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격(權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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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0년(광해군12)∼1671년(현종12) = 52세]. 조선 중기 효종~현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정숙(正叔)이고, 호는 육유당(六有堂)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선산부사(善山府使)권성원(權聖源)의 아들이고, 송시열(宋時烈)의 제자 권상하(權尙夏) · 권상유(權相遊)의 아버지이다. 또 강선여(姜善餘)의 외손자이고, 이춘원(李春元)의 손녀사위이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32세 때인 1651년(효종2) 정시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고 주서(注書)를 거쳐 곧바로 양사(兩司)로 들어가,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 다섯 번, 헌납(獻納) 네 번, 사간(司諫)을 두 번이나 하였고,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 일곱 번, 장령(掌令) 네 번, 집의(執義)를 여섯 번이나 하였다. 또 시강원(侍講院)에도 오래 있었는데, 설서(說書) · 사서(司書) · 필선(弼善)을 각각 두 번씩 하였고, 보덕(輔德)을 한 번 하였다. 양사와 시강원에 전후 10여 년을 있었고, 항상 봉조하(奉朝賀)와 춘추관(春秋館)을 겸임하였는데,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으로서 『효종실록(孝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660년(현종1) 6월 동지사정치화(鄭致和)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효종이 돌아간 다음에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왕후)의 복제(服制)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는 서인(西人)의 선봉장으로서 반대파 윤선도(尹善道) 등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게다가 양사에 있을 때에는 직함을 부르지 않고 사람 이름을 불러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탄핵을 당하여 파직되기도 하였고,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또 외직으로 쫓겨나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 · 고산찰방(高山察訪) · 강릉부사(江陵府使)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무덤과 사평

묘소는 충청도 청풍(淸風)황강(黃江)의 북쪽 선영(先塋)에 있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그는 여가에 서재를 깨끗이 청소하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읽으며 스스로 즐겼다고 한다. 특히 송(宋)나라 유학자(儒學者) 장재(張載)의 수양하는 여섯 가지 방법을 실천하기 위하여 서당의 이름을 ‘육유당(六有堂)’이라 하고, 이것을 자호(自號)로 삼았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한수재집(寒水齋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홍재전서(弘齋全書)』
  • 『몽오집(夢梧集)』
  • 『동춘당집(同春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