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崔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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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3년(연산군 9)∼1549년(명종 4) = 47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의 문신이며 문장가. 행직(行職)은 도승지(都承旨)이고, 증직은 좌찬성(左贊成)이나 나중에 삭탈당하였다. 본관은 강릉(江陵)인데, 강릉 출신으로 주거지는 서울이다. 자는 연지(演之), 호는 간재(艮齋)이다. 증조부는 증 도승지최윤(崔允)이고, 조부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지내고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최자점(崔自霑)이다. 아버지는 현감을 지내고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된 최세건(崔世楗)이고, 어머니 정평김씨(定平金氏)는 생원(生員)김세량(金世良)의 딸이다.(『방목』) 교수(敎授)최담(崔澹)의 동생이고, 진사(進士)최호(崔浩)의 형이다.

중종 시대의 활동

1519년(중종 14)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다. 1525년(중종 20) 23세로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방목』)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어, 역사기록을 관장하였다. 1528년(중종 23)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로 옮기고,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는데, 이때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들어가서 설서(設書)와 사서(司書)를 역임하고, 1531년(중종 26)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고, 뒤이어 사간원 정언으로 옮겨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532년(중종 27)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을 때 대간(臺諫)에서 그가 탐오(貪汚)하다고 하여 세 차례나 서경(署經)하기를 거절하였으므로, 중종이 그를 체직시켰다. 대개 대간에서 3차례 서경을 거부하면, 체직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1533년(중종 28) 병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자, 사간원에서 또 아뢰기를, “병조 정랑최연은 전에 물의가 있었던 사람이므로, 정조(政曹)에 적합하지 않으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중종이 대답하기를, “최연이 전에 물의가 있었지만, 병조 정랑은 대간이나 승지와는 같지 않다.” 하고, 대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임명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 참고.)

중종 말엽에 척신(戚臣) 김안로(金安老)가 실권을 잡고 중종의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와 대립하여, 그 동생 윤원형(尹元衡) 일파를 탄압하였는데, 윤원형과 가까웠던 최연도 외직으로 쫓겨나서 단양 군수(丹陽郡守)가 되었다,(『중종실록』 참고.) 얼마 뒤에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고, 다시 홍문관으로 들어가서 교리(校理)가 되었다. 또 의정부의 검상(檢詳)을 거쳐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1637년(중종 32) 권신(權臣) 김안로가 문정왕후를 폐위시키려고 음모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고, 그에게 탄압을 받았던 사람들이 다시 중용되었다. 1638년(중종 33)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다. 1539년(중종 34) 5월 접반사(接伴使)소세양(蘇世讓)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명(明)나라 사신 시독(侍讀)을 맞이하였는데, 그가 문장에 능하다고 하여 특별히 차출되었던 것이다.(『중종실록』 참고.) 그해 전국에 흉년이 들자, 중종이 8도에 어사(御使)를 보내어 민폐(民弊)를 적간(摘奸)하였는데, 최연은 충청도 어사로 내려가서 충청도 빈민들을 구제하였다. 그 뒤에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使)를 거쳐, 홍문관에 들어가서 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하였다.(『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 권16 「자헌대부 한성부판윤 겸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최공연신도비명(資憲大夫 漢城府判尹 兼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 崔公演神道碑銘)」 참고. 이하 「비명」 약칭.) 얼마 뒤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으로 영전되었다가, 1544년(중종 39)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그해 말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겼다.

인종 · 명종 시대 대윤 · 소윤의 권력 투쟁

1544년 11월 30세의 인종이 즉위하였는데, 병약하여 그 외삼촌 윤임(尹任)이 정권을 잡고 사림파(士林派)의 선비를 많이 등용하였다. 1545년(인종 1) 1월 우부승지최연이 죽은 중종의 애책(哀冊)을 지었다.(『인종실록(仁宗實錄)』 참고.) 그가 지은 중종의 애책문(哀冊文)은 훌륭한 명문(名文)이라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처음에 중종은 장경왕후(章敬王后)를 맞아 1남 1녀를 두었는데, 인종과 효혜공주(孝惠公主)다. 장경왕후가 죽고 난 후, 중종은 문정왕후를 얻어 1남 3녀를 두었는데, 명종과 의혜공주(懿惠公主)·효순공주(孝順公主)·경현공주(敬顯公主)다. 인종의 누나 효혜공주는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와 혼인하였다. 중종 말년에 김안로가 정권을 잡고 세자 인종을 보호하려고, 문정왕후와 그의 동생 윤원형을 견제하자, 이때부터 윤임과 윤원형이 서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1545년 7월 인종이 왕위에 즉위한 지 8개월만에 병으로 승하하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명종의 어머니 문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었다. 명종이 즉위식을 사정전(思政殿)에서 거행할 때 좌의정유관(柳灌)이 대보(大寶: 옥새)를 받들고 나와서 명종에게 건네주었는데, 어린 명종이 이것을 받아서 좌승지최연에게 주었다.(『명종실록(明宗實錄)』 참고.) 이때 최연은 임금의 최측근으로서 어린 명종을 보필하였다.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은 중추부 사정순붕(鄭順朋)·호조 판서임백령(林百齡)·병조 판서이기(李芑)·공조판서허자(許磁) 등과 결탁하였다. 그해 8월 문정대비의 밀지(密旨)를 받았는데, 문정대비가 언문으로 쓰기를, “인종의 외숙 윤임과 좌의정유관·이조 판서유인숙(柳仁淑) 3인에게 죄를 주라.”고 하였다. 윤원형은 대비의 밀지를 대사헌민제인(閔齊仁)·대사간김광준(金光準)에게 전해 주면서, 대간에서 그들을 탄핵하도록 하였다. 다음날 양사(兩司)가 중학재(中學齋)에 모여서 회의하였으나, 사헌부 집의송희규(宋希奎), 장령정희등(鄭希登) 등과 사간원 사간박광좌(朴光佐), 헌납백인걸(白仁傑) 등이 극력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의정부에서 언관(言官)을 모두 죄를 주기가 어려워서, 백인걸만 구속하고, 집의송희규 등은 본직을 교체하였다.

한밤중에 윤원형이 백관을 충순당(忠順堂)에 소집하여, 소윤파의 정순붕·임백령·이기·허자 등이 윤임·유관·유인숙의 3인의 죄를 탄핵하였다. 좌찬성이언적(李彦迪)이 반대하기를, “일을 반드시 광명정대하게 처리해야 하는데, 장차 사림에게 화(禍)가 미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어린 명종 옆에 앉아 있던 문정대비가 화를 내면서, “사림에게 화가 생기는 것을 꺼려할 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고, 즉시 명령하여 윤임은 귀양보내고, 유관은 좌상에서 파면시키고, 유인숙은 이조판서에서 쫓아내도록 하였다. 윤임은 절도(絶島)에 안치(安置)되었고, 유관과 유인숙은 중도(中道) 부처(付處)되었다.(『동각잡기(東閣雜記)』 하권 참고.)

그러나 윤원형·유관·유인숙 3인은 인종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처형당하였고, 그 후에 대윤파의 정희등·나숙(羅淑)·박광우(朴光佑) 등 10여 명도 죽음을 당하였다.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이때 최연은 좌승지로서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하였을 뿐이었으나, 그 왕명은 사실상 문정대비의 명령이었고, 또 그때마다 그는 병조 판서이기와 상의하여 그의 의견대로 일을 처리하였다. 이기가 최연이 글을 잘 짓는다고 하여, 윤원형에게 최연을 추천하여, <을사사화> 뒤에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는 글을 최연에게 부탁하여 지었는데, 이 글로 인하여 후세 사림파가 득세하였을 때 최연은 소윤파로 몰려서 공신의 봉작과 품계를 모두 삭탈당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8월 도승지로 영전되었고, <을사사화>의 공신을 정하여 포상할 때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으로 동원군(東原君)에 봉해졌다. 또 문정대비가 병환이 나자, 최연은 약방(藥房) 제조(提調)로 극진히 그 병을 구료하였다. 대비가 회복되자 최연을 특별히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陞品)하였다.(『명종실록』 참고.) 이듬해 1546년(명종 1) 6월 최연은 공신 노비로서 승문원의 노비 2명을 마음대로 점탈하였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나라에서 공신에게 하사하는 노비는 대개 외방(外方)의 노비이므로, 사역하기가 불편하였기 때문이다. 대간의 탄핵을 피하여, 그 다음달 7월 그는 도승지를 사임하고,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한다고 핑계하고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다. 그러나 나라의 문필(文筆)을 담당하는 신하가 외방에 오래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정부에서 소환하니 그해 10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 참고.)

1547년(명종 2) 1월 병조 참판이 되었는데, 양사(兩司)에서 합동으로 아뢰기를, “송기수(宋麒壽)·최연 등이 조금도 공로가 없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인데, 그때 다만 승지였다고 하여 모두 훈적(勳籍)에 들어갔으니, 훈적에서 삭제하소서.” 하였다. 명종이 대답하기를, “이런 일이 있으면, 예로부터 승정원은 비록 자신의 공이 없을지라도 훈록(勳錄)에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고, 거절하였다.(『명종실록』 참고.) 여기서, 당시 좌승지최연은 도승지송기수와 함께 <을사사화>에서 소윤파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해 6월 병조 참판최연이 동지사(冬至使)로 임명되어 북경(北京)에 가게 되었는데, 그가 이기에게 부탁하여 명종에게 아뢰기를, “최연은 문필을 담당하는 사람이며, 늙은 어머니가 있습니다.”고 핑계하고, 사행(使行)을 면하였다. 그때 최연은 그해 9월 위사공신 회맹제(會盟祭)가 있는데 친공신(親功臣)으로 참여하는 자의 수가 적으니, 자신이 반드시 참여하여야 한다고 강변(强辯)하였다.(『명종실록』 참고.) 이를 보면, 그는 자기가 <을사사화>의 위사공신인 것을 스스로 자랑한 것 같다.

1547년(명종 2) 9월 정언각(鄭彦慤)이 양재역(良才驛)에 문정대비를 비난하는 벽서(壁書)가 나붙었다고 고변(告變)하였는데, 윤원형의 소윤파는 <을사사화> 때 살아남은 잔당(殘黨)을 그 배후로 지목하여, 송인수(宋仁壽)·백인걸 등을 체포하여 심문하였다. 송인수 등은 처형하고, 백인걸 등은 먼 변방으로 유배보냈다. 이때 좌찬성이언적도 그 배후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 병조 참판최연은 <양재역 벽서 사건>을 국문하는 데 참여하여,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하여 동원군에 봉해지고, 그해 10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명종실록』 참고.)

이듬해 1548년(명종 3) 6월 한성부판윤으로서 의금부 지사(知事)를 겸임하였고, 『무정보감(武定寶鑑)』을 편찬하였다. 그해 8월 중추부 지사가 되어 상호군(上護軍)변명윤(邊明胤)과 함께 동지사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에 갔다. 이듬해 겨울철에 북경에서 돌아오다가 추위에 병이 나서, 1549년(명종 4) 2월 4일 미쳐 복명(復命)하지 못한 채 평양부(平壤府)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47세였다. 그가 죽은 지 60년 뒤에, 허균(許筠)이 지은 그의 비명(碑銘)에서 “최연이 1546년 병오년에 죽었다.”는 기사와,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서 홍문관 제학을 겸임하였다.”는 기사는 잘못된 것이다.(「비명」 참고.)

사장파의 문장가

최연은 사장파(詞章派)의 뛰어난 문장가(文章家)였다. 중종 말년에 그가 사명(詞命)을 짓는 일을 오래 관장하여, 조정의 중대한 문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가 홍문관 대제학(大提學)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에 중종과 인종이 잇달아 승하하여 나라에 글을 지을 일이 많았다. 기재(企齋)신광한(申光漢)이 대제학이 되어 글을 짓는 일에는 반드시 최연을 추천했으므로, 두 임금의 애사(哀詞)·시장(諡狀)·반사(頒賜) 등의 글은 모두 최연이 지었다. 중종의 애책은 글이 매우 아름답고 수려하여 당시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신광한이 여러 번 상소를 올려 대제학의 자리를 사양하고 최연에게 넘겨주려고 하였다. 최연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도중에 중년의 나이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광한은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비명」 참고.) 1528년(중종 23) 11월 최연이 예문관 검열로 있을 때 중종이 친히 백관들에게 시(詩)·부(賦)를 시험하였는데, 그가 1등을 차지하자 중종이 특별히 만든 활 1정(丁)을 내려주었다.(『중종실록』 참고.)

1539년(중종 34) 2월 도승지황기(黃琦)가 아뢰기를, “원접사소세양이 필선최연을 종사관으로 삼자, 주상께서 세자시강원 필선의 책임이 중하므로, 최연의 종사관을 체직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종사관은 반드시 문장에 능한 자로 삼아야 하는데, 원접사소세양이 지금 바로 길을 떠나야 하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중종이 전교하기를, “지금 중국 사신이 올 때가 임박하였으므로 종사관을 교체할 수 없다.” 하고 최연을 소세양의 종사관으로 보냈다.(『중종실록』 참고.) 퇴휴(退休)소세양이 젊은 최연을 천거하여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종사관으로 삼아서 사신을 맞이하여 접대하였는데, 이때 서로 시를 지어서 화답하는 일이 많았다. 명나라 사신 시독이 매일 수십 편의 어려운 운자(韻字)를 시제(詩題)로 냈으나 대편(大篇)의 시를 짓거나, 여러 가지 문체를 구사하는 일을 최연이 모두 감당하였다. 그때마다 최연이 말 위에서 바로 글을 지어 올렸는데, 그 시의 말과 뜻이 모두 아름다웠으므로, 퇴휴소세양이 매우 감탄하여 칭찬하였고, 명나라 사신도 그의 재주를 칭찬하고 특별히 우대하였다.(「비명」 참고.)

성품과 일화

『명종실록』최연의 졸기(卒記)에서 사관(史官)이 그를 평하기를, “최연은 천성이 총명하고 글주가 있어 모두 그가 문형(文衡)을 맡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경솔하고 조행(操行)이 없어서 탐욕이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는데, 친족들을 돌보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야박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였다. 또 다른 사신(史臣)의 논평에서는 “최연의 사람됨이 가볍고 천박하다. 탐오하고 마음속에 주관이 없어서 모든 송사(訟事)의 처리는 모두 뇌물의 양에 따라서 처리하였다. 최연이 이기에게 아첨하고 섬겨서 서로 뜻이 맞았는데, 이기는 언제나 최연이 ‘글을 잘 한다’고 칭찬하였다. 최연이 공신의 녹권(錄券)에 참여하자, 대간에서 여러 차례 탄핵하였으나, 이기가 그를 아끼고 감싸 주었기 때문에 그 의논이 끝내 중지되었다. 최연이 명나라 북경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을 적에도 이기가 그를 사신으로 보내지 말도록 임금에게 아뢰어, 사신으로 가지 않게 되었다. 최연이 이기에게 아첨하는 꼴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겼다.” 하였다. 이 글은 사림파의 사관(史官)들이 쓴 논평이므로, 악평(惡評)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명종실록』 참고.)

<을사사화> 때 윤임·유관·유인숙 3인을 귀양보낸 다음에 그들이 죄를 지은 사실을 중외에 효유하는 글을 좌승지최연이 지었다. 그 글에서 “역당(逆黨)은 모두 시서(詩書)에서 일어났다.”고 하니, 그때 회재(晦齋)이언적이 최연에게 이르기를, “이처럼 효유를 분명하게 하였으니, 그대는 녹훈(錄勳)에 참여하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겠다.” 하였으나, 최연은 그래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도리어 잘난 체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모두 비웃었다.(『명종실록』 참고.) 그때 좌찬성이언적도 좌승지최연과 같이 어쩔 수 없이 <을사사화>에 휘말려서 두 사람이 모두 위사공신 3등에 책훈되었다.

1534년(중종 29) 2월 강릉부사(江陵府使)허광(許礦)이 강릉의 임소(任所)에서 죽었는데, 나라에서 강릉 출신 최연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사제관(賜祭官)최연은 강릉에 도착해서 강릉의 자기 부모를 찾아뵙고, 그대로 본가에서 유숙하고, 제삿날 아침에 곧바로 빈소(殯所)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허광의 아들 허정(許淨)은 전날 밤에 최연이 술을 마시고 기생과 놀면서, 재계(齋戒)하지 않았다고 하여, 화를 내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영접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문을 닫고 집에 들이지도 않았다. 당황한 최연이 그 다음날 찾아가서 굳이 간청하여 겨우 구차스럽게 제사를 지냈다.

최연과 허정은 강릉 사람으로 평소 서로 친구로 사귀었고, 같은 해에 생원이 되었다. 허정은 그 형 허순(許淳)이 2품 관직에까지 오를 만큼 명문 집안이었으나, 대과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연은 한미한 집안이지만, 문과에 급제하여 출세하였다. 그로부터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으므로 허정이 화를 내어 친구 최연의 사제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사헌부에서 탄핵하기를, “허정이 사명(使命)을 거역하고 모욕한 것은, 대단히 고약한 짓입니다. 최연은 명을 받든 사신으로서 왕명을 욕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제멋대로 날짜를 연기하여 제사를 지내고, 집사(執事)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니, 그 잘못이 매우 큽니다. 모두 함께 추문(推問)하소서.” 하니, 중종이 모두 하옥(下獄)하여 심문하게 하였다.(『중종실록』 참고.)

시호와 추증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1549년(명종 4) 그가 평양에서 객사하자, 조정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관에서 그의 장례를 치러주고, 좌찬성 겸 대제학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그러나 30여 년 뒤에 사림파가 득세하자, 1577년(선조 10) 조정에서 그의 공훈의 봉작을 회수하고, 추증한 벼슬과 품계를 삭탈하였으나, 그 나머지는 그대로 두었다. 허균이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 권16 「자헌대부 한성부판윤 겸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최공연신도비명(資憲大夫 漢城府判尹 兼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 崔公演神道碑銘)」)

첫째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인데 이옹(李*)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김씨(金氏)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사직(司直)을 지냈다. 손자 둘은 모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증손자는 네 명인데, 그 중에 최용(崔瑢)은 진사이다.(「비명」 참고.)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기재잡기(寄齋雜記)』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동각잡기(東閣雜記)』
  • 『송계만록(松溪漫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
  • 『해동역사(海東繹史)』
  • 『송재유고(松齋遺稿)』
  • 『무릉잡고(武陵雜稿)』
  • 『입암집(立巖集)』
  • 『양곡집(陽谷集)』
  • 『금호유고(錦湖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