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직(金相稷)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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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김상직 |
한글표제 | 김상직 |
한자표제 | 金相稷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숙종~경종 |
집필자 | 이현숙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김상직(金相稷)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肅宗實錄)』 24년 9월 24일, 『숙종실록』 26년 5월 14일, 『숙종실록』 27년 9월 18일, 『숙종실록』 28년 4월 23일, 『숙종실록』 28년 12월 7일, 『숙종실록』 29년 1월 26일, 『숙종실록』 29년 5월 20일, 『숙종실록』 29년 7월 14일, 『숙종실록』 29년 8월 1일, 『숙종실록』 31년 윤4월 6일, 『숙종실록』 42년 11월 6일, 『숙종실록』 39년 10월 29일, 『숙종실록』 43년 4월 21일, 『숙종실록』 44년 8월 24일, 『경종실록(景宗實錄)』 즉위년 12월 20일 |
총론
[1661년(현종 2)∼1721년(경종 1) = 61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경종(景宗) 때의 문신. 도승지(都承旨)와 형조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자는 여시(汝時)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김횡(金澋)이고,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통덕랑(通德郞)홍처구(洪處久)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안성군수(安城郡守)김홍석(金弘錫)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성균관진사(進士)김규(金珪)이다.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金悌男)의 현손(玄孫)이기도 하다. 숙종 때 인현왕후(仁顯王后)를 감싸고 남인(南人)과 노론(老論)과 싸웠던 노론의 강직한 언관(言官)이었다.
숙종~경종 시대 활동
이름난 가문에서 출생하였으며,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를 폐위(廢位)하자 이에 통분하여 과거를 보지 않았다. 뒤에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1695년(숙종 21)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5세였다.
처음에 여망(輿望)이 아주 커서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여러 번 승진하여 성균관 박사(博士)가 되어 봉상시(奉常寺)직장(直長)을 겸임하였다. 관례대로 성균관 전적(典籍)에 승진되었다가, 병조 좌랑(佐郞)으로 옮겼다. 1698년(숙종 24)부터 대각(臺閣)에 출입하면서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사간원 헌납(獻納)·사헌부 장령(掌令)·사간원 사간(司諫)·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고, 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세자시강원 문학(文學)·세자시강원 필선(弼善)·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 24년 9월 24일),(『숙종실록』 26년 5월 14일),(『숙종실록』 27년 9월 18일),(『숙종실록』 28년 4월 23일),(『숙종실록』 28년 12월 7일),(『숙종실록』 29년 1월 26일),(『숙종실록』 29년 5월 20일),(『숙종실록』 29년 7월 14일),(『숙종실록』 29년 8월 1일),[『도곡집(陶谷集)』 권12 「형조참판김공신도비명(刑曹參判金公神道碑銘)」 이하 「김상직비명」으로 약칭] 일반 관직으로는 병조 정랑(正郞)과 사예(司藝), 장악원(掌樂院) 정(正), 사복시(司僕寺) 정이 되었고,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또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경상도를 염문(廉問)하였다.
1705년(숙종 31)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여러 번 옮겨서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르렀고, 그 사이에 예조 참의(參議)와 공조 참의, 호조 참의, 형조 참의, 병조 참지(參知),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숙종실록』 31년 윤4월 6일),(『숙종실록』 42년 11월 6일),[「김상직비명」] 1713년(숙종 39) 동지사(冬至使)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정사조태채(趙泰采)와 함께 청(淸)나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왔다.(『숙종실록』 39년 10월 29일) 외방으로 나가서 성주목사(星州牧使), 곡산부사(谷山府使)를 거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와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고, 숙종 말년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승정원 도승지로 영전되었다.(『숙종실록』 43년 4월 21일),(『숙종실록』 44년 8월 24일),[「김상직비명」]
함경도관찰사로 재임할 때부터 병이 있어서, 그 뒤에 정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년) 6월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즉위하자, 소론(少論)이 정권을 잡으면서 노론의 중진으로 승정원 승지로 추천되어, 경종 초기 소론과 노론의 연립 정권에 참여하였다.(『경종실록(景宗實錄)』 즉위년 12월 20일) 그러나 병이 위중하여, 1721년(경종 1) 3월 27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1세였다.[「김상직비명」]
성품과 일화
김상직(金相稷)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기질이 온화하고 순박하나 실지로는 안으로 지조를 지키는 데에 굳건하였다. 식견이 통달하고 민첩하나, 스스로 자기 재능을 자랑하지 않았다.[「김상직비명」]
어려서부터 훌륭한 자질이 있어서 몸을 닦고, 학업에 더욱 부지런하여,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여 암송한 횟수가 거의 수천 번에 이르렀다. 『심경(心經)』·『주자대전(朱子大典)』의 연구는 그가 평생토록 더욱 힘을 쏟았던 분야이다. 한편으로 사장(詞章)과 고문(古文)을 익히고『장자(莊子)』·『사기(史記)』·『전국책(戰國策)』등의 서적들도 모두 깊이 연구하고 연역(演繹)해서 자기의 지식으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학문의 소양이 매우 풍부하고 문장의 사고(思考)가 모자라지 않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소년은 아무도 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나약하게 보이고 능한 바가 없는 것 같았으므로, 한때 안정되고 조용하게 스스로 학업을 닦으려고 친구들과 헤어져 쓸쓸히 지내면서 교유(交遊)하기를 끊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가 실력이 없다고 비웃었으나, 그는 일찍이 한 번도 그들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김상직비명」]
대각의 자리에 있은 지 거의 십 수 년이나 되었는데, 사건을 만나면 반드시 발언하였고, 발언하면 반드시 강경하고 절실하였으므로, 동료 간관(諫官)들이 그를 추대하고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박세당(朴世堂)이 주자(朱子)를 비판하다가,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욕하자, 김상직이 박세당의 이론을 변석(辨釋)하고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배척하기를 더욱 엄하게 하였으므로, 주자학 이외에 양명학(陽明學)이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 승정원에 들어가서 승지의 자리에 있으면서 숙종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으려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외방의 관직에 나가서 백성들의 고통을 샅샅이 찾아내서 바로 잡기에 힘썼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금곡리(金谷里)에 있는데, 도곡(陶谷)이의현(李宜顯)이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남아있다.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승지한구(韓構)의 딸이다. 자녀는 5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5형제는 김엽(金熀)·김빈(金◎火+賓)·김진(金◎火+晉)·김헌(金◎火+憲)·김소(金◎火+肅)이고, 외동딸은 이시로(李蓍老)에게 시집갔다. 장자 김엽은 아들 김재상(金載尙)·김재록(金載祿)·김재정(金載淨)을 낳았으나. 차자 김빈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김재록을 양자로 보냈다. 3남 김진은 아들 김재망(金載望)·김재항(金載恒)·김재숭(金載崇)을 낳았고, 4남 김헌은 아들 김재언(金載彦)·김재준(金載俊)을 낳았다. 5남 김소도 아들이 없어서, 종형(從兄)의 아들 김재문(金載文)을 양자로 삼았다. 사위 이시로의 아들은 이문제(李文濟)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察訪)을 지냈다.[「김상직비명」]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헌종실록(憲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도곡집(陶谷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약천집(藥泉集)』
- 『이우당집(二憂堂集)』
- 『돈와유고(遯窩遺稿)』
- 『성재유고(醒齋遺稿)』
- 『수촌집(水村集)』
- 『약헌집(約軒集)』
- 『북헌집(北軒集)』
- 『포암집(圃巖集)』
- 『이계집(耳溪集)』
- 『계당집(溪堂集)』
- 『검재집(儉齋集)』
- 『죽헌집(竹軒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