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팽년(朴彭年)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박팽년 |
한글표제 | 박팽년 |
한자표제 | 朴彭年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학자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세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인수(仁叟) |
호 | 취금헌(醉琴軒) |
시호 | 충정(忠正) |
출생 | 1417년(태종17) |
사망 | 1456년(세조2) 6월 7일 |
본관 | 순천(順川) |
주거지 | 충청도 회덕(懷德) |
묘소소재지 | (현)서울시 노량진(露梁津) 사육신(死六臣) 공원 |
증조부 | 박원상(朴元象) |
조부 | 박안생(朴安生) |
부 | 박중림(朴仲林) |
모_외조 |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익생(金益生)의 딸 |
형제 | (형)박대년(朴大年) (동생)박인년(朴引年), 박기년(朴耆年) |
처_장인 | 천안전씨(天安全氏): 전옥금(全玉今), 전미(全彌)의 딸 |
자녀 | (1자)박헌(朴憲) (2자)박순(朴珣) (3자)박분(朴奮) |
저술문집 | 『취금헌천자문(醉琴軒千字文)』, 『박선생유고(朴先生遺稿)』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팽년(朴彭年) |
목차
총론
[1417년(태종17)~1456년(세조2) = 40세]. 조선 전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 활동한 문신, 학자. 단종(端宗)을 복위하려다가 죽음을 당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다. 본관은 순천(順川)인데, 충청도 회덕(懷德) 출신이다. 이조 판서박중림(朴仲林)의 아들이고, 박대년(朴大年)의 동생이며, 박인년(朴引年)· 박기년(朴耆年)의 형이다.
세종~문종 때 집현전 학사로서 활동
1432년(세종14)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1434년(세종16)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급제하였는데, 그때 박팽년(朴彭年)은 18세였고, 성삼문은 17세였다. 1435년(세종17) 나이 겨우 19세 때 집현전 정자(正字)로서 『통감훈의(通鑑訓義)』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고 젊은 인재를 양성할 때 그는 성삼문· 신숙주(申叔舟)· 이개(李塏) 등과 함께 뽑혀서 집현전에 들어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고 여러 가지 서적을 편찬하였다. 1438년(세종20) 세종은 그들에게 조용히 학문을 연구할 수 있도록 삼각산(三角山) 아래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였다. 1439년(세종21)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고, 1444년(세종26)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1446년(세종28) 집현전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 1446년 9월 훈민정음이 완성되었을 때 당시 부교리였던 박팽년의 이름이 성삼문· 신숙주와 함께 나란히 기록된 것을 보면, 그도 훈민정음 창제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447년(세종29) 집현전 교리로 있을 때 문과(文科)중시(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세종의 사랑을 받아 수(守)집현전(集賢殿) 직관(直館)에 임명되었다가, 1448년(세종30) 집현전 직관으로 승진하였다.
박팽년은 세종 말년에 강서원(講書院) 좌익선(左翊善)이 되어, 당시 세자이던 문종(文宗)을 가르쳤다. 문종이 즉위하자, 1450년(문종즉위) 박팽년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보덕(輔德)으로 삼아서, 왕세자 단종을 가르치게 하였다. 어느 날 병중에 있던 문종은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을 불렀다. 왕과 학자들이 정사를 토론하다가 밤중이 되자 문종이 무릎에 어린 단종을 앉히고 손으로 그 등을 어루만지면서 “내가 이 아이를 경들에게 부탁한다.” 하고, 술을 내려주었다. 문종이 어탑(御榻)에서 내려와서 편안히 앉아서 먼저 술잔을 들어 권하니,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이 모두 술에 취하여 임금 앞에서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문종이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차례로 업고 나가 입직청(入直廳)에 나란히 눕히도록 하였다. 그날 밤에 많은 눈이 내렸는데, 이튿날 아침에 신하들이 술에서 깨어나니, 그들 몸에 각각 담비털 갖옷이 덮혀 있었다. 밤중에 문종이 손수 덮어준 것이었으므로, 젊은 신하들은 서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문종의 은혜에 보답하기로 맹세하였다. 1451년(문종1) 박팽년은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가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집현전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단종~세조 시대 저항과 좌절
1452년(단종즉위) 문종이 갑자기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할 때 집현전 부제학으로 있었다. 1453년(단종1) 승정원(承政院) 좌부승지(左副承旨)에 발탁되고,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였으며, 1454년(단종2) 승정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승지(承旨) 시절에 경연(經筵)의 참찬관(參贊官)을 겸임하면서, 나이 어린 단종을 보필하여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의 전횡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1454년 춘추관(春秋館)에서 『세종대왕실록(世宗大王實錄)』 1백 63질(帙)을 편찬하여 올리자, 영의정(領議政)수양대군이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박팽년이 시를 지었다. 그 시에서 “묘당 깊은 곳에서 슬픈 거문고 소리 울리지만,[廟堂深處動哀絲] 지나간 만사(萬事)를 지금에 와서 모두 잊어버리리라.[萬事如今摠不知]”라는 첫 구절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슬픔을 이기고 수양대군에게 화해하려는 뜻을 보인 것이고, 또 “즐겁지 않은 감정이야 어찌 오래 간직하랴.[不樂何爲長不樂] 서로 노래하고 취해서 태평성대를 읊으리라.[賡歌醉賦太平時]”라는 끝 구절은 서로 좋지 않는 감정을 떨쳐버리고 단종을 모시고 태평성대를 이룩해 보자는 뜻을 담은 것이다. 이때 좌승지박팽년은 도승지(都承旨)강맹경(姜孟卿)과 서로 충돌이 잦았는데, 강맹경은 수양대군파의 중심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형조 참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455년(단종3)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좌천되었다.
1455년 윤6월 수양대군 일파의 압력에 굴복하여 단종이 경회루 아래로 나아가서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대보(大寶: 옥새)를 내어주었다. 이날 박팽년이 경회루 아래 연못으로 뛰어들어 죽으려고 하자, 성삼문이 말리기를, “주상이 상왕(上王: 단종)으로 계시고 우리들도 죽지 않았으니, 아직도 무엇인가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겉으로 참고 세조에게 복종하는 체하고, 속으로 반정(反正)의 동지를 규합하고 모의하여 노산군(魯山君: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계획하였다. 1455년(세조1) 형조 참판이 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이 되고, 1456년(세조2)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가 되었다. 세조 때 받은 녹봉(祿俸)을 먹지 않고 고스란히 1년 치를 봉하여 창고 안에 따로 쌓아 두었다가 뒤에 돌려주었다고 한다. 그는 성삼문과 함께 유응부(兪應孚)· 하위지(河緯地)· 이개· 유성원(柳誠源)· 김질(金礩)· 권자신(權自愼) 등과 은밀히 내통하면서 상왕을 복위시킬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때 명(明)나라 사신 윤봉(尹鳳)이 오게 되었는데, 윤봉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세종 때 명나라에서 금은(金銀)의 세공(歲貢)을 면제하는 데에 힘을 기울여 세종· 문종과 가까왔다. 그해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윤봉을 청하여 창덕궁(昌德宮)에서 잔치를 베풀고자 하였는데, 이날 임금의 경호를 맡은 별운검(別雲劒) 성승(成勝: 성삼문의 아버지)과 유응부가 세조를 단칼에 죽이고 다시 상왕을 옹립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마침 연회 장소가 좁아 세조는 별운검을 세우지 말라고 명하여 운검(雲劒)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날 유응부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려고 하였으나, 박팽년과 성삼문은 훗날을 기약하고 거사일을 미루었으며, 후일 세조가 관가(觀稼: 곡식 작황을 돌아봄)할 때 노상(路上)에서 암살하자고 제의하였다. 이때 함께 모의하였던 김질은 거사가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찾아가서 거사에 관하여 상의를 하였는데, 정창손은 곧바로 대궐로 들어가서 세조에게 고변(告變)하였다. 세조는 급히 군사를 보내어 성삼문과 박팽년 등 모의에 참여한 자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혹독하게 국문(鞫問)하였다. 성삼문은 잡혀 와서 모의 사실을 모두 선선히 시인하였다. 박팽년을 심문할 때 세조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은밀히 타이르기를, “그대가 나에게 귀순하여 처음의 모의를 모른다고 말하면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였으나,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미소만 지었을 뿐이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임금이라고 부르지 않고 ‘나으리[進賜]’라고 일컬었고, 자기를 ‘신(臣)’이라고 칭하지도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하’라고 일컬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닙니다. 1년 동안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모든 장계(狀啓)에 한 번도 ‘신하 신(臣)’자를 쓴 일이 없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세조가 사람을 시켜서 장계를 조사하게 하였더니, 과연 ‘신하 신’자가 하나도 없었다. 세조가 더욱 노하여 심한 고문을 더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실토하라고 다그쳤다. 그는 서슴없이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이개· 김문기(金文起)· 성승· 박쟁(朴崝)· 유응부· 권자신· 송석동(宋石同)· 윤영손(尹令孫)· 이휘(李徽)와 그의 아버지 박중림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1456년 6월 7일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40세였다.
그 다음날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그의 아버지 박중림도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고, 형 박대년과 동생 박인년· 박기년과 그의 아들 박헌(朴憲)· 박순(朴珣)· 박분(朴奮) 3형제도 모두 처형되어 3대에 걸쳐 참화를 입었다. 이와 함께 그의 모친· 아내· 형수· 제수· 며느리 등도 대역 죄인의 가족이라고 하여, 공신 정인지(鄭麟趾) 등의 집안에 노비로 하사되었다.
집현전의 훈민정음 창제와 서적 편찬
1434년(세종16) 문과에 급제한 박팽년은 1435년(세종17) 집현전의 말단 9품 정자로 선임되어, 처음에 『통감훈의(通鑑訓義)』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경연(經筵)에서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많이 강론하였는데, 세종이 대제학윤회(尹淮)에게 말하기를, “요즘 이 책을 읽으니, 글 읽는 것이 유익함을 깨달았다. 총명이 날마다 더해지고 졸음은 훨씬 줄어들었다.” 하고, 이 책을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이 책을 편찬하기 위하여 집현전의 신참 학사를 6명이나 증원하였는데, 이때 박팽년이 선발되어 집현전에 들어갔던 것이다. 『통감훈의(通鑑訓義)』가 완성되자, 세종의 명으로 책의 제목을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이 썼는데, 동갑나기였던 박팽년과 세조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때 집현전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1420년(세종2) 세종이 젊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집현전을 설치하였으나, 1456년(세조2) 세조가 집현전을 폐지하여 버렸다. 이는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하려던 사건이 박팽년과 성삼문 등의 집현전 소장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집현전이 1420년부터 1456년까지 존속한 36년 동안 집현전 학사로 활동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90여 명이었고, 집현전에서 편찬한 책은 무려 35종이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모두 전문 분야를 나누어 연구하였는데, 박팽년은 동년배의 성삼문· 신숙주· 이개 등과 함께 언어학 분야를 주로 연구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이에 따른 여러 서적을 편찬하였다. 박팽년은 19년 동안 집현전에 근무하면서 정인지· 최항(崔恒)· 성삼문· 신숙주· 강희안(姜希顔)· 이개· 이선로(李善老: 이현로李賢老) 등과 함께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를 저술하였고, 언어학 분야에서는 『운회언역(韻會諺譯)』, 『용비어천가주해(龍飛御天歌註解)』,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였으며, 역사학 분야에서는 중국사의 『통감훈의(通鑑訓義)』, 『명황계감(明皇誡鑑)』을 찬술하고, 한국사의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세종실록(世宗實錄)』 등을 편찬하였다.
1446년(세종28) 9월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이루어졌는데, 예조 판서정인지의 서문에, “집현전 부교리박팽년 등과 더불어 삼가 모든 해석과 범례(凡例)를 지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하여, 이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역사상 집현전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훈민정음의 창제인데, 이것은 세종을 중심으로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의 소장학자들이 만든 작품이다. 훈민정음을 집요하게 반대한 최만리(崔萬理)도 실은 집현전 학사 출신의 노장학자였다. 또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과 막내 동생 박기년도 집현전 학사를 지냈다.
집현전 출신 학사와 인재 양성
세종은 집현전의 신참 학사를 선발할 때 반드시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20대의 재능 있는 엘리트를 뽑아서 각자 자기 소양에 맞는 분야를 연구하게 하였다. 집현전 학사는 원칙적으로 집현전 안에서 승진시키고, 번잡한 청요직(淸要職)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막았다.
세종 때 집현전에서 양성한 소장 인재는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등인데, 세종 시대에는 이들이 집현전 안에서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나 문종, 단종 시대 인재가 부족하여 집현전 학사들을 집현전 이외의 정부 요직에 발탁하였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절간에서 한가하게 책을 읽도록 장기 휴가를 주는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를 만들어, 각자 전문적으로 자기 분야를 깊이 연구하여 정통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젊은 학사들이 자기 개발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는 후일 집현전이 폐지된 다음에도 홍문관(弘文館)에서 그대로 시행하였다. 이때에 같이 글을 읽으면서 젊은 학사들의 결속이 굳게 다져지는데, 박팽년, 성삼문 등 사육신도 같이 독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융숭하게 대우하였기 때문에 집현전은 모든 관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집현전 학사 중에서 박팽년은 경학(經學)· 문장(文章)· 필법(筆法)에 모두 뛰어나서 동료들이 그를 “집대성(集大成)”이라고 불렀다. 특히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따랐는데, 1452년(단종즉위) 명나라 사신 진둔(陳鈍)이 와서 우리나라에서 진서(眞書: 해서楷書)· 초서(草書)에 능한 사람을 만나보고자 하니, 조정에서 박팽년과 강희안을 추천하여 그들이 가서 사신을 만났다. 여기서 박팽년의 글씨가 강희안과 함께 거론될 정도로 유명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삼대가 멸문(滅門)당하였으므로 작품과 저술이 세상에 전해지지 못하였다. 다만 글씨로는 『취금헌천자문(醉琴軒千字文)』이 남아있고, 후대에 몇 편의 시(詩)와 문장을 모아서 『박선생유고(朴先生遺稿)』가 편찬되었을 뿐이다.
묘소와 추모 사업
묘소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 사육신(死六臣) 묘역에 있다. 숙종(肅宗) 때 노론(老論)이 역사상 절의(節義)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들을 재평가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그를 제일 먼저 신원(伸寃)하고 그의 관작(官爵)을 복구하였다. 이때가 1691년(숙종17)인데, 그가 죽은 지 235년만이었다. 1758년(영조34) 영조(英祖) 때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에 추증하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791년(정조15) 정조(正祖) 때 단종의 충신들을 뽑아서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렸으며, 영월의 장릉(莊陵: 단종 왕릉)을 수축하고 충신단(忠臣壇)의 정단(正壇)에 배향하였다. 조선 후기에 전국의 유생(儒生)들이 잇달아 방방곡곡에서 그 충절을 기리는 운동을 일으켜서, 경기도 과천(果川) 민절서원(愍節書院), 충남 홍성(洪城) 노운서원(魯雲書院), 충남 회덕(懷德) 정절서원(靖節書院), 충남 연산(連山) 충곡서원(忠谷書院), 전남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경북 대구(大邱) 낙빈서원(洛濱書院), 경북 의성(義城) 충렬사(忠烈祠), 강원도 영월(寧越) 창절사(彰節祠) 등에 제향되었다.
지금도 박팽년은 성삼문과 함께 어린 임금을 위하여 순절한 “만고의 충신”으로 가장 널리 추앙받는다.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추강집(秋江集)』에 「육신전(六臣傳)」이 남아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장릉지(莊陵志)』
- 『박선생유고(朴先生遺稿)』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보한재집(保閑齋集)』
- 『동문선(東文選)』
- 『성근보집(成謹甫集)』
- 『추강집(秋江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 『경재집(敬齋集)』
- 『눌재집(訥齋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미수기언(眉叟記言)』
- 『임하필기(林下筆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