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형남(閔馨男)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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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민형남 |
한글표제 | 민형남 |
한자표제 | 閔馨男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효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윤부(潤夫) |
호 | 지애(芝崖) |
봉작 | 여천군(驪川君), 여천부원군(驪川府院君) |
시호 | 장정(壯貞)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4년(명종19) |
사망 | 1659년(현종즉위) 7월 8일 |
본관 | 여흥(驪興)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금천(衿川) 번대방(番大坊)의 선영 |
증조부 | 민효증(閔孝曾) |
조부 | (양조)민례(閔禮) (생조)민의(閔義) |
부 | 민복(閔福) |
모_외조 | 능성구씨(綾城具氏): 구징(具徵)의 딸 |
처_장인 | (첫째부인)전주이씨(全州李氏): 이경욱(李慶郁)의 딸 (둘째부인)전의이씨(全義李氏): 이보명(李寶命)의 딸 →(자녀)2남 2녀 |
자녀 | (1자)민여흠(閔汝欽) (2자)민여진(閔汝鎭) (1녀)유정립(柳正立)의 처 (2녀)목겸선(睦兼善)의 처 (서1자)민여련(閔汝鍊)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민형남(閔馨男) |
총론
[1564년(명종19)∼1659년(현종즉위) = 96세]. 조선 중기 선조∼효종 때의 문신. 초명(初名)은 민덕남(閔德男)이고, 자는 윤부(潤夫), 호는 지애(芝崖)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풍저창(豊儲倉) 수(守)민복(閔福)이고, 어머니 능성구씨(綾城具氏)는 증 좌승지(左承旨)구징(具徵)의 딸이다. 사헌부 감찰(監察)민예(閔禮)의 손자이고, 습정재(習靜齋)민순(閔純)의 문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600년(선조3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37세였다.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승정원 주서(注書)로 옮겼고, 이듬해 예문관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가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로 옮겼다. 1602년(선조35) 예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좌랑으로 옮겼고,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가 시강원 사서(司書)로 옮겼으며,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로 나갔다가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1604년(선조37)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이어 홍문관에 선발되어 수찬(修撰)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좌랑으로 옮겼고, 사간원 헌납(獻納)을 거쳐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즉위) 광해군이 즉위할 때 그는 이조 정랑으로 있었으나, 이이첨(李爾瞻)이 그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서 의정부 검상(檢詳)으로 좌천시켰다. 홍문관 응교(應敎)에 임명되었다가 시강원 필선(弼善)으로 옮겼고, 종부시(宗簿寺) · 사복시(司僕寺)의 정(正)을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옮겼다. 그 뒤에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사성(司成)을 거쳐 장악원(掌樂院) · 사도시(司䆃寺) 정을 역임하였다. 1611년(광해군3) 홍문관 전한(典翰)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시강원 보덕(輔德)으로 옮겼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를 국문(鞫問)하는 데에 참여하여 분충병의 형난공신(奮忠秉義亨難功臣)에 책훈되었다. 또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마무리되자 1613년(광해군5) 효충분의 익사공신(效忠奮義翼社功臣)에 책훈되고, 여천군(驪川君)에 봉해졌다. 돈녕부 지사(知事) · 의금부(義禁府) 지사에 임명되었는데, 이듬해 진향사(進香使)에 임명되어 부사(副使)허균(許筠)과 함께 중국에서 표류하여 온 명나라 사람 42명을 데리고 중국 북경(北京)에 갔다. 귀국 후에 1615년(광해군6)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돈녕부 판사(判事)로 옮겼다. 이듬해 의금부 지사로서 추국청(推鞫廳)에서 오랫동안 노고가 많았다고 하여, 광해군이 특별히 정1품하 보국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품(陞品)하고 여천부원군(驪川府院君)에 봉하였으며 노비 5명과 토전(土田) 30결을 하사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2백여 명의 공훈을 삭탈하고 자급을 강등하였는데, 민형남도 5자급(資級)을 강등당하여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가 되고 파직당하여, 원주(原州)로 내려가서 술을 팔아 생활하였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 때 변란의 소식을 듣고 단기(單騎)로써 급히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니, 인조가 가상하게 여겨서, 이듬해 춘천부사(春川府使)에 임명하였다. 1626년(인조4)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옮겼으며, 1629년(인조7) 영흥부사(永興府使)에 임명되었는데, 늙어서 방어사(防禦使)를 겸직하기에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덕원부사(德源府使)로 옮겼다. 1631년(인조9)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갔다. 그 뒤에 예조 참판에 임명되어, 의금부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고, 1634년(인조12)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호종(扈從)하였는데, 그 공으로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陞品)하고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어 의금부 지사를 겸임하였다. 이후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병으로 면직을 청하니, 1639년(인조17)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었다. 그때 6판서의 자제들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는데, 그는 이것을 기피하기 위해서 병을 핑계로 형조 판서에서 물러났던 것이다. 1640년(인조18)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으로 옮겼다. 다시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자, 대간(臺諫)에서 그가 질자(質子)를 보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사직하려 한다고 탄핵하여 평안도 창성(昌城)으로 유배되었다가, 영의정홍서봉(洪瑞鳳)이 구원하여, 황해도 연안(延安)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그때 민형남의 나이가 77세였으므로, 인조가 곧 석방하고 중추부 지사에 임명하였다. 1643년(인조21) 나이가 80세가 되었는데, 인조가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陞品)하였다. 당시 국조(國朝) 이래 벼슬한 관료 중에서 두 번 1품의 자품에 오른 사람은 민형남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의금부 판사를 겸임하게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병이 나면, 인조가 어의(御醫)를 보내어 간병(看病)하게 하였다. 1644년(인조22)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좌참찬(左參贊)으로 옮겼다. 1647년(인조25)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이조 판서로 옮겼다.
효종 시대 활동
1651년(효종2) 돈녕부 지사에 임명되었고, 1653년(효종4) 나이가 90세이므로 조회에 나아가지 못한다고 하여 사직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효종이 윤허하지 않고 정1품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품(陞品)하였는데, 그는 이를 사양하였다. 1655년(효종6) 효종이 ‘선조(宣祖) 때의 구신(舊臣)’이라 하여 특별히 쌀과 콩을 하사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효종은 나이 많은 노인을 우대하여 특별히 그에게 물품과 음식물을 하사하는 등 은전을 베풀었다. 1659년(효종10) 5월에 효종이 승하하자, 그는 부축을 받아 뜰에 내려가서 대궐을 바라보고 조석으로 곡하였다. 그해 7월에 병이 위독해져서 초8일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향수가 96세였다.
성품과 일화
민형남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사람됨이 장중(莊重)하고 온화하며 겸손하였다. 신중하여 말수가 적었고 욕심이 적어서 남과 다투지 않았으며 허툰 말을 하거나 농담을 좋아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공손하고 관대하여 쉽게 친해져서 사람들과 잘 어울렸으나, 일을 처리할 때에는 굳게 자기 뜻을 지켰으므로 아무리 존귀하고 힘센 자라고 할지라도 그 뜻을 꺾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광해군 때 추국청에서 오랫동안 많은 옥사를 다스렸으며, 인조 때 의금부의 동지사 · 지사 · 판사에 두루 임명되어 죄인을 다스렸다. 그는 항상 공경을 위주로 하여 예절을 잘 행하는 것을 수신(修身)의 요체로 삼았다. 손님이 오면 으레 도포와 갓을 갖추고 귀천이나 노소를 막론하고 당(堂) 아래로 내려가서 맞이하고 예우하였다. 자손을 가르치는 데에는 법도가 있어서 훈계한 대로 따르지 않으면 매로 다스려서 몸을 조심하도록 하였다. 봉록(俸祿)을 받으면, 가난한 친족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흉년에는 반드시 죽을 쑤어서 문 밖에 두고 굶주리는 자들이 와서 먹도록 하였다. 평생 마시고 먹는 데에도 절도가 있었는데, 술은 한 병 이상 마시지 않았다.
그가 의금부 판사로서 옥사를 다스릴 때가 80여 세였는데, 밤낮으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성실하고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자, 위관(委官)김자점(金自點)이 정승남이웅(南以雄)에게 말하기를, “그가 이미 늙었는데도 공경하고 신중한 것이 이와 같으니, 뒷날 삼공(三公) 자리가 비어서 재상을 추천하라고 하면 이 늙은이를 먼저 천거해야 하겠다.” 하였다. 늙어서 북저(北渚)김류(金瑬)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송나라 문언박(文彦博)의 고사를 본 따서 ‘팔로회(八老會)’를 만들어 승일(勝日)에 모여서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서로 즐거워하였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장정(壯貞)이다. 묘소는 경기도 금천(衿川) 번대방(番大坊)의 선영에 있는데, 권유(權愈)가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 있다. 첫째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좌랑(佐郞)이경욱(李慶郁)의 딸인데 자녀가 없다. 둘째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는 감찰(監察)이보명(李寶命)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장자 민여흠(閔汝欽)은 군수(郡守)이고, 차녀는 승지(承旨)목겸선(睦兼善)에게 출가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서계집(西溪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열하일기(熱河日記)』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용담집(龍潭集)』
- 『우복집(愚伏集)』
- 『학곡집(鶴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