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삼익(裵三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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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4년(중종29)~1588년(선조21) = 55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여우(汝友), 호는 임연재(臨淵齋)이다. 본관은 흥해(興海)이고, 세거지는 경상도 안동부(安東府) 금계촌(金鷄村)이다. 아버지는 충좌위(忠佐衛)부사과(副司果)배천석(裵天錫)이고, 어머니 연일정씨(延日鄭氏)는 정세호(鄭世豪)의 딸이다.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58년(명종13) 생원이 되고, 1564년(명종19) 식년(式年) 문관(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1세였다.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학유(學諭) · 학록(學錄) · 학정(學正) · 박사(博士)로 차례로 승진하였고, 1573년(선조6)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좌랑으로 옮겼다. 1575년(선조8) 부친상을 당하였고, 3년 상기를 끝마치고는 형조 · 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는데,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형조 정랑으로 승진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선조가 특별히 교지(敎旨)를 내려서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하고 불렀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1581년(선조14) 외직으로 풍기군수(豊基郡守)와 양양부사(襄陽府使)를 역임하였고, 1583년(선조16) 내직으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성균관 직강(直講) · 사예(司藝)를 거쳐, 1584년(선조17) 성균관 사성(司成) ·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 이어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옮겼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으며, 다시 홍문관으로 들어가서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다. 1585년(선조18)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품(陞品)되고,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 ·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가, 장례원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1586년(선조19) 성절사(聖節使)동지사(冬至使) 일행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회동관(會同館)의 옥하관(玉河館)에 머물렀는데, 사신 일행이 실화(失火)하여 옥하관이 불에 타 버렸다. 명나라에서 조선 사신 이하 관원을 모두 체포하여 심문을 하고 죄를 주려 하자 조선 조정에서 그를 진사사(陳謝使)로 삼아서 급히 북경에 보냈다. 그는 명나라 예부(禮部)와 신종(神宗)만력제(萬曆帝)를 만나서 사건을 원만히 수습하였다. 그리고 돌아올 때, 새로 간행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얻어 가지고 왔는데, 이 책에는 그동안 조명 관계에서 문제가 되었던 태조이성계(李成桂)의 종계(宗系)가 정정되어 있었다. 사행의 공으로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1588년(선조21)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는데, 당시 황해도는 해마다 흉년이 들었으므로,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여러 고을을 순행하면서 기민(饑民)들을 구휼하다가, 고질병이 심해져서 벼슬을 사임하였다. 고향 안동으로 돌아가던 중에 해주(海州)의 청단역(靑丹驛)에서 객사(客死)하니, 향년이 55세였다. 그는 책을 많이 가진 장서가로 유명하고, 글씨도 잘 썼는데, 친필시와 제병(祭屛)이 남아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임연재집(臨淵齋集)』 6권이 남아 있다.

북경 옥하관 화재사건

1586년(선조19) 3월 성절사윤자신(尹自新)과 동지사성수익(成壽益)이 중국 명나라 회동관의 옥하관에 머물렀는데, 사신 일행이 실화(失火)하여 옥하관이 불탔기 때문에 조선 사신과 종사관들이 모두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명나라에서는 외국사신이 머물도록 사신관을 지었는데, 이것이 북경에 있는 회동관이다. 명나라는 태조주원장(朱元璋)의 ‘해방(海防)’ 정책에 따라 중국 민간 상인과 해외 상인과의 사무역을 일절 금지하고, 나라끼리 부족한 물자를 교류하는 조공(朝貢) 무역만을 인정하였다.『대명회전(大明會典)』을 보면, 명나라와 조공(朝貢) 관계를 가졌던 나라들의 조공 물품과 조공 회수를 규정하고 있는데, 조선의 조공품은 인삼 · 모시 · 나전 · 조선종이 · 화문석 등 10여 종이고, 조선은 1년에 3회 정기 사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정조사(正朝使) · 동지사 · 성절사 · 천추사(千秋使)를 정기 사신으로 파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정기 사신을 수시로 파견하였다. 조선이 자발적으로 조공 사신을 빈번하게 파견한 까닭은 조공(朝貢)이라는 공무역을 통하여 역관과 상인들이 사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명나라와 조공 관계를 가졌던 80여 개국 중에서 조선 사신이 가장 빈번하게 중국 명나라에 왕래하였으므로, 명나라 태종영락제(永樂帝)는 처음에 조선 사신 일행을 일본 · 안남(安南) · 몽고 사신과 함께 회동관의 남관(南館)에 유숙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1441년(세종23) 조선 사신을 위하여 특별히 옥하관을 따로 지었는데, 지금 북경 자금성(紫禁城)의 옥하(玉河)가 흐르는 숭문문(崇文門) 북쪽 부근에 있었다. 옥하관은 동관(東館) · 서관(西館)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긴 회랑(回廊)으로 연결된 대청(大廳)과 중청(中廳)에 동방(東房) · 서방(西房)이 있어서 조선 사신 일행이 편리한 대로 방을 쓰면서 40여 일 동안 머물 수 있었다. 조선식으로 온돌방을 갖추었고, 조선식 요리사와 조선어 역관이 5명씩 항상 배치되어 있었다.

옥하관이 건립된 지 145년 만에 불타버렸으므로, 명나라에서는 조선 사신 이하 모든 관원을 체포하여 심문을 하고 죄를 주려고 하였다. 당시 조선 사신 일행은 35명 안팎으로, 정사 · 부사 · 서장관인 6품의 문관과 통사(通事: 역관) · 압물(押物) · 압마(押馬) · 의원 · 군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조선 사신 일행은 북경의 회동관 무역을 비롯하여 이르는 곳마다 중국 상인들과 사무역을 행하여 조선 사신의 일행의 짐을 싣는 마필이 적으면 3백 필, 많으면 5백 필에 이르렀다. 사무역을 통하여 막대한 이익을 보았기 때문에 서울육의전(六矣廛)경상(京商)과 개성의 송상(松商)이 경쟁적으로 권문세가와 결탁하여 사신 일행의 종사관을 자기들 장사군들로 채워 넣었다. 조선 시대 최고의 갑부가 대체로 역관(譯官)들이었던 것도 바로 그들만이 사무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중기에 이르러, 사신 일행의 질서가 더욱 문란해졌는데, 이때 옥하관에 불을 내었을 뿐만 아니라, 압물이 물건을 허술하게 관리하다가, 조공할 방물(方物)마저 모두 도둑을 맞아 예부의 이번원(理藩院)에 조공품을 제출하지도 못하였다. 이번원 담당 관원이 격분하여 황제에게 보고하여, 조선 사신들의 처지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조선 조정에서 배삼익과 원사안(元士安)을 진사사의 정사와 부사로 임명하여 급히 명나라에 보내어 진사(陳謝)하게 하였다. 배삼익은 북경에 가서 명나라 예부와 이번원을 설득하고 신종만력제를 만나서 독단으로 잘 응대(應對)하여 황제의 오해를 풀었다. 만력제가 칙서를 내려서 칭찬하고 포상으로 망의(蟒衣)와 채단(綵段)을 내려주었다. 그때 그가 만력제에게 사적으로 하사 받은 옥피리와 상아홀(笏)은 지금 그 종가에서 보관하고 있다. 귀국하자 선조는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내구마(內廐馬)를 한 필을 하사하였다. 그 뒤에 옥하관은 다시 중건되어, 청대 조선 사신 일행도 연경(燕京: 북경)의 옥하관에서 유숙하였다.

성품과 일화

배삼익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집이 몹시 가난했으나, 스스로 분발하여 도산서원(陶山書院)에 가서 글을 배우고,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서 직무(職務)를 수행할 적에는 신중하고 부지런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사를 모두 분명하게 처리하였고, 외직에 나가서는 풍속에 따라 다스리면서 관대하고 대범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풍기군수가 되었을 때 아전들을 엄하게 다스리고 백성들을 어질게 어루만지니, 처음에는 강경한 토호들이 상당히 그를 싫어하였으나, 몇 년 만에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치적을 칭송하였다.

배삼익이 대성(臺省)에 있을 때 송익필(宋翼弼)이 예전에 그의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이 정승안당(安塘)의 집에 노비였다고 무고를 당한 것을 분풀이하려고 법정에 송사하였다. 송익필은 서인(西人) 이이(李珥) · 성혼(成渾)과 친하였으므로, 법관들이 모두 서인을 무서워하여 회피하고 판결하지 못하였다. 이때 동인(東人) 배삼익이 즉시 이를 판결하여 송익필을 노비로 만들었기 때문에 송익필은 도망하여 서인 정철(鄭澈) 등의 보호를 받았다. 송익필은 서인의 영수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에게 예학(禮學)을 가르친 사람인데, 당시 송익필의 재판은 동인과 서인의 당쟁에서 핵심 문제였다. 그가 이 사건을 맡아서 재판하여 서인에게 결정적 패배를 안겼는데, 이를 통해 그가 동인의 중심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송사에 패배한 송익필은 절치부심하다가, 서인 정철을 움직여 <정여립(鄭汝立) 의 옥사>를 확대시켰다. 그리하여 전라도는 반역향(反逆鄕)이 되고, 이발(李潑) 등 동인 인사 1천여 명이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이때 남명(南冥)조식(曺植)의 제자 최영경(崔永慶)도 옥사에 연루시켜 처형하였는데, 이 사건은 북인 정인홍(鄭仁弘)의 공격을 받아 서인이 실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안동 북쪽 내성(奈城) 호애산(虎崖山)의 언덕에 있고, 후배 서애(西厓)유성룡(柳成龍)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영양남씨(英陽南氏)는 처사(處士)남신신(南藎臣)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금역당(琴易堂)배용길(裵龍吉)은 유성룡의 제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서애집(西厓集)』
  • 『임연재집(臨淵齋集)』
  • 『계갑일록(癸甲日錄)』
  • 『문소만록(聞韶漫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학봉전집(鶴峯全集)』
  • 『고산집(孤山集)』
  • 『백담집(栢潭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송강집(松江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중봉집(重峰集)』
  • 『퇴계집(退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