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첨(姜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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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9년(명종14)~1611년(광해군3) = 53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공신(公信)이고, 호는 죽월헌(竹月軒)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인데, 시조는 강민첨(姜民瞻)이고, 강학년(姜鶴年)의 아버지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6년(선조9) 나이 18세에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오랫동안 대과에 합격하지 못하다가, 1591년(선조24) 나이 33세에 식년(式年) 문과에 겨우 급제하였다. 초사(初仕)로서 승문원(承文院)정자(正字)에 보임되어, 선조 후반기 온갖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식량과 군사를 조달하는 어사(御史)로서 활동하였다. 1593년(선조26) 충청도운량어사(忠淸道運糧御史), 이듬해 충청도조도어사(忠淸道調度御史)가 되어 충청도 지방의 군량과 군사를 조달하였다. 1595년(선조28)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어 시강원(侍講院)사서(司書)와 겸임하였다. 1599년(선조32) 병조정랑을 거쳐서,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 부교리(副校理), 교리(校理)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1601년(선조34) 사헌부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 성균관사예(司藝)를 거쳐서, 의정부(議政府)사인(舍人)으로 옮겼다. 1602년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 예문관(藝文館)응교(應敎), 사헌부집의(執義)를 역임하고, 사복시(司僕寺)정(正)으로 옮겼다가, 홍문관전한(典翰)에 임명되었다. 1603년 경연 시강관(侍講官)을 역임하고, 1604년 승정원(承政院)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1605년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을 다녀와서,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 1607년 장례원(掌隷院)판결사(判決事)를 거쳐서 홍문관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즉위) 병조참지(參知)에서 이조참의로 옮겼다. 1609년(광해군1) 승지(承旨)로 발탁되어 좌부승지로 승진하였으며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 1610년 사헌부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되었고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거쳐서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611년 사간원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는데, 품계가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1611년(광해군3) 10월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53세였다.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강직하여 악을 미워하고 소인을 원수처럼 보고 자리를 피하였다. 마음씨는 공손하고 선을 좋아하여, 불의를 뜨거운 물과 불처럼 보고 이를 경계하였다. 관청에 근무할 때에는 책임을 다하여 임무를 수행했고, 가정에 있을 때에는 수신(修身)을 실천하며, 자신을 청렴하게 단속했다. 오랫동안 벼슬을 역임했지만, 자손들을 위한 계책을 일체 세우지 않아서, 자손들은 시골로 흩어져 곤궁하게 살고 있는데, 심지어 스스로 생계를 보존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되었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충청도 회덕(懷德)의 산록에 있는데, 이원익(李元翼)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서애집(西厓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