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세창(成世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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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1년(성종12)∼1548년(명종3) = 68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번중(蕃仲), 호는 돈재(遯齋)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예조 판서성현(成俔)의 아들이고, 어머니 한산이씨(韓山李氏)는 상례(相禮)이숙(李塾)의 딸이다. 도승지성염조(成念祖)의 손자이고, 한훤당(寒暄堂)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01년(연산군7)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2)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어, 저작(著作) · 박사(博士)로 승진되었고,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1509년(중종4) 이조 정랑이 되었으나 인사를 불공정하게 하였다고 하여 서반(西班)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에 동반(東班)으로 복직되어 삼사(三司)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사간원 헌납(獻納) · 홍문관 교리(校理) · 사헌부 집의(執義) 등을 거쳐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어,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을 겸임하였다. 1517년(중종12)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으로 있을 때 조광조(趙光祖) 등이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려 하자, 그 폐단을 지적하고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날 즈음에 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절친한 친구 충암(冲庵)김정(金淨) · 음애(陰崖)이자(李耔) 등에게 조심하도록 당부하고, 자기 자신은 병을 핑계로 파주의 별장에 은거하여 화를 면하였다. 1521년(중종16) 다시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 이어서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주문사(奏聞使)로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고, 중추부 동지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정광필(鄭光弼)이 영의정이 되자, 이조 참판에 임명되어, <기묘사화> 때 쫓겨났던 사림파(士林派)의 인사들을 다시 등용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530년(중종25)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으로 있을 때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를 탄핵하다가 도리어 강원도 평해(平海)에 유배되었으나 1537년(중종30) 김안로가 숙청되자 귀양에서 풀려났다. 한성부 우윤(右尹)을 거쳐, 형조 판서 · 이조 판서를 역임하고,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판서로 전임하였다. 중추부 동지사를 거쳐, 다시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1544년(중종39) 예조 판서 · 호조 판서를 역임하고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하였다.

인종 · 명종 시대 활동

1545년(인종1) 인종이 즉위하자,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어,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던 도중에 좌의정에 영전되어, 중추부 판사 · 경연 영사 등을 겸임하였다. 그해에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서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실권을 잡고,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 일파를 숙청하였다. 인종은 원래 학문을 좋아하여 사림파를 많이 등용하였으므로, 윤임의 대윤(大尹)은 사림파와 손을 잡았는데, 윤원형의 소윤(小尹)은 대윤을 몰아내면서 많은 사림파의 인물을 처형하거나 귀양을 보냈다. 성세창도 좌천되었다가, 황해도 장연(長淵)으로 귀양을 갔는데, 1548년(명종3) 1월 28일 노병으로 유배지에서 죽으니, 향년이 68세였다.

학식과 문장이 뛰어나서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았다. 글씨의 필법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림과 음악에도 정통하여, 당시 그를 ‘3절(三絶)’이라고 불렸다.

저서로는 『돈재집(遯齋集)』 , 『식료찬요(食療纂要)』가 남아 있다. 또 글씨로는 파주의 성여완의 묘갈(「성이헌여완갈(成怡軒汝完碣)」), 광주(廣州)의 정광보의 묘비(「부사정광보묘비(府使鄭光輔墓碑)」), 이수언의 묘비(「이집의수언묘비(李執義粹彦墓碑)」), 파주의 성세명의 묘비(「성지사세명묘비(成知事世明墓碑)」), 용인의 정몽주의 묘갈(「정포은갈(鄭圃隱碣)」), 홍주의 민휘의 묘비(「민대사헌휘비(閔大司憲暉碑)」), 익산의 소자파의 묘표(「소자파표(蘇自坡表)」)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성세창의 자질과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자질이 영특하고 뛰어났다. 도량이 크고 넓어서 호탕하고 진솔하였으며, 굳은 의지로 자신을 다스렸다. 관직에 있을 때는 험한 일을 회피하지 않았으며, 이익에 구속되지 않았고, 자기 자신에게 어려움이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피하지 않으면서 시종 다른 사람과 화합하여 도왔으므로 큰 치적(治績)을 이룰 수 있었다. 또 학식이 뛰어나고 문장이 전아(典雅)해서, 오랫동안 홍문관에 있으면서, 문형(文衡) 맡아 선비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성세창은 한훤당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업하면서, 김정 · 이자와 사이가 좋았다. 그는 언제나 그들에게 성질이 너무 날카롭고 일에 너무 민첩하다고 경계하였는데, 그들은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파주(坡州) 별장에서 병을 조리한다고 핑계하고 은거하여 화를 면하였다.

1548년(명종3) 정월 적소(謫所)에서 죽을 때 병이 위독해지자,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덕이 적은데도 지위가 높아 재앙을 불러들였다. 달이 차면 기울어진다는 말은 참으로 진리이다. 다만 죽을 때 자신을 반성하여 마음에 조금이라도 후회가 없다면 죽어도 유감이 없는 것이다.” 하고 운명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의 장포(長浦) 남쪽 마을의 선영에 있는데, 둘째 부인과 합장하였다. 첫째 부인의 친정 조카 이식(李拭)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선조 때에 신원(伸寃)이 이루어져서 복작되었다. 첫째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장양부정(長陽副正)이주(李*)의 딸이고, 둘째 부인 고성이씨(固城李氏)는 참판이육(李陸)의 딸이다.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1남을 두었는데, 아들 성해(成諧)는 사마시(司馬試) 합격하여, 양성현감(陽城縣監)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견한잡록(遣閑雜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기재잡기(寄齋雜記)』
  • 『동각잡기(東閣雜記)』
  • 『미수기언(眉叟記言)』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완당집(阮堂集)』
  • 『용재총화(慵齋叢話)』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