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휼(賑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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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질병, 재해 등으로 굶주리는 백성들을 돌보고 구제하는 것.

개설

진휼(賑恤)은 조선시대 민간 구휼 정책 중 하나이다. 흉년이나 재난을 만나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는 데 쓰는 쌀을 진휼미(賑恤米)라 하고 진휼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관청과 관원을 각각 진휼청, 진휼사라 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진휼에 관해서는 이미 1392년(태조 1) 태조의 즉위 교서에 명시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환과고독(鰥寡孤獨)은 왕정(王政)으로서 먼저 할 바이니 마땅히 불쌍히 여겨 구휼해야 될 것이다. 소재 관사(官司)에서는 그 굶주리고 곤궁한 사람을 진휼하고 그 부역을 면제해 줄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이는 평시에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자들과 춘궁기의 기아자들을 보호, 관리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비상시, 즉 흉년이나 전염병의 만연으로 곤궁해진 사람들을 위해서도 진휼 정책이 행하여졌다.

태종 때에는 경창(京倉)을 열어 기민을 구제하였다는 내용이 있고 세종대에는 환자곡(還上穀)을 진휼에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초기에는 대체로 의창(義倉)의 진제하는 선례대로 진휼미를 배분하였다. 진휼을 관리하던 진휼청은 1511년(중종 6)에 설치하였으며 1512년(중종 7)에는 도성 밖 동·서에 진제장(賑濟場)을 두어 지방에서 올라오는 기민과 병자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일을 보다 용이하게 하였다.

내용

진휼의 구체적인 업무는 진휼청의 절목이 반포된 1541년(중종 36)의 『조선왕조실록』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진휼청의 절목 중 실질적인 진휼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중종실록』 36년 5월 14일).

○ 각 도에서 임직 기한을 채워 개만(箇滿)한 수령들은 바야흐로 흉년이 든 때 맞이하고 보내는 데에 폐단이 있으니, 가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체직하지 말 것.

○ 올해 가물어 흉년 드는 것은 각 도가 한결같으므로 진구(賑救)할 곡식을 다른 데에서 옮겨 올 곳이 없다. 재해를 입은 각 고을은 경내의 부유하여 곡식을 많이 저축한 집을 그 고을의 수령이 상세히 적발하여 그 집에서 먹을 곡식은 충분하게 남겨 두고 그 나머지 수량을 적어서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위에 아뢰었다가, 관가 창고의 곡식이 모자라거든 백성을 불러 고르게 나누어 주고, 가을 곡식이 익거든 공채(公債)의 규례에 따라 수령이 단속하여 본 주인에게 돌려주되, 호조를 시켜 치부(置簿)하였다가 해유(解由) 때에 참고하며, 적발되는 것을 꺼려서 나누어 숨기는 곡식 임자와 받아 쓴 뒤에 갚지 않는 자는 감사를 시켜 추고하여 죄를 다스릴 것.

○ 농사를 그르친 각 고을의 굶주린 백성에게 지금부터 공채를 나누어 주면 많지 않은 창고의 곡식이 지탱하기 어려운 형세이나, 가난이 더욱 심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는 관가에서 진구하지 않으면 유랑하다가 굶어 죽게 될 것이니, 각 고을의 수령이 몸소 점검하여 장년·노년·어린아이를 분간하여 쌀·콩·염장(鹽醬) 따위의 물건을 절약하여 나누어 주어 유랑하다가 굶어 죽지 않게 할 것.

진휼청 외에도 각 지방의 진휼 사항을 관리, 감독하기 위한 임시 관원을 진휼사라 하였다. 진휼사는 1437년(세종 19)에 처음 파견한 기록이 있다. 진휼사의 구체적인 업무는 당시 진휼사를 차정하면서 내린 사목에 자세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세종실록』 19년 1월 13일).

○ 각 관에서 마음을 써서 구휼하지 아니하여 주린 백성으로서 나와서 먹는 자가 적고, 비록 오는 자가 있더라도 죽게 하였다는 죄를 면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물리쳐서, 이로 인하여 얼고 주리어 목숨을 잃는 자가 매우 많으니, 도내의 계수관(界首官)과 초면(初面)의 천안 등처에 따로 진제장을 설치하고 쌀죽과 황각채(黃角菜)와 미역 등물을 주되, 직책이 있는 자를 택하여 그 일을 맡게 해서 식구를 계산하여 절용(節用)하고, 또 승도 중에 자비심이 있는 자를 택해서 그 삶고 익히는 것을 위임하여 조석으로 진휼 공급하게 하고, 그 승도의 식량은 역시 서울 안의 진제하는 중의 예에 의하여 줄 것.

○ 이 봄추위를 당하여 주린 백성이 얼어 죽을 염려가 있으니, 인구의 다소에 따라서 움집[土宇]을 설치하고 짚을 깔아서, 옷을 얇게 입은 자와 늙은이·어린아이와 병이 있는 자로 하여금 들어가 거처하게 하여 구료할 것.

○ 유리하여 옮겨 간 사람의 집을 부셔 버리거나 혹은 그들이 심어 놓은 밀과 보리를 캐는 자가 있으니, 이웃과 마을 사람으로 하여금 간수(看守)하여 금지하게 할 것.

○ 감고(監考)와 색장(色掌) 등이 동리 안에 비록 얼고 주리어 굶어 죽은 자가 있어도 곧 수령에게 달려가 고하지 않고, 수령이 비록 알았더라도 시기를 어기고 구휼하여 생명을 잃게 하고 추핵(推覈)할 때를 당하여 그 죄를 면하려고 숨기고 고하지 않으니, 이와 같은 감고와 색장은 등수(等數)를 가하여 논죄하고, 수령은 죄를 결단한 뒤에 사연을 갖추어 계문하고, 직급을 낮추어 환임(還任)시키며, 흉년을 구제하는 데에 특이하게 공효를 이룬 자가 있으면 자급(資級)을 올려 줄 것.

○ 구황이 박절(迫切)한데 조건이 미진하면 편의대로 시행한 뒤에 아뢰게 하라.

변천

진휼의 관리 관청인 진휼청은 1894년(고종 31)까지 약간의 변경을 거치면서 존속하였고, 1901년(고종 38)에는 진휼청의 전례에 의거하여 별도의 관청인 혜민원을 세웠다.

의의

진휼은 굶주리고 병들어 지친 서울과 지방 전체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국가가 이들의 생활고와 건강을 관리, 감독하였다는 측면은 오늘날 복지 행정의 차원에서 되새겨볼 수 있는 내용이다. 또한 세세한 절목과 사목 등에서 당대 구휼 업무의 철저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김종찬, 「조선조 구빈제도의 사회복지적 성향에 관한 연구 -현대 공적부조제도와 관련하여-」,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원보영, 「조선후기 지역 민간의료체계의 발전사」, 『국사관논총』107, 2005.
  • 최창무, 「조선왕조 전기 구빈제도에 관한 연구」, 대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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