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집(沈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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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9년(선조 2)~1644년(인조 22) = 76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예조 판서(判書)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지냈다. 자는 자순(子順)이고, 호는 남애(南崖)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목사(牧使)심우정(沈友正)이고, 어머니 광릉 안씨(廣陵安氏)는 목사(牧使)안여경(安汝敬)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선공감(繕工監)첨정(僉正)을 지낸 심자(沈鎡)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낸 심달원(沈達源)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96년(선조 29) 정시(庭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방목(榜目)』]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가주서(假主書)를 역임하였고,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 홍문관(弘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예문관(藝文館)대교(待敎)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30년 9월 12일, 선조 31년 7월 4일, 선조 31년 7월 14일] 이 무렵 명(明)나라의 찬획주사(贊畫主事)정응태(丁應泰)가 130여 년 전에 작성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근거로 조선이 그동안 일본과의 관계를 은폐하고 명나라를 우롱했으며, 일본을 끌어 들여 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을 침략하려 한다는 내용으로 만력제(萬曆帝)에게 참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선조실록』선조 31년 9월 21일] 이에 영의정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하여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헌국(李憲國),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윤돈(尹暾) 등이 더 이상의 오해가 생기기 전에 명나라 황제를 만나 정응태의 주장이 무고(誣告)라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선조실록』선조 31년 9월 24일] 이때 심집도 선조에게 서둘러 무고를 밝혀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선조실록』선조 31년 9월 24일]

그리고 1604년(선조 37) 그는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제수되었고, 이어 그해 예조 정랑(正郞)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7년 윤9월 26일, 선조 37년 10월 15일] 1605년(선조 38) 1월에는 사간원 정언(正言)을 역임하였으며, 그해 2월에는 예조 정랑이 되었다가, 4월에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8년 1월 27일, 선조 38년 2월 1일, 선조 38년 4월 1일,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65 「예조판서심공신도비명병서(禮曹判書沈公神道碑銘幷序)」 이하 「심집신도비명」으로 약칭] 이어 1606년(선조 39)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었고, 1607년(선조 40) 죽산부사(竹山府使)에 제수되었다.[『선조실록』선조 39년 3월 1일, 선조 40년 윤6월 27일, 「심집신도비명」]

광해군(光海君) 즉위 후 심집은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는데, 이듬해인 1609년(광해군 1) 사간원 정언유학증(兪學曾)이 조정(趙挺)과 구성(具宬)이 선조 때에 지은 죄를 이유로 들며 파직할 것을 청하는 일이 발생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즉위년 7월 2일, 광해군 즉위년 12월 22일, 광해군 1년 1월 4일] 광해군은 이미 선조 때에 해결된 일이라며 들어주지 않다가 유학증이 거듭 요청하자 결국 그들을 체차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1월 4일, 광해군 1년 1월 6일] 이때 심집도 유학증과 같은 의견이라고 하면서 사직하기를 청하였고, 결국 체차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1월 7일, 광해군 1년 1월 8일] 그리고 은계찰방(銀溪察訪)에 임명되었는데, 일처리에 노련하고 본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1월 11일, 광해군 2년 11월 22일]

이후 해운판관(海運判官)과 양호조도사(兩湖調度使), 군자감(軍資監)정(正)을 역임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4년 6월 6일, 광해군 6년 5월 17일, 광해군 6년 8월 24일] 그리고 1615년(광해군 7) 5월 인정전(仁政展)에서 치러진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광해군에게 아마(兒馬) 1필을 하사받았다.[『광해군일기』광해군 7년 5월 15일, 광해군 윤8월 5일] 이어 고령현감(高靈縣監)과 접위관(接慰官)을 거쳐, 1617년(광해군 9) 1월 성균관 사예(司藝)가 되었다가 성균관 사성(司成)에 제수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7년 10월 14일, 광해군 9년 1월 8일, 광해군 9년 1월 26일, 광해군 9년 3월 26일] 그리고 그해 4월에는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이 되었으며, 이어 8월에는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9년 4월 25일, 광해군 8월 12일]

1619년(광해군 11) 그가 의정부 사인으로 있던 그해 3월부터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을 겸하였으며, 9월에는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1년 2월 23일, 광해군 11년 광해군 3월 13일, 광해군 11년 9월 11일] 한편 그는 이듬해인 1620년(광해군 12) 의정부 사인으로 있을 때 동료들과의 상의 없이 친한 사람을 천거한 것이 문제가 되어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추고 당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12년 1월 9일, 광해군 12년 1월 10일] 이후 그는 도청(都廳)으로서 경덕궁(慶德宮)의 축성을 담당하였으며, 1622년(광해군 14) 오랫동안 궁 건설을 감독한 공로를 인정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고, 영건도감(營建都監)부제조(副提調)에 제수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2년 2월 23일, 광해군 14년 3월 9일]

인조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심집은 병조 참지(參知)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선혜청(宣惠廳)과 재생청(裁生廳)도 겸직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년 3월 19일, 인조 1년 4월 5일, 「심집신도비명」]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그는 어가를 공주(公州)로 호위하였는데, 이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으며, 이어 여주목사(驪州牧使)와 판결사(判決使)를 역임하였다.[「심집신도비명」]

그러던 가운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생하였다. 이에 심집은 인조를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난을 갔으며, 아울러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겸하였다.[「심집신도비명」] 이때 윤훤(尹暄)이 전세를 불리하게 하였다는 죄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사형되었는데, 그 효시(梟示)를 밤이 깊은 뒤에 하였다는 이유로 인조는 의금부 당상(堂上) 등을 잡아들였으며, 심집도 삭직(削職)시켰다.[『인조실록』인조 5년 2월 15일, 인조 5년 2월 16일] 그러나 이후 심집은 조선과 연계하여 후금을 공격하기 위하여 평안도 가도(椵島)에 진을 치고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접반사(接伴使)가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3년 7월 26일, 『인조실록』인조 6년 8월 20일, 『계곡집(谿谷集)』 권22 「노정주본(虜情奏本)」] 모문룡은 1622년(광해군 14) 조선에 들어온 이래로 조선에 군량을 강요하고, 조공무역에 세금을 매겨 폭리를 취하는 등 전횡을 일삼아서 문제가 되고 있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4년 1월 4일, 『인조실록』인조 3년 1월 3일] 이때 심집이 접반사로서 모문룡의 부장진계성(陳繼盛)의 도움을 받아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인조실록』인조 6년 8월 20일, 「심집신도비명」] 그리고 그해 12월 심집은 특별히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1629년(인조 7) 1월에는 도승지가 되었다가 6월에는 형조 판서로 임명되었다.[『인조실록』인조 6년 12월 25일, 인조 7년 1월 18일, 인조 7년 6월 2일, 「심집신도비명」] 이어 12월에는 부모의 공양을 위하여 부모가 있는 근처의 수령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여 안변부사(安邊府使)가 되었다.[『인조실록』인조 7년 12월 15일]

1633년(인조 11) 심집은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고, 1645년(인조 13)에는 공조 판서가 되었으며, 곧이어 이듬해인 1646년(인조 14) 1월에는 다시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인조실록』인조 11년 2월 13일, 인조 13년 12월 25일, 인조 14년 1월 12일] 이후 그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는데, 유백증이 적절하지 않은 인사라고 탄핵하였으나 인조가 이를 들어주지 않았으며, 그해 8월 또 다시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인조실록』인조 14년 6월 8일, 인조 14년 8월 14일] 한편 그해 겨울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청(淸)나라와의 휴전 교섭에 심집과 왕족인 능봉군(綾峰君)을 각각 대신과 인조의 동생으로 위장하여 참석시켰다.[『인조실록』인조 14년 12월 15일, 『인조실록』인조 14년 12월 16일] 그러나 이들이 가짜인 것이 탄로나면서 휴전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고, 전쟁이 끝난 후 이 책임을 물어 1648년(인조 16) 심집은 문외출송(門外出送)되었다가, 그해 12월 대사령(大赦令)으로 석방되었다.[『인조실록』인조 14년 12월 16일, 인조 15년 2월 12일, 인조 15년 12월 11일, 인조 16년 2월 10일, 인조 16년 12월 17일] 그리고 이듬해인 1639년(인조 17) 호종공신(扈從功臣)에 추록되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으며, 1640년(인조 18)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인조 18년 4월 18일, 「심집신도비명」] 1644년(인조 22) 9월 26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6세였다.[『인조실록』 22년 10월 1일]

성품과 일화

심집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효심이 깊어 어머니의 연세가 들자, 둘째 형 심현(沈誢)과 함께 동거하면서 봉양하였는데, 밤에도 형제가 번갈아가며 일어나 어머니의 안후를 보살폈으며, 명절이나 좋은 일이 있을 때 모든 물건을 구비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형제가 머리가 허옇게 센 나이에도 함께 예제(禮制)를 다했고, 제사 때는 미리부터 재계(齋戒)하여 어머니의 혼령을 보고 있는 것처럼 하였다. 큰형이 요절하자 형의 두 딸을 길러서 때맞추어 혼인시켰다. 또한 큰형의 사당과 묘소를 보수하고 자손에게 경계(警戒)를 남겨서 제사가 단절되지 않도록 하였다.[「심집신도비명」]

종족간의 친목을 두텁게 하여 원족(遠族)까지 보살폈으므로 문 앞에는 신발이 항상 가득했고, 사람들은 심집의 의로움을 좋아했다고 한다. 평상시에 심집은 자제들에게 “효도란 백행(百行)의 근본이 된다. 『소학(小學)』에 그 절목(節目)이 자세히 구비되어 있으니, 읽어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힘써 실천하여라. 이것을 미루어서 임금에게 충성한다면 비록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할 것이다.”라고 훈계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은 심집이 이렇게 자제들에게 훈계하였으므로, 자손들이 효도와 공경을 돈독히 행하는 것이 다른 이들과 달랐다고 평했다.[「심집신도비명」]

인조 대에 어느 날 밤에 여러 대장(大將)들이 궐하(闕下)에 모여서 거짓으로 급한 경보를 고하고, 남산 봉화대에 불을 올려 대궐문을 열도록 요청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군정(軍情)의 이합(離合)을 시험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심집은 문을 굳게 닫고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수들은 심집의 처사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인조는 그가 원칙을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겼다고 전해진다.[「심집신도비명」]

후손 및 묘소

심집의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묘소는 금천(衿川) 흘리항(屹里項) 선영에 조성되었는데, 현재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이다. 이후 봉천 지역 개발에 따라 인천광역시 북구 선영으로 이장되었다.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직제학(直提學)홍종록(洪宗祿)의 딸로, 1남을 두었다. 아들 심동귀(沈東龜)는 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심집신도비명」]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계곡집(谿谷集)』
  • 『동계집(桐溪集)』
  • 『속잡록(續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허지은, 「정응태의 ‘조선무고사건’을 통해 본 조·명관계」, 『사학연구』76, 한국사학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