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한(申光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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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4년(성종 15)∼1555년(명종 10) = 72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의 문신. 찬성(贊成)을 지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고 봉호는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이다. 자(字)는 한지(漢之), 또는 시회(時晦)이고, 호(號)는 낙봉(駱峰) · 기재(企齋) · 석선재(石仙齋) · 청성동주(靑城洞主)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내자시(內資寺)정(正)신형(申泂)이고, 어머니 연일 정씨(延日鄭氏)는 사포(司圃)정보(鄭溥)의 딸이다. 영의정(領議政)신숙주(申叔舟)의 손자이고, 좌의정(左議政)신용개(申用漑)의 4촌이다. 삼괴(三魁)신종호(申從濩)의 4촌이고,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와 교유하였다.

중종 전반기 활동

<중종반정(中宗反正)> 이듬해인 1507년(중종 2) 나이 24세에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 · 진사과(進士科) 양과에 합격하고[『방목』]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중종이 1509년(중종 4) 성균관 유생(儒生)들에게 표전문(表箋文)을 시험보였을 때, 수석을 차지하자,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하도록 허락하여[『인재집(忍齋集)』 권2 「유명조선국 보국숭록대부 영성부원군 신공 묘지명(有明朝鮮國輔國崇祿大夫 靈城府院君 申公墓誌銘)」, 이하 「신광한 묘지명」으로 약칭] 1510년(중종 5) 나이 27세에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방목』] 처음에 승문원(承文院)에 권지 정자(權知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차례로 승진하여 저작(著作)이 되었다. 1512년(중종 7)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 정자가 되었고, 이듬해 병으로 사임하였다가, 1513년(중종 8) 승문원으로 들어가서 박사(博士)가 되었다.[『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1514년(중종 9) 다시 홍문관에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는데, 독서당(讀書堂)에서 김안로(金安老) · 소세양(蘇世讓) 등과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15년(중종 10)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고,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거쳐, 헌납(獻納), 부교리(副校理)로 승진되었다.[『중종실록』중종 9년 1월 5일 · 9월 22일, 중종 10년 3월 27일 · 4월 20일 · 6월16일] 1516년(중종 11) 승문원 교검(校檢)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 1517년(중종 12)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어, 대궐문 밖에 엎드려 소격서(昭格署)를 존치(存置)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자, 중종이 즉시 혁파하도록 명하였다.[『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소격서는 하늘과 땅과 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기관인데, 도교(道敎)의 초제(醮祭)를 지내는 곳이다. 조광조의 사림파(士林派)가 미신을 타파하기 위하여 이것을 없애자고 주장하였다. 곧 홍문관으로 옮겨서 교리(校理) · 부응교(副應敎)로 차례로 승진하였고,[『중종실록』 종종 12년 8월 22일 ]

1518년(중종 13) 홍문관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가, 사간원으로 옮겨서 사간(司諫)으로 승진하였다. 또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어, 경연(經筵)시강관(侍講官)을 겸임하였다. 당시 31세의 중종은 정신을 가다듬고 학문에 몰두하여 낮 공부인 주강(晝講)은 물론 밤 공부인 야대(夜對)까지 열고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를 강론하다가 자정이 넘어 밤 3경(三更) 5고(五鼓)에 이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광한은 조광조와 함께 학문에 열중하는 중중을 계도(啓導)하려고 노력하였다. 또 조광조와 함께 시무(時務)를 논하여, 중종이 그 자리에서 채택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또 중종의 특명으로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경연에 입시(入侍)하여 지성으로 중종에게 학문을 권면하고 주색잡기(酒色雜技)를 경계하였다. 경연에서 중종은 신광한에게 “의리는 비록 군신(君臣)의 관계이지만, 인정은 부자(父子)의 사이와 같다.”고 실토하였다. [『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승정원 좌승지로 발탁되었다가 1519년(중종 14) 마침내 이조 참의(參議)와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중종실록』중종 13년 7월 4일 · 11월 17일, 중종 14년 2월 13일 · 6월 23일]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신광한

1517년(중종 12) 신광한은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어, 조광조의 사림파 선비들과 함께 대궐문 밖에 복합(伏閤)하여, 소격서의 건치가 적합하지 않다고 극론(極論)하자, 중종이 즉시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소격서는 태조(太祖)가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하면서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옮겨온 것인데, 도교의 초제를 지내는 관청이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중종은 개혁 정치를 하려고 성균관 유생들이 천거하는 젊은 정암조광조를 특별히 채용하여 유교의 이상주의 정치, 즉 도학(道學) 정치를 이룩하려고 하였다. 신광한과 조광조가 미신을 타파하기 위하여 소격서를 폐지하자고 주장하고 중종이 이를 받아들여 혁파했는데, 이 때 신광한은 34세이고 조광조는 36세이고, 중종은 갓 30세였다. 신광한은 조광조와 친하게 지냈는데, 개혁을 논의할 즈음에 조광조의 잘못을 볼 때마다 신광한은 반드시 정색을 하고 조광조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 조광조는 번번이 얼굴빛을 고치고 사죄하고 순순히 그 의견을 따랐다. 조광조가 일찍이 신광한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다른 나라에 있는데도 설령 어떤 사람들이 그대가 탐욕스럽고 해롭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응당 믿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조광조가 신광한을 공경하고 신임함이 이와 같았다.[『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1518년(중종 13) 홍문관 응교 · 전한으로 승진하였는데, 그때 젊은 중종도 학문에 정신을 기울여서 경연에서 조광조와 신광한 등 유신(儒臣)들과 더불어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공부에 몰두하여, 심지어 편전(便殿)에서 야대를 열어서 강관에게 강론하게 하였는데, 신광한이 조광조와 함께 고금(古今)의 시무(時務)를 논하여 중종의 개혁 정치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중종이 강론을 들으면서 피로도 잊고 밤 오고(五鼓)에까지 이르러서야 야대를 판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어느 날 경연에서 중종이 신광한에세 남몰래 말하기를, “10년 동안 경연관을 맡아서 마음을 다하여 부지런히 힘썼는데, 의리상으로는 비록 군신의 사이지만, 인정상으로는 부자 같은 사이다.” 하였는데, 신광한은 중종의 하교(下敎)를 깊이 마음속에 새겨서 평생토록 잊지 않았다.[『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중종은 조광조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할 때 특별히 신광한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하여, 두 사람이 경연에 입시(入侍)하여 지성으로 중종을 권면하고 경계하였다. 그때 영의정정광필(鄭光弼)이 경연 영사(領事)로서 경연에서 유학자를 많이 채용하라고 권면하였는데, 이른바 유학자는 그들을 지목한 것이었다. 중종은 조광조의 주장을 받아들여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천거에 의하여 김식(金湜) · 안처겸(安處謙) · 박훈(朴薰) 등 28인을 뽑아서, 이조 판서안당(安瑭)이 이들을 대간(臺諫) 등 청요직(淸要職)에 임명하였다. 조광조는 과거 제도를 개혁하기 위하여 현량한 사람을 책임지고 추천하는 방식을 채용하고, 문장으로 시험을 보는 방법을 폐지하고, 또 고려 시대 이래로 장려해온 사장(詞章)을 배척하자, 남곤(南袞) · 이행(李荇) · 소세양 등의 사장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 중종은 신광한을 승정원 좌승지로 발탁하였다.[『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1519년(중종 14) 조광조의 신진사류는 훈구파를 타파하기 위하여 반정 공신(反正功臣)의 위훈(僞勳)을 삭제하였다. 중종의 반정 공신 가운데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므로 공신 작호(爵號)를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공신 76인의 작호를 삭탈하고, 그 토지와 노비를 환수하였다. 이때 중종은 신광한을 도승지에 임명하여 최측근에서 정치를 보필하게 하였다. 남곤과 심정(沈貞) 등은 홍희빈(洪熙嬪)의 아버지인 홍경주(洪景舟)와 손을 잡고,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곧 조광조가 왕이 된다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에 이것을 중종에게 바치게 하고,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간다.”고 하여, 중종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32세의 중종도 조광조 일파의 도학적 언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홍경주 등의 밀계(密啓)를 받아들여 조광조 일파를 치죄(治罪)하게 하였다. 그해 11월 15일 밤중에 홍경주와 남곤과 심정 등은 군사를 모아 궁중 정변을 일으켜서 조광조 일파를 모두 체포하여 당장에 처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영의정정광필과 좌의정안당 등이 반대하고, 성균관 유생 1천여 명이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상소하였다. 이에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綾州)로 귀양갔다가 사사(賜死)되었고, 김정 · 한충(韓忠) · 김식 등도 모두 귀양 갔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그 밖에 김구(金絿) · 박세희(朴世熹) · 박훈 · 홍언필(洪彦弼) · 이자(李耔) · 유인숙(柳仁淑) 등 수십 명이 귀양을 갔고, 그들을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金安國) · 김정국(金正國) 형제 등도 파직되었다. 이때 신광한도 조광조 일파라고 탄핵을 받아서, 1520년(중종 15)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에 파직되었다.[『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1522년(중종 17) 신광한은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묘소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524년(중종 19) 3년 상례를 끝마치고 경기도 여흥(驪興)의 원향리(元享里)에 집을 짓고 은거하였다. 그는 좌우에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두고 책을 읽으면서 집 대문을 닫고 세상 사람들과 서로 접촉하지 않았다. 그때 신광한은 41세였는데, 장차 여생을 이곳에서 보낼 생각을 하였다.[『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중종 말기의 활동

중종은 나이가 들면서 젊었을 때 자신의 잘못 판단하여 조광조 등 많은 사림파의 인재들을 죽이거나, 몰아낸 것을 후회하였다. 중종은 자기 자신을 옹립한 박원종(朴元宗) · 성희안(成希顔) 같은 공신의 세력을 도저히 제압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전반기에는 조광조의 사림파를 특별히 등용하고, 후반기에는 신공제(申公濟) · 김안로(金安老)를 특별히 중용하여, 원종 공신의 세력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1537년(중종 32) 중종 말기에 정권을 잡았던 척신(戚臣) 김안로 등이 문정왕후(文定王后)를 축출하려고 기도하다가 실패하여 숙청을 당하자, 1538년(중종 33) 중종은 해이해진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인사 행정을 쇄신하려고, 윤인경(尹仁鏡)을 이조 판서로 임명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禍)를 입은 신진 사류(士類)들을 다시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1538년(중종 33) 이조 판서윤인경이 <기묘사화> 때 직첩을 거두고 파직시킨 사람들을 초록(抄錄)한 단자(單子)를 바치자, 중종이 그 명단을 보고 전교하기를, “전 관찰사김정국, 전 부윤유인숙과 정순붕(鄭順朋), 신광한 등 13명은 모두 서용하라.” 하였다.[『중종실록』중종 32년 12월 15일, 중종 33년 2월 21일] 이리하여 신광한은 여주에서 15년 동안 칩거하다가,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중종이 도성(都城)의 동북쪽에 있는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서 무신들이 활을 쏘는 것을 구경하였는데. 중종이 ‘함춘원(含春苑)’이란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입시(入侍)한 신하들에게 지어서 바치게 하였다. 신광한이 수석을 차지하여 숙마(熟馬) 1필을 하사 받았다.[『중종실록』중종 33년 3월 26일] 곧 대사간으로 옮겼다가, 그해 여름에 병조 참의가 되고, 가을에 종 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품되어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으며, 겨울에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1539년(중종 34) 경기도 관찰사에서,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로 좌천되었다.

1540년(중종 35) 다시 한성부 우윤이 되었다가, 여름에 병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어,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을 겸임하였고, 가을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42년(중종 37) 병조 참판으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겸임하였고, 바로 형조 참판이 되었다가 호조 참판이 되었다가 겨울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중종실록』중종 37년 1월 9일 · 1월 10일 · 윤5월 17일 · 11월 29일] 1543년(중종 38) 형조 판서가 되어,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으로 가려고 하는데, 의정부에서 신광한이 병중에 있어서 멀리 떠날 수 없으므로, 사신으로 보내지 말도록 청하자, 중종이 그대로 따랐다. 1544년(중종 39) 봄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어, 예문관 제학과 의금부(義禁府)지사(知事)를 겸임하였다. 그해 가을에 홍문관 제학을 겸임하였는데, 이것은 장차 신광한을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임명하여 문형(文衡)을 맡기려는 인사 행정이었다. 이조 판서신광한은 공정히 인사를 처리하여 청렴한 관리의 후손과 각 지방의 유일(遺逸)까지 발탁하였다.[『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인종 · 명종 시대 활동

1545년(인종 1) 7월 인종이 승하하자, 명나라에서 행인(行人) 장승헌(張承憲)을 조사(詔使)로 보내와서 조문하자, 이조 판서신광한이 원접사(遠接使)에 임명되어 중국 조사를 접대하였다. 그해 9월 명종이 즉위하는 데에 공훈이 있다고 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책훈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마침 대제학의 자리가 비었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그를 추천하여 홍문관 대제학이 되어서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게 하였다. 당시 명나라에서 조선에서 보낸 표문(表文)을 잘못되었다고 트집을 잡았는데, 그 표문은 퇴계(退溪)이황(李滉)이 짓고, 신광한이 교열한 것이었다. 그때 대제학신광한이 책임을 지고 벼슬을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명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1546년(명종 1)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판서가 되었다.[『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1547년(명종 2) 병으로 사임하여, 중추부 지사(知事)로 전직되었다. 그해 9월 공신들이 모여서 회맹(會盟)하고 삽혈(歃血)할 때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고, 영성군에 봉해졌다.[『명종실록』명종 즉위년 8월 30일 · 9월 27일, 명종 2년 윤9월 16일] 그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를 편찬하였는데, 겸 대제학신광한이 <기묘사화>에 본인이 관계되었다 하여 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를 사양하여 교체되었는데, 실록 총재관(總裁官)이기(李芑)가 아뢰기를, “대제학신광한이 기묘사화 때의 일로 인하여 피혐하여, 도청(都廳) 당상(堂上)을 사직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실록을 수찬할 때에 대제학이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신광한은 기묘사화 때의 일을 편수할 때에만 피혐하면 됩니다. 그대로 유임시키고 체직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명종이 아뢴 대로 하라고 명하였다.[『명종실록』명종 2년 12월 16일 · 12월 26일 ]

1548년(명종 3) 돈녕부(敦寧府) 판사(府事)에 임명되었는데, 병을 이유로 대제학의 겸직을 사임하였으나, 명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1550년(명종 5)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임명되어, 대제학을 그대로 관장하였다. 1551년(명종 6) 다시 찬성에 임명되었으나, 이때부터 병으로 몸이 날마다 야위어가자, 병을 이유로 상소를 올려서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거듭 간청하였다. 1552년(명종 7) 신광한이 병으로 사임하여, 중추부 판사로 체직되었다가, 다시 의정부 우찬성에 임명되었다. 1553년(명종 8)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는데, 나이가 70세가 되었으므로 신광한이 전문(箋文)을 올려 치사(致仕)하기를 청하니, 명종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중관(中官)과 도승지를 보내어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이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554년(명종 9) 신광한이 대제학을 굳이 사임하였으므로, 명종이 처음으로 대제학을 사임하도록 허락하였다. 대신들의 건의에 따라서 명종이 신광한을 특별히 정1품하 보국 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으로 승품하고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봉하였다. 1555년(명종 10) 병으로 몸이 날마다 야위어 가는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1555년 11월 2일 지병으로 낙봉(駱峰)의 새집[新舍]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2세였다. [『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명종실록』명종 10년 윤11월 2일 「신광한 졸기」]

저서로는 『기재집(企齋集)』이 남아 있다.

문형 신광한의 문장과 표문 · 전문

신광한은 문장을 지을 때 맹자(孟子)와 한유(韓愈)의 글을 기준으로 삼았고, 시(詩)를 지을 때 두보(杜甫)의 시를 본받았다. 문장에서 논리가 전체를 압도하게 하려고 힘쓰면서도 글의 흐름[辭致]이 분명하고 풍류의 성격이 고상하여 옛 풍취가 있었다. 문장의 힘은 힘차고 원숙하여 사람이 항상 먹는 콩과 배처럼 평탄하고 담박하지 않음이 없었다. 문장이 깨끗하고 굳세며, 노련하고 기운이 차서 저절로 미칠 수 없는 정교함이 있었다. 그는 송(宋)나라 황정견(黃庭堅)을 종사(宗師)로 하는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모방하였으며, 글을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오직 삼소문(三蘇文) 곧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 3부자의 글은 좋아하지 않아서 말하기를, “이 책을 읽고 나서 잊으려 하여도 잊을 수 없다.” 하니, 대개 그 학술이 올바르지 않은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다.[『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신광한은 문장에 대가(大家)였을 뿐만 아니라, 이문(吏文)에 뛰어나서 표문 · 전문을 잘 지었으며, 또 운율(韻律)에도 정통하여 당시의 중국 성음(聲音)을 이해하고 있었다.

1539년(중종 34) 명나라에서 한림원(翰林院) 수찬(修撰)화찰(華察) 등을 조사로 보내와서 조서(詔書)를 반포하였는데, 조사가 돌아갈 때 대사간신광한이 의주(義州)의 전위사(餞慰使)에 임명되어 그들을 전송하였다.[『중종실록』중종 34년 2월 5일 · 4월 13일] 중국의 명나라 때 조선에 오는 사신에는 조사(詔使)칙사(勅使)가 있었다. 명나라 황실에서 필요한 물건이나 사람을 구하려고 온 칙사는 환관(宦官)을 보냈으나 명나라 황제의 조서(詔書)를 반포하려고 조선에 온 조사는 대개 명나라의 유명한 학자나 문인(文人)들을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접반사(接伴使)가 조사를 위한 연회를 베풀 때 중국의 조사들은 조선의 문인(文人)들과 서로 시문(詩文)을 지어서 창화(唱和)하였다. 이때 중국의 조사들이 우리나라의 시문을 평가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가장 시문에 뛰어난 문인을 대개 접반사로 임명하였다. 중종 시대 신광한과 소세양 · 성세창 세 사람은 당대에 가장 시문(詩文)에 뛰어났던 대문장가였는데, 조사 화찰이 조선에 왔을 때 소세양이 접반사가 되었고, 조사가 돌아갈 때 신광한이 소세양을 도와서 조사를 전송하면서 그들과 시문을 주고 받았다. 신광한은 운율을 잘 알아 당시의 중국 성음을 이해하고 있었는데, 중국 명나라 조사와 운률에 따라 시를 지어서 창화할 때, 소세양이나 성세창이 잘 모르는 당대의 중국 운율을 구별하여, 접반사와 중국 조사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조사 화찰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과 어음(語音)이 같지 않아서 반드시 가사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작은 가사를 지으면서 일부러 한 글자를 빠뜨리고서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시험하였다. 신광한이 즉시 그 틀린 곳을 구별해 내자, 중국 사신이 그의 정밀하고 민첩한 분별력에 탄복하였다.[『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신광한은 이문에 뛰어나서 표문 · 전문을 잘 지어서 중국과의 외교 문서를 오래도록 전담하였다. 1543년(중종 38) 중종이 중국에 사신으로 왕래한 사람들의 중국 사정을 보고한 『문견 사건(聞見事件)』을 읽어보고 말하기를, “흠문 진하사(欽問進賀使)가 올린 표문을 예부 상서(尙書)와 시랑(侍郞)이 두세 번 읽고 보고서 아름답다고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외이(外夷)의 조그만 나라 표문을 가지고 중국에서 칭찬할 만한 것도 별로 없을 텐데, 이처럼 찬미하는 것은 오직 문사(文詞)의 귀중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번에는 김안국이 대제학을 지낼 때 정성껏 표문을 지어 보냈으므로 그와 같았는데, 지금은 김안국이 이미 죽고 제술(製述)하는 사람도 몇 사람이 안 된다.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성세창(成世昌) · 정사룡(鄭士龍) · 신광한 등 두세 사람뿐이다.” 하였다.

1545년(인종 1) 7월 인종이 승하하자, 명나라에서 행인 장승헌을 조사로 보내와서 조문(弔文)하였다. 조정에서 신광한을 천거하여 원접사로 삼아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게 하자, 의식에 지나치거나 어긋남이 없었으며, 간혹 시를 짓거나 말을 하면서 반드시 상중(喪中)의 슬픔과 임금을 사모하는 정을 구구절절이 표현하자, 조사 장승헌은 감탄하여 칭찬하기를, “신판서는 문장이 넉넉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도(道)의 기량도 또한 공경할 만합니다.” 하고, 항상 신광한을 “노사(老師)”이라고 일컫고 존경하였다.

1546년(명종 1) 3월 퇴계이황이 쓴 표문에 글자를 잘못 썼다고 명나라 예부에서 트집을 잡아서, 말썽이 일어났다. 서울에 잠깐 올라와서 머물던 이황이 늙은 신광한을 대신하여 표문을 지었는데, 표문의 ‘이(爾)자’가 매우 불공하다고 명나라 예부에서 문제를 삼은 것이다. 이에 대제학신광한이 아뢰기를, “…이 표문은 비록 이황이 지은 것이지만, 실상 신이 수정하였으니, 이는 신이 살피지 못한 죄입니다. 감히 대죄(待罪)합니다.” 하였다. 명종이 대답하기를, “문자(文字) 사이에 어찌 한 글자의 잘못도 없겠는가? 더구나 ‘이덕(爾德)’이란 문구는 고문(古文)이어서 심상하게 여기고 썼을 뿐이니, 무심히 한 일이다. 그리고 조정 대신들도 함께 읽어보고 마감(磨勘)한 것이니, 어디 경이 혼자서 한 일인가?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신광한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 노병(老病)이 더욱 깊고 정신이 흐려서 더욱 벼슬을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중국에서 표문이 전보다 열등하다고 한다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명종이 대답하기를, “한 가지 일의 실수로 중임(重任)을 가볍게 바꿀 수 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년 3월 27일)

성품과 일화

신광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명종실록』명종 10년 윤11월 2일 「신광한 졸기」, 『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그는 성품이 순후(醇厚)하고 풍채는 고상하고 옛 풍취가 있었다. 학문은 해박(該博)하고 문장은 정려(精麗)하였다. 충후하고 인자하며, 장대한 체구에 흰 머리를 날려, 의연한 옛 재상의 풍채가 있었다. 비록 몸은 수척하였지만, 신색(神色)은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모습은 비상하고, 큰 키에 수척하였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그의 생김새를 “용(龍)의 무늬와 봉황새의 자태”에 견주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를 ‘용봉(龍鳳) 대감’이라고 불렀다, 당시에 직언(直言)한 것이 있었지만, 채택되지 않고 오활하다고 지목하여 산직(散職)의 벼슬에 두었으니, 이는 그의 신조가 세태(世態)와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바탕이 후중하고 국량은 넓어서 끝까지 지조를 확실하게 지켰으므로, 사류(士類)들이 그를 중하게 여기고 모두 그를 따랐으며, 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을 때에 유생들이 그를 노성 숙유(老成宿儒)라고 하여 그의 강론을 들으려고 운집하였다.

신광한의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그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나이가 열 댓살이 되도록 아직 글을 깨치지 못하여, 자주 비복(婢僕)들에게 조롱을 당하였는데, 그때마다 신광한이 큰 소리치기를, “내가 비록 배우지는 않았지만, 내가 배우기만 한다면, 문득 여러 사람 중에서 뛰어날 터이니, 너희들이 두고 보면, 알게 될 게다.” 하였다. 열다섯 살 때에 처음으로 분발하여 현명한 스승과 친구에게 나아가 글을 배우고 책을 읽었는데, 학문은 뜻과 이치를 연구하고 장(章)과 구절을 오로지 따지지 않았는데, 몇 해가 안 되어 여러 사람 가운데 우뚝하게 빼어나서, 이미 훌륭한 선비가 되었으므로, 옛날에 교유했던 자들이 모두들 감히 얕잡아 보지 못하였다. 성종이 왕비 윤씨(尹氏: 제헌왕후)를 폐하고 얼마 있다가 사약을 내렸는데, 신광한의 아버지 내자시 정신형이 맡아서 그 장례를 간략하게 치르고 일기를 적었다. 연산군이 즉위하여 그의 어머니 양례(襄禮) 때 일을 적은 일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양비일기(襄庀日記)』를 보기 원하였다. 그때 아버지 신형은 이미 돌아간 지 오래되었으므로, 아들 신광한은 나이가 아직 어렸다. 당시 장례에 사용한 장구(葬具)가 매우 보잘 것 없어 연산군이 만일 일기를 본다면 반드시 크게 노하여 엄하게 질책하리라 생각하고, 그 일기를 찾아내어 즉시 불태워버린 다음, 연산군이 사람을 보내어 그 책을 찾았을 때 그런 것이 없다고 하였다.

『해동잡록(海東雜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하기도 한다. 신광한은 역학(易學)에도 정통하여, 큰일을 만나면, 반드시 운수를 따져보려고 하였다. 경세서(經世書)를 읽다가 알지 못하는 대목이 있어서 7일(日) 7야(夜)를 사색하였는데, 하루는 꿈속에 용모와 의표가 퍽 훌륭한 노인이 나타나서 자기가 소옹(邵雍)이라고 하면서 알지 못하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신광한이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그 대목을 보니, 저절로 깨우쳐져서 환하게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어릴 때 꿈에 문채 있는 봉황새가 날아와서 집 모서리에 모였는데, 신광한이 축하하려고 입을 열자, 봉황새가 날개를 치며 입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고 한다. 이때부터 글짓는 재주가 날로 빛나게 진보하였다. 그래서 그는 ‘꿈에서 봉황새를 삼켰다는 이야기’를 ‘탄봉설(呑鳳說)’로 지어서 그 기이한 일을 기록하였다. 늙어서 또 꿈속에서 한 봉황새를 삼키는 꿈을 꾸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 문형(文衡)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에게 잘 순종하였는데, 일찍이 홀로 된 어머니를 섬길 때에 어머니 뜻을 받들어 그 마음을 즐겁게 하려고 마음을 먹고, 어머니가 기뻐하도록 안색을 살펴가며 비위를 맞춰드렸다. 신광한은 벼슬이 이미 높아졌지만 받은 녹봉은 감히 사사로이 저축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리고 어머니에게 여쭌 뒤에야 사용하였다. 그때 관가에서 지급하는 마부(馬夫)를 거절하고 받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그에게 관가에서 지급하는 마부(馬夫)를 받겠다고 허락을 하라고 명하였지만, 신광한은 불가하다고 고집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네 아버지도 일찍이 받지 않더니만, 너도 다시 이와 같이 하니, 내가 어찌 억지로 하도록 하겠는가.” 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윤원형(尹元衡)의 소윤(小尹) 일당이 공신을 책봉할 때 공신을 책봉하는 교서(敎書)를 직책상 대제학신광한이 지어야만 했다. 대제학신광한이 붓을 잡고 일부러 신음하다가 부제학최연(崔演)을 보고, “이 몸이 어젯밤부터 병이 나서 기운이 몹시 쇠약하여 글이 떠오르지 않으니, 그대가 대신 속히 지어 올려서 군색함이 없게 하시오.” 하니, 최연이 어쩔 수 없이 대신 지어서 바쳤다. 신광한은 위사공신이 책훈된 뒤에 지급받은 역적의 자손과 노비들을 모두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허락하고 일체 사역을 시키지 않았는데, 그때 사람들은 그런 줄 알지 못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高陽) 재궁동(齋宮洞)에 있는데, 인재(忍齋)홍섬(洪暹)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인재집(忍齋集)』 권2 「유명조선국 보국숭록대부 영성부원군 신공 묘지명(有明朝鮮國輔國崇祿大夫 靈城府院君 申公墓誌銘)」] 무덤은 쌍분(雙墳)인데, 지금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1에 있으며, 그 아래 이조 참의정자양(鄭自洋)의 묘가 있다.

첫째 부인 평택 임씨(平澤林氏)는 군수(郡守)임만근(林萬根)의 딸인데, 2녀를 낳았다. 장녀는 사직서(社稷署) 영(令)정형(鄭衡)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현령(縣令)심의검(沈義儉)에게 출가하였다. 사위 정형의 손자가 정자양이다. 둘째 부인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현감(縣監)오옥정(吳玉貞)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신역(申渙亦)인데,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차남은 신진(申津)이다. 측실(側室)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서출 아들은 신애(申涯)이다.[『인재집』 권2 「신광한 묘지명」]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기재집(企齋集)』
  • 『부계기문(涪溪記聞)』
  • 『견한잡록(遣閑雜錄)』
  • 『계곡집(谿谷集)』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묘록 보유(己卯錄補遺)』
  • 『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
  • 『기재잡기(寄齋雜記)』
  • 『농암집(農巖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사집(白沙集)』
  • 『부계기문(涪溪記聞)』
  • 『상촌집(象村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송계만록(松溪漫錄)』
  • 『송와잡설(松窩雜說)』
  • 『순암집(順菴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심전고(心田稿)』
  • 『아계유고(鵝溪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복집(愚伏集)』
  • 『월정만필(月汀漫筆)』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인재집(忍齋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퇴계집(退溪集)』
  • 『패관잡기(稗官雜記)』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역사(海東繹史)』
  • 『해동잡록(海東雜錄)』
  • 『묵재집(默齋集)』
  • 『충재집(冲齋集)』
  • 『음애집(陰崖集)』
  • 『학포집(學圃集)』
  • 『정암집(靜菴集)』
  • 『월연집(月淵集)』
  • 『충암집(冲庵集)』
  • 『회은집(晦隱集)』
  • 『송재집(松齋集)』
  • 『규암집(圭菴集)』
  • 『회재집(晦齋集)』
  • 『호음잡고(湖陰雜稿)』
  • 『입암집(立巖集)』
  • 『범허정집(泛虛亭集)』
  • 『면앙집(俛仰集)』
  • 『용문집(龍門集)』
  • 『퇴계집(退溪集)』
  • 『간재집(艮齋集)』
  • 『금호유고(錦湖遺稿)』
  • 『추파집(秋坡集)』
  • 『부훤당유고(負暄堂遺稿)』
  • 『율곡전서(栗谷全書)』
  • 『백곡집(栢谷集)』
  • 『고담일고(孤潭逸稿)』
  • 『중봉집(重峰集)』
  • 『서경집(西坰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백사집(白沙集)』
  • 『한음문고(漢陰文稿)』
  • 『은봉전서(隱峯全書)』
  • 『잠곡유고(潛谷遺稿)』
  • 『낙전당집(樂全堂集)』
  • 『동주집(東州集)』
  • 『동명집(東溟集)』
  • 『동토집(童土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