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인경(尹仁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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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76년(성종 7)∼1548년(명종 3) = 73세.] 조선 중기 연산군~명종 때 활동한 문신. 영의정(領議政)을 지냈고, 봉호는 파성 부원군(坡城府院君)이다. 자는 경지(鏡之)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부사정(副司正)윤구(尹)이고, 어머니 진주 유씨(晋州柳氏)는 유종(柳琮)의 딸이다. 부사(府使)윤계흥(尹繼興)의 손자이고,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윤석(尹晳)의 조카이다.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504년(연산군 10) 나이 2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생원과(生員科)과 진사과(進仕科)의 양과에 모두 합격하였다. 1506년(연산군 12) 나이 31세 때 별시(別試)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성균관(成均館)학록(學錄)에 임명되었다가, 예문관에 들어가서 검열(檢閱) · 봉교(奉敎)로 차례로 승진되었다.[『호음잡고(湖陰雜稿)』 권7 「유명조선국 추성협익정난위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령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파성부원군 윤공 묘지명(有明朝鮮國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坡城府院君 尹公墓誌銘)」 이하 「윤인경 묘지명」으로 약칭] 그 뒤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서, 예조 좌랑(佐郞)과 병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1511년(중종 6)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서, 1513년(중종 8)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승진하였다. 1514년(중종 9)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정랑(正郞)을 거쳐서, 장악원(掌樂院)첨정(僉正)으로 승진되었다. 어버이를 봉양하려고 자청해서 태안 군수(泰安郡守)로 나갔는데, 치적(治績)이 뛰어나서, 고과(考課)에 여섯 번이나 연달아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호음잡고』 권7 「윤인경 묘지명」]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서 조광조(趙光祖)의 사림파(士林派) 관료들이 모두 숙청되자, 1520년(중종 15) 사간원 사간으로 등용되었다가 다음해까지 사간과 사헌부 집의(執義) 번갈아 역임하였다.[『중종실록』중종 15년 7월 2일, 중종 16년 11월 9일, 중종 15년 10월 16일, 중종 17년 10월 17일] 1523년(중종 18)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바로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중종실록』중종 18년 2월 1일 · 2월 18일] 이어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겼다.[『중종실록』중종 18년 윤4월 22일 · 7월 14일] 1524년(중종 19) 예조 참의(參議)를 거쳐서,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며, 1525년(중종 20)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중종실록』중종 19년 8월 26일 · 9월 14일, 중종 10년 1월 17일] 1526년(중종 21)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임명되었고, 1528년(중종 23) 우승지 · 좌승지를 거쳐서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중종실록』중종 21년 1월 27일, 중종 23년 4월 9일 · 8월 12일, 중종 24년 1월 13일] 그가 승정원의 도승지로 있을 때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중종은 오히려 그를 특별히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하였다.[『중종실록』중종 24년 8월 25일]

1530년(중종 25)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1531년(중종 26) 중추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중종실록』 25년 12월 6일, 중종 26년 6월 18일] 그해 가을에 중국에 동지를 하례하는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다음해 1532년(중종 27) 돌아왔고 이어 예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중종 26년 8월 11일, 중종 27년 1월 16일 · 2월 2일, 『호음잡고』 권7 「윤인경 묘지명」] 1532년(중종 27)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흉년이 심한 경상도 지방의 기민(饑民)을 진휼(賑恤)하였다.[『중종실록』중종 27년 3월 3일] 1533년(중종 28)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참판이 되었고, 또 형조 판서로 승진되었다.[『중종실록』중종 28년 7월 19일 · 9월 21일 · 10월 11일] 1535년(중종 30) 호조 판서가 되었고, 예조 판서를 거쳐서, 1537년(중종 32) 호조 판서에 이어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중종 30년 2월 18일 · 7월 1일, 중종 31년 3월 11일, 중종 32년 8월 5일 · 9월 29일 · 10월 29일] 이때 <기묘사화> 때에 억울하게 죄를 받아서 귀양 간 사림파 인재들을 다시 중용하였는데, 이는 중종 자신이 잘못 판단하여 조광조 등 많은 사림파의 인재들을 죽이거나, 몰아낸 것을 후회하였기 때문이다. 1539년(중종 34) 호조 판서가 되었다가 이어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을 거쳐 병조 판서가 되었으며 1540년(중종 35)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중종 34년 2월 2일 · 6월 15일 · 12월 20일, 중종 35년 8월 27일] 중종 말년에 5년 동안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의 대윤(大尹)과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소윤(小尹)의 세력 다툼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면서 중종을 보필하였다.

인종∼명종 시대 활동

1545년(인종 1) 인종이 즉위하면서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되었고, 곧 이어 영의정으로 발탁되었는데 여기서 그가 윤임의 대윤(大尹)에 가까웠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윤인경은 윤임과 함께 사람파 유학자를 많이 등용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는데, 그는 병조의 책임자를 불러서 의금부(義禁府)의 병력을 나누어 명종의 사저(私邸)로 보내 호위하도록 하고, 친히 명종의 사저로 찾아가서 명종을 맞아들여 그 날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보익공신(保翼功臣) 1등에 책훈되고, 파성 부원군(坡城府院君)에 봉해졌다.[『호음잡고』 권7 「윤인경 묘지명」] 1547년(명종 2) 그는 고령이라고 칭탁하고 벼슬에서 물러가서 여생을 보내게 해 달라고 요청하니, 명종이 허락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윤인경은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고, 윤원형의 소윤 일파가 지배하는 조정에 벼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548년(명종 3) 그는 영의정에 홍언필(洪彦弼)을 추천하고, 스스로 좌의정으로 물러났다. 그해 1548년(명종 3) 7월 19일 노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3세였다.[『명종실록』명종 3년 7월 19일 「윤인경 졸기」]

성품과 일화

윤인경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호음잡고』 권7 「윤인경 묘지명」]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영특하고, 그 모습이 의연(依然)하였다. 평생 동안 아무리 위급한 때를 당하더라도 황급하게 말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대하거나 아래 사람을 거느릴 때에는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너그럽고 온화하게 대하였다. 남의 선행(善行)을 보면 반드시 칭찬하고, 남의 부족한 점을 보면 충고해 주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환심을 얻었다. 그러므로 대윤과 소윤의 환심을 모두 사서, <을사사화> 때 죽음을 면할 수가 있었다. 나라의 일을 맡아서 처리할 때에는 대체(大體)를 지키면서도 미세한 부분까지 잘 살펴보았고, 의심스러운 일을 결정하는 때에는 신념이 확고하여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조정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신뢰하여 믿고 따랐다. 일찍이 옛 성현(聖賢)의 격언(格言) 수십 조목을 뽑아서 써서 자기 주위에 놔두고 자기를 성찰하는 자료로 삼았다. 평소에도 반드시 옷을 바르게 입고 반듯이 앉아서, 나태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처사(處事)도 바르고 가지런하게 하였다.

선대 조상(祖上)을 추모하고 제사를 지낼 때에 정성을 다하였고, 아침저녁으로 사당(祠堂)에 문안을 드렸는데, 비록 바쁜 일이 생기더라도 이것을 거르지 않았다. 그가 일찍이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태안 군수로 나갔다가, 부친 상(喪)을 당하였는데, 반장(返葬)할 때에 태안에서 서울까지 말을 타지 않고 발로 걸어서 관(棺)을 모시었으며, 집상(執喪)할 때에도 역시 구차스럽게 하지 않았으며, 집안 친척들을 아끼고 돌보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효성과 우애가 많다고 일컬었다.[『명종실록』명종 3년 7월 19일 「윤인경 졸기」]

1537년(중종 32) 척신(戚臣) 김안로(金安老)가 문정왕후를 축출하려고 기도하다가 실패하여 사사(賜死)되고 그 일파가 제거되자, 1538년(중종 33) 중종은 인사 행정을 쇄신하려고, 윤인경을 이조 판서로 임명하여, <기묘사화> 때에 억울하게 죄를 받아서 유배당한 사림파 인재들을 다시 등용하게 하였다. 윤인경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사이에서 조광조의 사림파를 두둔하던 사람이었다. 중종은 나이가 들면서 과거 자신이 잘못 판단하여 조광조 등 많은 사림파의 인재들을 죽이거나, 몰아낸 것을 후회하였다. 중종은 <중종반정> 때 자기 자신을 옹립한 박원종(朴元宗) · 성희안(成希顔) 같은 공신(功臣)의 세력을 도저히 제압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전반기에는 조광조의 사림파를 특별히 등용하고, 후반기에는 김안로를 특별히 중용하여, 원종공신의 세력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효성(孝成)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송산리(松山里)에 있는데, 호음(湖陰)정사룡(鄭士龍)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호음잡고(湖陰雜稿)』 권7 「유명조선국 추성협익정난위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령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파성부원군 윤공 묘지명(有明朝鮮國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坡城府院君 尹公墓誌銘)」]

첫째 부인 우봉 김씨(牛峰金氏)는 현감(縣監)김지수(金之壽)의 딸이고, 둘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진안 부정(鎭安副正) 이영남(李永男)의 딸인데, 모두 후사가 없다. 종형(從兄) 윤인복(尹仁服)의 아들 윤현(尹俔)을 양자로 삼았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대동야승(大東野乘)』
  • 『견한잡록(遣閑雜錄)』
  • 『고봉집(高峯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동각잡기(東閣雜記)』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사집(白沙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석담일기(石潭日記)』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유천차기(柳川箚記)』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점필재집(佔畢齋集)』
  • 『조천기(朝天記)』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역사(海東繹史)』
  • 『남계집(藍溪集)』
  • 『일두집(一蠹集)』
  • 『우정집(憂亭集)』
  • 『묵재집(默齋集)』
  • 『충재집(冲齋集)』
  • 『기재집(企齋集)』
  • 『규암집(圭菴集)』
  • 『회재집(晦齋集)』
  • 『입암집(立巖集)』
  • 『범허정집(泛虛亭集)』
  • 『면앙집(俛仰集)』
  • 『퇴계집(退溪集)』
  • 『금호유고(錦湖遺稿)』
  • 『추파집(秋坡集)』
  • 『유헌집(游軒集)』
  • 『미암집(眉巖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지퇴당집(知退堂集)』
  • 『목재집(木齋集)』
  • 『노봉집(老峯集)』
  • 『지호집(芝湖集)』
  • 『명곡집(明谷集)』
  • 『학암집(鶴巖集)』
  • 『강한집(江漢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야계집(倻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