼1675년(숙종 1) = 80세.] 조선 후기 인조 때의 문신. 유일(遺逸).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을 지냈고, 증직(贈職)은 이조 참의(參議)이다. 자는 중연(仲衍)이고, 호는 백원(百源)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상주(尙州)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신경익(申景翼)인데, 생부는 선무랑(宣務郞)신근(申謹)이고, 생모는 덕수 이씨(德水李氏)이다. 젊어서 송교(松郊)이목(李楘)에게 수업하다가, 나중에 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33년(인조 11) 증광(增廣) 사마시(司馬試)에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8세였다.[『방목』] 1637년(인조 15)에 치러진 대과에 실패한 이후로는 과거를 보러 나가지 않고 유학(儒學)의 공부에 전념하였다. 성리학(性理學)의 조예가 깊어지자, 사우(士友)들 사이에 자못 이름이 높았다. 유일로 천거되어 성균관(成均館) 사업(司業) ·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진선(進善)에 제수(除授)되었고, 또 두 번이나 대관(臺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38 「사헌부 장령 증 이조 참의 신공 묘갈명(司憲府掌令贈吏曹參議申公墓碣銘)」]

1641년(인조 19) 8월 송시열(宋時烈)의 천거로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다.(『인조실록』 인조 19년 8월 7일) 그 뒤에 1644년(인조 22) 경기전(慶基殿)참봉(參奉)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한 달포 만에 사임하고 돌아왔다. 그 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과 별좌(別坐) 등에 임명되었다. 1646년(인조 24) 다시 유일로 천거되어, 품계를 몇 단계나 초자(超資)하여 6품의 형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명재유고』 권38 「사헌부 장령 증 이조 참의 신공 묘갈명」]

효종 · 현종 시대 활동

효종이 북벌(北伐) 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인재를 널리 구하자, 이조에서 그 뜻을 받들어 신석번을 비롯하여 10명을 유일로 추천하였는데, 이들을 곧바로 6품위 관직에 임명하였다.[『명재유고』 권38 「사헌부 장령 증 이조 참의 신공 묘갈명」] 1653년(효종 4) 7월 우의정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신이 사람을 천거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천거할 만한 사람을 얻지 못하였는데, 상주 사람 신석번이 학행(學行)이 있다고 하니, 이 사람은 의망(擬望)할 만합니다.” 하니, 효종이 그대로 따랐다.[『효종실록』효종 4년 7월 15일] 그러나 신석번은 대궐에 나아가서 사은(謝恩)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1659년(효종 10) 5월 효종이 승하하자, 신석번은 서울로 달려가서 곡(哭)하고 장례를 치른 뒤에 상주로 돌아왔다. 그때 현종이 특별히 명하여, 지방에서 임금의 장례에 문상하려고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을 기록하여 직책에 임명하도록 하였는데, 이조 판서송준길(宋浚吉)이 청대(請對)하고 입시하여 신석번에 관하여 아뢰니, 현종이 그에게 직책을 주라고 명하였다. 연달아 사복시(司僕寺)주부(主簿), 병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명재유고』 권38 「사헌부 장령 증 이조 참의 신공 묘갈명」, 『현종개수실록』현종 즉위년 11월 1일, 『동춘당집』 별집 권3]

1664년(현종 5) 강원도 양양(襄陽)상운 찰방(祥雲察訪)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몇 달 만에 풍악산(楓岳山)과 오대산(五臺山)을 두루 유람하고 돌아왔고, 1668년(현종 9) 종부시(宗簿寺) 주부가 되었다.[『명재유고』 권38 「사헌부 장령 증 이조 참의 신공 묘갈명」] 그 해 7월 민정중(閔鼎重)과 조복양(趙復陽) 등이 아뢰기를, “윤증(尹拯) · 박세채(朴世采) · 신석번은 모두 학행이 있어서 곧바로 6품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자급이 아직 임기가 차지 않아서 대간(臺諫)의 관직에 의망(擬望)하지 못하고 있으니, 변통하는 방도를 찾아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현종이 자급(資級)에 구애받지 말고 의망(擬望)하라고 하였다.[『현종개수실록』현종 5년 7월 14일] 1668년(현종 9) 세자시강원 진선(進善)이 되었고 1670년(현종 11) 사헌부 장령(掌令), 성균관 사업(司業)에 임명되었고, 또 다시 진선이 되었다가,[『현종개수실록』현종 9년 7월 15일, 현종 11년 2월 26일 · 3월 21일 · 6월 6일] 호군(護軍)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명재유고』 권38 「사헌부 장령 증 이조 참의 신공 묘갈명」] 1672년(현종 13) 다시 사헌부 장령, 세자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었다.[『명재유고』 권38 「사헌부 장령 증 이조 참의 신공 묘갈명」, 『현종개수실록』현종 13년 7월 26일]

1674년 8월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하자, 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79세였으나, 숙종이 막 즉위하여 내린 명이었으므로 감히 집에 앉아 사양할 수 없어 병을 참고 나가서 문경현(聞慶縣)에 이르러 상소를 올려서, 고향 상주로 돌아가서 뼈를 묻도록 해 줄 것을 요청하고, 아울러 백성들이 겪는 병폐를 개진하고 돌아갔다. 12월 12일은 대행대왕(大行大王)의 널을 왕릉 구덩이에 묻을 때라고 생각하여, 상복(喪服) 차림으로 서울을 바라보고 곡하면서 새벽까지 바깥 추운 데에 꼼짝하지 않고 서서 있었다. 아직 병이 다 낫지 않았는데, 상중이라고 하여 의약(醫藥)마저 쓰지 말라고 명하더니 결국 1675년(숙종 1) 1월 21일 노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2월에 조정에서 그의 나이가 80세라고 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시켰다. 이는 경상도에서 그의 죽음을 미처 조정에 보고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명재유고』 권38 「사헌부 장령 증 이조 참의 신공 묘갈명」, 『숙종실록』숙종 1년 1월 22일 「신석번 졸기」]

문집으로는 『백원집(百源集)』이 남아 있다.

유일 신석번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할 때 나이가 38세였다. 그 뒤에 대과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으므로, 나이 42세 때 1637년(인조 15) 대과에 실패한 이후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한 과거 준비의 공부보다 자기의 덕망(德望)을 쌓기 위하 학문, 즉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과거를 포기하고 ‘위기지학’을 하는 사람을 ‘유일(遺逸)’이라고 불렀는데, 늦은 나이에 주자학에 침잠(沈潛)하여 오로지 학문만을 연구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거나, 벼슬에 나갔다가 사임하고 학문에 돌아오는 사람도 ‘유일’이라고 했다.

신석번이 늦은 나이에 유학의 공부에 전념하여 성리학의 조예가 깊어지자, 사우들 사이에 자못 그 이름이 높아졌다. 과거 시험을 통하여 인재를 뽑는 방법은 학문의 실력만을 보고 사람을 뽑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품과 재능을 알 수가 없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가 과거 시험 제도를 없애고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그 사람의 인품만을 보고 관리에 추천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는데, 이것은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인재를 선발하는 획기적 방식이었다. 유교를 국교로 채택한 나라에서 유교의 경전을 위주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과거 제도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정변에 의하여 조광조의 현량과는 실시되자마자, 폐지되고 말았지만, 유교가 국가의 지배 이념으로 있는 한 유교에 바탕을 둔 과거 제도를 폐지할 수 없었다. 유일은 과거의 폐단을 보완하기 위한 제도의 하나였다. 유일은 조광조의 현량과와 유사하게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숨은 지방의 유학자를 추천하여, 6품의 청요직(淸要職)에 임명하였다. 문과(文科)의 과거에서 갑과의 합격자는 6품에 임명되고, 을과와 병과의 합격자는 9품의 임시직 권지(權知)에 임명하였다.

새로운 임금이 즉위할 때마다 신선한 인재를 발탁하여 새로운 정치를 하는 상징으로서 유일을 뽑아서 청요직에 임명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여 유일 10명을 뽑았을 때 우의정이시백이 신석번을 유일의 첫 번째 인물로 추천하여 곧바로 6품위 관직에 임명되었다.[『명재유고』 권38 「사헌부 장령 증 이조 참의 신공 묘갈명」] 또 현종이 즉위하여, 이조 판서송준길이 일찍이 송시열이 추천하여 6품에 오른 신석번을 다시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고 또 1668년(현종 9) 7월 민정중 등이 윤증 · 박세채와 함께 그를 추천하였다.[『현종개수실록』현종 5년 7월 14일] 윤증 · 박세채는 유일로서 현종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였으며, 정인홍(鄭仁弘)은 유일로서 광해군 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 관료였다. 신석번은 동인의 거두 유성룡(柳成龍)의 수제자 정경세(鄭經世)의 제자인데, 서인의 거두인 송시열 등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유일은 반대파의 추천을 받아야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동인 신석번을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추천한 것을 보면, 그도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학자인 것을 알 수 있다.

신석번의 예론

1641년(인조 19) 8월 대군 사부가 되었을 때 사간원 정언(正言)장응일(張應一)이, 신석번의 문벌이 비천하여 봉림대군의 사부에 합당하지 않다고 논박하였다. 그 때 같은 사간원 동료인 사간윤강(尹絳)과 정언성초객(成楚客) 등은 당시 예론(禮論)의 논쟁(論爭)으로 인하여 서로 불화로 일이 빚어진 것이라고 하여, 장응일의 탄해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실록』]

당초에 경상도 용궁(龍宮)에 살던 전 부사(府使)전이성(全以性)의 계모가 남편과 서로 반목하였는데, 계모가 죽자 전이성은 그의 부명(父命)을 따라 복상(服喪)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그의 친구 정자(正字)이원규(李元圭)가 전이성의 주장을 옹호하였다. 이원규와 전이성은 부자의 정이 중요하므로 예론보다 현실론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세자 사부 신석번이 주장하기를, “모자간의 의리는 그의 부친이 혼인한 날에 이미 정하여진 것인데, 어찌 상기(喪紀)를 스스로 폐지할 수 있겠는가?” 하고, 글을 지어 전이성을 공격하고 배척하였다. 이리하여 사림(士林)들 사이에 전이성을 옳다고 지지하는 자는 신석번을 공박하고, 신석번이 옳다고 여기는 자는 전이성을 공박하였다. 당시 사림의 의논이 나뉘어져 마침내 서로 불화가 생겼다. 신석번의 예론은 ‘주자(朱子)의 5복(五服) 제도’에 의하여 아무리 계모라고 하더라도 아버지와 혼인한 이상 복제(服制)가 성립한다는 서인 김장생(金長生)의 예학파의 이론이다. 신석번이 서인의 예학파의 이론을 수용한 인물이었기에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 송준길 등이 그를 유일로서 여러 번 추천하였다.

성품과 일화

신석번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간이(簡易)하고 담박(淡泊)하였다. 남들과 교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않았다. 사람의 시비(是非)를 보고 판정을 내린 적이 없고, 사람의 비방을 듣고 스스로 변명한 적이 없었으며, 기쁨과 슬픔, 비방과 칭찬을 입 밖에 꺼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선악(善惡)을 밝히는 데에는 적당히 넘어가는 적이 없었고 재리(財利)에 있어서는 더욱 더 소탈하였다. 일찍이 고인(古人)의 말을 일컬으며 말하기를, “재물은 기름과 같아서 가까이하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였다.[『명재유고』 권38 「사헌부 장령 증 이조 참의 신공 묘갈명」]

어렸을 때부터 보통 아이들보다 영특하였다. 15세 때에 양자로 가서, 양부(養父)의 상(喪)을 당하여 변통하기 어려운 일을 만났으나, 상황에 따라 순응하여 화평을 잃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누구나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서울에 있을 적에 일찍이 같은 마을 또래들과 같이 어느 문관(文官)에게 글을 배웠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의 언동(言動)이 이상한데다가 잡인(雜人)들이 줄줄이 찾아오는 것을 보고, 그 집에 발을 끊고 다시금 왕래하지 않았다. 몇 년 있다가 그 사람은 과연 재상의 지위에 이르러, 은밀히 반역을 꾀하다가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사형을 당하였다.[『명재유고』 권38 「사헌부 장령 증 이조 참의 신공 묘갈명」]

집안이 가난하여 조석의 끼니를 잇대지 못하였으나, 쓸쓸한 기색을 드러낸 적이 없었고, 좌우에 경전(經典)을 놔두고 탐구하면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찍이 보지 못한 서적(書籍)을 볼 경우에는 서둘러 구입하였고, 특히 『격양집(擊壤集)』을 좋아하여 언제나 읽을 때마다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글은 성품을 함양하기에 가장 좋다. 한 마디 말과 하나의 글자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평소에 어눌하여 입 밖에 말을 꺼내지 못할 것 같았으나, 글 뜻을 변론하거나 고금(古今)을 비유할 때에는 종횡으로 말을 쏟아내어 마치 물병을 거꾸로 들고 물을 쏟아내는 것과 같았다. 특히 기억력이 강하여 지역의 면적이나 산천의 도로를 꿰뚫지 않은 것이 없어서, 직접 체험해 본 것과 같았다. 특히 국조(國朝)의 역사적 사적에 대해서 가장 자세히 알았다.[『명재유고』 권38 「사헌부 장령 증 이조 참의 신공 묘갈명」]

경상도 상주 지방에 살면서 영남학파의 의논에 얽매이지 않고 송시열 · 송준길 등 서인의 이론도 수용하였는데, 효종 · 숙종 때 정치 판도가 크게 변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탄식하기를, ‘위학(僞學)의 화(禍)가 일어나겠구먼.’ 하였다. 『숙종실록』숙종 1년 1월 22일 「신석번 졸기」]

전후 벼슬에 임명되었을 때 세 번만 부임하였다. 경기전(慶基殿)에 나갔던 것은 처음으로 받은 은명(恩命)을 감히 오만하게 사양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 형조 좌랑에 취임하였던 것은 특별한 은명으로 승진되어 주상의 뜻에 감격하였기 때문이고, 만년에 상운 찰방(祥雲察訪)으로 부임한 것은 그때 그에게 사헌부의 길을 열어주자는 의논이 있었기 때문에 한가하게 노닐며 명예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오천(烏川)정양(鄭瀁)과 산해(山海)를 한번 유람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1669년(현종 10) 세자시강원과 성균관의 관직을 임명할 때에는 송곡(松谷)조복양(趙復陽)이 이조 판서로서 사류(士流)들의 종주(宗主)가 되어서, “신석번은 노성(老成)한 선비로서 학문이 깊다.”고 하여 적극적으로 추천하였으므로 부임하였는데, 그때마다 그가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감히 스스로 나의 마음을 속일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뒤 병중에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12월 보름 중의 저보(邸報)를 가지고 오자, 그가 보고 난 뒤에 좌석의 옆에 놔두고 천천히 말하기를, “과연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고, 사람을 불러서 입으로 불러주어 몇 장의 편지를 받아쓰게 한 다음에, 평소 마음을 쏟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였다. 그 뒤에 죽을 때에는 다른 일에 대해 한 마디 유언(遺言)도 남기지 않았다.[『명재유고』 권38 「사헌부 장령 증 이조 참의 신공 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상주 장천(長川) 백원산(白原山)에 있고, 명재(明齋)윤증(尹拯)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38 「사헌부 장령 증 이조 참의 신공 묘갈명(司憲府掌令贈吏曹參議申公墓碣銘)」] 경상도 상주 운계서원(雲溪書院)에 제향되었다.[『연려실기술』 별집 권4] 1682년(숙종 8) 김석주(金錫胄)가 계청(啓請)하여 이조 참의를 증직하여 포상하였다. 2월 김석주가 말하기를, “상주의 고(故) 진선 신석번 형제는 모두 행의(行誼)로 칭찬을 받았는데, 을묘년 봄에 신석번이 나이 여든이기 때문에 당상관(堂上官)으로 올려주었으나, 교지(敎旨)가 도착하기 전에 갑자기 먼저 죽었으니, 이제 본품(本品)에 상당한 실직(實職)으로 특별히 증직(贈職)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숙종이 그대로 따라서 이조 참의를 제수하였던 것이다.[『명재유고』 권38 「사헌부 장령 증 이조 참의 신공 묘갈명」, 『숙종실록』숙종 8년 2월 29일]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현감(縣監)정숭연(鄭崇衍)의 딸로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신행(申烆) · 신관(申爟) · 신난(申爛)이고 딸은 박상일(朴商逸)에게 시집갔다.[『명재유고』 권38 「사헌부 장령 증 이조 참의 신공 묘갈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백원집(百源集)』
  • 『동사록(東槎錄)』
  • 『동춘당집(同春堂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송자대전(宋子大全)』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수재집(寒水齋集)』
  • 『낙애유고(洛涯遺稿)』
  • 『남포집(南圃集)』
  • 『노서유고(魯西遺稿)』
  • 『모하당집(慕夏堂集)』
  • 『손암집(損庵集)』
  • 『송곡집(松谷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일봉집(一峯集)』
  • 『지호집(芝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