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남(安南)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안남 |
한글표제 | 안남 |
한자표제 | 安南 |
상위어 | 남만(南蠻), 남번(南藩) |
동의어 | 베트남, 교지(交趾), 대구월(大瞿越), 대월(大越), 대남(大南) |
관련어 | 조왜국(爪哇國), 섬라곡국(暹羅斛國), 한무제(漢武帝), 영락제(永樂帝), 조공(朝貢) |
분야 | 정치/외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동남아시아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신명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안남(安南)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7년 5월 1일, 『정조실록』 14년 3월 27일 |
조선시대 베트남을 지칭하던 용어.
개설
전통시대 한국과 안남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이미 9세기 무렵부터 한반도의 지식인들은 안남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남베트남의 역사와 풍물 등이 차츰 알려지게 되었는데, 특히 중국과 안남 사이에 전쟁이 빈발하였던 원나라와 명나라 초기에 안남에 관련된 정보가 크게 증가하였다. 중국대륙에서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안남은 6년에 한 번 조공 사신을 보내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 사신들은 중국에서 안남 사신들을 접촉하게 되었고, 그 결과 안남의 역사·풍습·문화에 관한 지식이 한층 풍부해졌을 뿐만 아니라 객관화되었다.
내용 및 특징
한나라 무제(武帝) 때 중국이 베트남 북부 지역에 교지군(交趾郡)을 설치한 후 베트남은 교지로 불리었으나, 당나라 때 하노이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둔 이후에는 안남이라고도 불리었다. 베트남은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대구월(大瞿越)·대월(大越)·대남(大南) 등으로 자칭했지만 중국인들은 여전히 교지 또는 안남이라고 불렀다. 이 같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 이래 한국에서도 베트남을 교지 또는 안남이라고 불렀는데 특히 안남이라는 명칭이 보편적이었다.
전통시대 한국과 안남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이미 9세기 무렵부터 한반도의 지식인들은 안남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최치원은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에서 교지의 사방 경계와 안남의 연혁을 기술하였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남베트남의 역사와 풍물 등이 차츰 알려지게 되었는데, 특히 중국과 안남 사이에 전쟁이 빈발하였던 원나라와 명나라 초기에 안남에 관련된 정보가 크게 증가하였다. 원나라는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세 차례에 걸쳐 안남을 침략하였으나 결국에는 실패하였다. 원나라를 계승한 명나라도 초기에 안남을 침략하였다. 즉, 명나라 영락제는 북방에 친정하기 4년 전인 1406년에 현재의 베트남인 안남에 출병하여 안남을 병합하였다. 당시 안남에서는 진씨 왕조가 호씨의 세력에게 밀려나 진씨 대신 호씨가 정권을 세우고 있었고, 호씨에게 밀려난 진씨 왕조의 진천평(陳天平)은 명나라에 망명해 있었다. 영락제는 진천평을 안남왕으로 세우기 위하여 그를 안남으로 보냈으나 호씨가 진천평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핑계로 주능(朱能)을 대장군으로 삼아 안남 원정을 명하였다. 7월에 출진한 주능이 10월에 이르러 진중에서 병사하자 장보가 대신 지휘관이 되어 가림강에서 안남군을 대파하고 호씨 왕을 포로로 하고 돌아왔다. 영락제는 포정사를 파견하여 안남을 다스리게 하고 진씨의 후손을 찾아 안남왕에 세우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안남을 명나라에 복속시켰다. 이에 대하여 안남 사람들은 크게 반발하여 여리를 중심으로 반항 운동을 일으켰고, 명나라에서는 마침내 영락제가 죽은 후 안남왕 여씨의 독립을 인정하고 조공책봉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태종실록』에는 영락제의 안남 정벌에 관련된 기록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태종실록』 7년 5월 1일). 반면 조공책봉 관계가 형성된 이후에는 중국에 파견된 조선 사신과 안남 사신 간의 간접적인 교류에 관련된 기록이 많이 나타났다.
변천
중국대륙에서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안남은 6년에 한 번 조공 사신을 보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사신들은 중국에서 안남 사신들을 접촉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보다 적극적으로 안남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이수광과 안남 사신의 접촉은 두 나라간 교류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되어 왔다. 진위사(陳慰使)로 연경에 파견된 이수광은 당시 안남의 사신 풍 칵 코안을 만나 필담을 통하여 알게 된 안남의 풍속과 제도 등을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상세히 소개하였다. 이런 추세에서 정조대 연경에 파견되었던 서장관성종인은 안남에 관련된 정보를 수합하여 문견별단(聞見別單)으로 보고하였다(『정조실록』 14년 3월 27일). 이 같은 간접교류를 통하여 조선후기에는 안남의 역사·풍습·문화에 관한 지식이 한층 풍부해졌을 뿐만 아니라 객관화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7, 탐구당, 2000.
- 노계현, 「安南의 對元戰爭과 외교정책」, 『국제법학회논총』 12권 1호, 대한국제법학회, 1967.
- 윤대영, 「19세기 후반~20세기 초, 한국의 베트남 재인식 과정과 그 성격」, 『동양사학연구』 112, 동양사학회, 2010.
- 정면, 「‘南蠻’ 및 ‘海南’ 諸國과 隋唐代 중국의 국제관계」, 『동북아역사논총』 35, 동북아역사재단, 2012.
- 하우봉,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한국사』 22, 국사편찬위원회, 199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