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우(趙相愚)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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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조상우 |
한글표제 | 조상우 |
한자표제 | 趙相愚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현종~숙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자직(子直) |
호 | 동강(東岡) |
시호 | 효헌(孝憲)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40년(인조18) |
사망 | 1718년(숙종44) 6월 30일 |
본관 | 풍양(豊壤)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영평(永平) 추곡(楸谷) →(이장)경기도 풍양(豐壤) 자하동(紫霞洞) |
증조부 | 조기(趙磯) |
조부 | 조희보(趙希輔) |
부 | 조형(趙珩) |
모_외조 | 사천목씨(泗川睦氏): 목장흠(睦長欽)의 딸 |
처_장인 |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장영(李長英)의 딸 →(자녀)3남 5녀 |
자녀 | (1자)조태수(趙泰壽) (2자)조해수(趙海壽) (3자)조두수(趙斗壽) (1녀)이필흥(李必興)의 처 (2녀)권익문(權益文)의 처 (3녀)심경(沈璟)의 처 (4녀)조하장(曺夏章)의 처 (5녀)이시형(李蓍亨)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조상우(趙相愚) |
총론
[1640년(인조18)∼1718년(숙종44) = 79세]. 조선 후기 현종∼숙종 때의 문신. 자는 자직(子直), 호는 동강(東岡)이다. 본관은 풍양(豊壤)인데,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예조(禮曹) 판서(判書)조형(趙珩)이고, 어머니 사천목씨(泗川睦氏)는 참판(參判)목장흠(睦長欽)의 딸이다. 처음에 이경석(李景奭)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에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 되었다.
급제 이전의 활동
1669년(현종10) 조상욱(趙相愚)는 태학(太學)에서 수학을 할 때 유생(儒生)들을 이끌고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계비 강씨)를 부묘(祔廟)하는 예를 속히 거행하여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령을 위로하소서.”라고 상소하였으나, 현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1669년(현종10) 세자(世子: 숙종)가 태학에 입학(入學)할 때 세자를 받들어 모시는 유생으로 선발되어, 사류(士類)들의 부러움을 샀다. 1672년(현종13)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에 임명되었다가, 1674년(숙종즉위)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하자, 궁관(宮官)으로 차출되어 사축서(司畜署)별제(別提)로 승진하였다. 얼마 뒤에 외직으로 나가 연천현감(漣川縣監)이 되었다.
1675년(숙종1) 동춘당(同春堂)송준길(宋浚吉)이 추삭(追削)을 당하자, 동문(同門)들과 더불어 상소를 올려서 송준길을 변명하다가 전라도 남평(南平)으로 유배되었으나, 다음해에 풀려났다. 1679년(숙종5)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례를 마치자 호조(戶曹)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가,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나갔다.
급제 이후의 활동
1682년(숙종8)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3세였다. 1684년(숙종10)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임명되었고, 서학(西學) 교수(敎授)를 거쳐 병조(兵曹)정랑(正郞)이 되었다가, 호남 지방에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갔다. 1685년(숙종11)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다. 1686년(숙종12) 이조 좌랑에 임명되어,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다. 홍문관 교리(校理) · 부응교(副應敎)에 임명되어 외척을 견제해야 한다고 상소하다가, 양주(楊州)의 쌍수역(雙樹驛)에 유배되었다.
1689년(숙종15)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다가 성균관(成均館)사성(司成)에 임명되었고, 종부사(宗簿司) 정(正) · 좌통례(左通禮)를 거쳐, 서산군수(瑞山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694년(숙종20) 강계부사(江界府使)로 나갔는데, 그 해에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면서 서인(西人)들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1695년(숙종21) 내직으로 들어와서 이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고,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1696년(숙종22)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고,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으로 비변사(備邊司)부제조(副提調)를 거쳐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 이어 1697년(숙종23)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양전(良田)을 바로 잡고 군역(軍役)을 균등하게 부과할 것을 건의하였다.
1698년(숙종24) 도승지(都承旨)로 영전하고, 호조 참판으로서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 이어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어, 단종(端宗)의 부묘(祔廟)에 국왕이 친림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파직당하였으나, 곧 용서를 받았다.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700년(숙종26)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형조 · 예조의 참판을 거쳐 형조 판서 ·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1701년(숙종27) 희빈장씨(禧嬪張氏)를 사사(賜死)할 때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703년(숙종29)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승문원(承文院) 제조(提調)로 옮겼다. 1704년(숙종30)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으로 승진하였고, 1705년(숙종31)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으로 영전하였다. 1705년(숙종31)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오도일(吳道一)을 비호하다가 영의정신완(申琓)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서, 1706년(숙종32) 특지(特旨)로 의금부 판사(判事)에 임명되었고, 또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708년(숙종34) 이조 판서를 다시 역임하였다.
1709년(숙종35) 나이 7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는데, 두 번씩이나 상소를 올려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숙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가 내의원(內醫院)제조(提調)를 맡았는데, 최석정(崔錫鼎) · 서종태(徐宗泰) 등을 변호하다가, 유득일(兪得一) · 정호(鄭澔) 등의 공격을 받아 삭탈관직(削奪官職) 당하였다. 다시 돈녕부(敦寧府) 판사에 임명되었고, 1711년(숙종37) 예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하였으며, 1712년(숙종38) 중추부(中樞府) 판사에 임명되었다. 1717년(숙종43) 숙종이 세자(경종)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의 명령을 내렸을 때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서 이를 막았다. 1718년(숙종44) 6월 30일 숙환이 심해져서 조용히 죽으니, 춘추(春秋)가 79세였다.
재상이 되어 당쟁(黨爭)의 폐단을 없애려고 노력하였으며, 남구만(南九萬) · 최석정 등과 함께 온건한 정책을 폈다. 글씨를 잘 썼는데, 필체의 짜임새가 단정(端正)하고 중후(重厚)하였으므로, 당시 비갈(碑碣)을 세우는 자들이 모두 그의 글씨를 얻은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장렬왕후(莊烈王后: 인조계비)의 옥책문(玉冊文)과 능원대군(綾原大君)이보(李甫)의 비(碑)를 썼으며, 충현서원(忠賢書院) 사적비 등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조성우는 키가 크지는 않았으나 모난 얼굴에 풍요한 체구로서 의용(儀容)이 매우 훌륭하였다. 평소에 종일 엄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으나, 물체에 몸을 의지하여 비스듬하게 앉는 법이 없었다. 충성과 믿음으로 털끝만큼도 남의 물건을 해치거나 사람을 상하게 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몸이 귀하게 된 후, 모든 관가의 녹봉(祿俸)과 외읍(外邑)에서 들어오는 양식은 반드시 먼저 형과 누님에게 나누어 주었다. 본래 기호(嗜好)하는 것이 없었고, 오로지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이름난 명필이 되었다.
아버지 예조 판서조형의 후손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그는 일가의 원로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열흘마다 40세 이하 일가 사람들에게 글을 외우고 문장을 짓게 하여, 기한이 되면 유건(儒巾) · 유복(儒服) 차림으로 무릎을 꿇고 공부한 것을 자기에게 바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부지런히 한 것과 게을리 한 것을 평가하여, 아래 등급을 차지한 자들에게 비록 자식을 낳은 어른이라 할지라도 종아리를 때리고 용서하지 않았다. 또한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그가 관복[冠帶]을 입고 청사(廳事)에 앉아 있으면, 씨족의 부녀들이 각각 의복과 관계(冠笄)를 갖추고서 차례로 절을 하여 뵙고서 얼굴을 나직이 한 채로 훈계를 듣고 물러나게 하였다.
그는 전조(銓曹)에 오랫동안 있었으나, 그의 집에 사사로이 찾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한 두둑의 농토와 한 명의 노복도 포의(布衣) 때보다 증가된 것이 없었다. 일찍이 도감(都監)의 낭관(郎官)이 되었을 적에 일을 마치자 여러 당상관(堂上官)들이 남은 돈으로 큰 병풍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에게 물으니, 그는 다만 말하기를 “낭청(郞廳) 집이 협착하여 큰 병풍을 펼 만한 곳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묘소와 제향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묘소는 처음에 경기도 영평(永平)의 추곡(楸谷)에 있었는데, 나중에 경기도 풍양(豐壤)의 자하동(紫霞洞)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이덕수(李德壽)가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서당사재(西堂私載)』 권10) 전라도 남평(南平)의 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었는데, 일찍이 스승 송준길을 변호하다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서당사재(西堂私載)』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송자대전(宋子大典)』
- 『임하필기(林下筆記)』
- 『약천집(藥泉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동계집(東溪集)』
- 『노서유고(魯西遺稿)』
- 『월주집(月洲集)』
- 『우계집(牛溪集)』
- 『수촌집(水村集)』
- 『서파집(西坡集)』
- 『몽와집(蒙窩集)』
- 『간재집(艮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