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창(柳俊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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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1년(선조 34)∼1670년(현종 11) = 70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의 문신.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고 영국 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이다. 자(字)는 대이(大而)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철원 부사(鐵原府使)유질(柳秩)이고,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참의(參議)한수민(韓壽民)의 딸이다. 군기시(軍器寺)부정(副正)유영성(柳永成)의 손자이고,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유덕창(柳德昌)의 동생이다. 전주 유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유혼파(柳渾派) · 유습파(柳濕派) · 유지파(柳池派) 3파가 있는데, 유준창은 시조 유습의 11대손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7년(인조 5)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진사(進士)로 아울러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방목』]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할 때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질문을 곧잘 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가 대성(大成)하리라고 기대하였다. 1630년(인조 8)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서, 1633년(인조 11)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에 임명되었다.[『설봉유고(雪峯遺稿)』 권27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행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유공 묘갈명(贈嘉善大夫 吏曹參判 行通政大夫 承政院同副承旨 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柳公墓碣銘)」 이하 「유준창 묘갈명」으로 약칭] 그때 세조(世祖)의 영정(影幀)을 모신 숭은전(崇恩殿)에 고명(誥命)을 바쳤는데, 유준창은 고명을 황지(黃紙)에 베껴쓰는 일을 맡았다. 의식이 끝난 다음에 인조는 고명 등황관(誥命謄黃官)유준창과 엄정구(嚴鼎耉)에게 각각 반숙마 1필을 하사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1년 5월 12일]

1635년(인조 13) 이후에 잇따라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3년 상복(喪服)을 끝마치고,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설봉유고』 권27 「유준창 묘갈명」] 1641년(인조 19)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여,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거쳐 지평(持平)으로 승진되었다.[『인조실록』인조 19년 11월 20일] 1643년(인조 21)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1644년(인조 22)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는데, 그때 무장(武將) 이시영(李時英)과 이일원(李一元) 등의 역모(逆謀) 사건을 논란하여, 주모자(主謀者)를 모두 처형하게 하였다. 그 공훈으로 영국 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인조실록』인조 22년 6월 6일]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나갔으나, 토호(土豪)들의 뜻을 거슬러 교체되었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에 임명되었는데, 1646년(인조 24)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왕세자가 제사를 지낼 때에 필선유준창이 술에 취하여 의식 절차에 실수를 하였으니,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인조가 파직하라고 명하였다.(『인조실록』 인조 24년 9월 3일) 그 뒤에 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는데[『인조실록』인조 26년 윤3월 17일], 1649년(인조 27) 사헌부 지평홍명하(洪命夏)와 함께 칠곡 부사(漆谷府使)이지형(李枝馨)의 백성들을 침학(侵虐)한 사실을 탄핵하였다가, 이지형을 감싸는 경상도 관찰사와 대립하여, 체차되었다.[『인조실록』인조 27년 3월 15일] 인조가 유준창을 다시 불러서 경상도경차관(敬差官)으로 임명하여 영남(嶺南) 지방의 수령관을 염찰(廉察)하고 임금에게 보고하게 하였으나, 그가 경상도에 머물고 있을 때 인조가 갑자기 돌아갔다.[『설봉유고』 권27 「유준창 묘갈명」]

효종 · 현종 시대 활동

1650년(효종 1) 사헌부 헌납(獻納)이 되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 효종 1년 7월 1일) 1652년(효종 3)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방을 염찰하고 돌아와서 복명하였다. 그러자 효종이 친히 산천(山川)의 형세(形勢)와 주군(州郡)의 이해관계를 물었는데, 유준창이 조목별로 대답한 것이 매우 자세하였으므로, 효종이 이것을 가상하게 여겼다.[『설봉유고』 권27 「유준창 묘갈명」] 그해 8월 문과의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사헌부가 아뢰기를, “문과 초시(初試)의 일소 시관(一所試官) 유준창은 음주를 삼가지 못하고 종일 몹시 취하여 있었으므로, 많은 선비들이 보고 모두 비웃고 손가락질하였으니, 엄중하게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효종이 비답하기를, “유준창을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효종실록』효종 3년 8월 25일] 이리하여 한 동안 집에서 칩거(蟄居)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655년(효종 6) 사헌부 장령과 헌납,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가 사헌부 집의(執義)로 옮겼으며, 1656년(효종 7)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임명되어, 세자 때 현종을 가르쳤다.[『효종실록』효종 6년 2월 30일 · 8월 3일 · 8월 26일 · 11월 19일, 효종 7년 10월 14일]

1661년(현종 2)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에 임명되고,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품되었다. 그 뒤에 서반(西班)중추부(中樞府)로 옮겨서 한 동안 한직에서 지냈다.[『설봉유고』 권27 「유준창 묘갈명」] 1663년(현종 4) 헌납이익(李翊)이 탄핵하기를, “부사과(副司果)유준창이 장릉(長陵)헌관(獻官)이 되어 멋대로 술을 마시고 예에 어긋난 행동을 하였는데, 사헌부의 관원들은 술 취해서 실수한 것이라고 그냥 넘겨버렸으니, 너무도 법을 집행하는 뜻이 못된다고 하겠습니다.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현종이 그대로 따라서, 사헌부 관원들을 모두 파직하였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4년 1월 8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4년 1월 8일] 장릉은 인조의 능이다.

1668년(현종 9)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는데, 술로 인하여 승지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사헌부 집의권격(權格)의 탄핵을 받아서 파직되었다.[『현종실록』현종 9년 10월 18일, 『현종개수실록』현종 9년 10월 18일] 유준창은 집안에서 근신하면서 친구들과 연락도 끊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1670년(현종 11) 12월 대단치 않은 병으로 서울집의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0세였다.[『설봉유고』 권27 「유준창 묘갈명」]

성품과 일화

유준창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 그의 묘갈명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설봉유고』 권27 「유준창 묘갈명」]그는 신색(神色)이 남보다 뛰어나고 중요한 정무를 처리할 때 간결하고 신중하였으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그를 우러러 보고 따르게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업에 별고 노력하지 않아도 학문이 크게 이루어졌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할 때 훌륭한 질문을 많이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가 앞으로 큰 인물이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고, 공사(公事)를 봉행(奉行)할 때에는 조심하고 부지런하였다. 평생토록 일찍이 영리(營利)를 도모한 적이 없어서 빈한한 생활을 하였으나 항상 편안하고 침착하였다.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서 후금(後金)의 오랑캐 군사들이 그해 봄에 평양성을 포위하여 공격할 때 아버지 유질(柳秩)이 평양 서윤(平壤庶尹)으로 있었는데, 평양성이 오랑캐 군사들에게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고, 27세의 유준창이 서울에서 평양으로 즉시 달려가서 아버지를 도왔다. 평야성이 갑자기 오랑캐 군사의 침입을 받아서 적변(賊變)에 대응할 준비가 많았으므로,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아버지 옆에서 여러 가지 일을 도왔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그 다음해 1월 오랑캐 군사가 철원(鐵原)을 공격하여 성을 함락할 때, 아버지 유질은 철원부사로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유질에게 몸을 피하라는 권유하였으나, 유질은 이 권유를 물리치고 성을 지키다가 순절(殉節)하였다. 아버지는 적에게 붙잡혀서 항복하지 않고 적을 꾸짖다가, 적의 칼날에 참화(慘禍)를 당하였다. 37세의 유준창은 어머니의 상중에 있었는데, 형 유덕창(柳德昌)과 함께 단숨에 철원으로 달려가서, 울부짖으면서 목숨을 걸고 적진(賊陣) 사이를 드나들면서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수습하였다. 그때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몸이 야위어 목숨이 끊어질 뻔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시운(時運)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나, 그는 평생토록 하늘을 이고 살면서 아버지 원수를 갚지 못하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유준창은 항상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을 한탄하면서 술을 마셨는데, 가끔 폭음하고 실수를 저질러서 여러 번 파직당하였다. 만년에 조정의 의논이 더욱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보고, 술로써 자회(自晦)하고 두문불출하였다. 예조 판서강백년(姜栢年)은 그의 묘갈명에 “그의 재주와 기량으로 보면, 무슨 시험인들 통과하지 못하였을까마는, 그러나 그는 즐겨 세속(世俗)을 따르지 아니하다가, 길고(桔橰)가 세상에서 사라지듯이, 끝내 그의 온축(蘊蓄)한 소양을 능히 세상에 펼 수가 없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라고 한탄하였다. 여기서 길고는 지렛대로써 물을 긷는 두레박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가평군(嘉平郡) 북면 소법리에 있는데, 설봉(雪峰)강백년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설봉유고(雪峯遺稿)』 권27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행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유공묘갈명(贈嘉善大夫 吏曹參判 行通政大夫 承政院同副承旨 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柳公墓碣銘)」]

부인 한양 조씨(漢陽趙氏)는 생원 조륜(趙綸)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유경(柳炅)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고, 딸은 생원 이정지(李鼎至)에게 출가하였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설봉유고(雪峰遺稿)』
  • 『응천일록(凝川日錄)』
  • 『택당집(澤堂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문정공유고(文貞公遺稿)』
  • 『동산유고(東山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