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축서(司畜署)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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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사축서 |
한글표제 | 사축서 |
한자표제 | 司畜署 |
상위어 | 예조(禮曹), 호조(戶曹) |
동의어 | 구사축서(舊司畜署) |
관련어 | 예빈시(禮賓寺), 장생서(掌牲署), 전구서(典廐署), 사축소(司畜所), 사련소(司臠所), 분예빈시(分禮賓寺)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조병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사축서(司畜署) |
조선시대에 소나 말 이외의 돼지·양·염소·거위·오리 등의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던 예조 소속의 관청.
개설
조선시대에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은 관서에는 전생서(典牲署)와 예빈시(禮賓寺), 사축서(司畜署) 등이 있었다. 전생서는 궁중의 제향(祭享)·빈례(賓禮)·사여(賜與)에 쓰이는 가축을 길렀는데, 고려시대의 장생서(掌牲署)를 계승하여 1392년(태조 1)에 전구서(典廐署)를 설치했고, 1460년(세조 6)에 전생서로 개칭하였다. 이곳에서는 황우(黃牛) 3마리, 흑우(黑牛) 28마리, 양 60마리, 염소 14마리, 돼지 330마리를 항상 사육하였다. 1637년(인조 15)에는 사축서를 전생서에 병합하기도 했지만 곧 독립시켰다. 예빈시는 빈객의 연향(燕享)과 종실 및 재신(宰臣)들의 음식물 공급 등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된 관서로, 암양과 숫양[羔羊]·돼지[唐猪]·기러기[雁]·오리[鴨]·닭[鷄] 등을 사육하였다. 사축서는 고려시대의 전구서를 계승하였는데, 예빈시에 합쳐져 분예빈시(分禮賓寺)라 불리다가 1406년(태종 6) 사축소(司畜所)를 거쳐, 1466년(세조 12)에 사축서로 개칭되었다. 일반적으로 전생서는 제향에 쓰일 희생물인 가축을, 사축서는 가례나 진연, 사신 접대에 쓰이는 가축을 주로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
담당 직무
사축서의 주요 직무는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 편 호조각장(戶曹各掌) 사례에 나타난 바와 같이, 돼지·양·염소·거위·오리 등의 가축을 사육하여 궁중의 가례(嘉禮)·길례(吉禮)·진연(進宴)·진찬(進饌)·선온(宣倍)·사연(賜宴)과 봉조하(奉朝賀)에게 월별로 지급하거나, 노인(老人)의 세찬(歲饌) 등에 공급하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기우제(祈雨祭), 보사제(報謝祭), 선무사(宣武祠)의 절제(節祭), 각 군문(軍門)의 기제(旗祭)와, 칙사(勅使)·표해인(漂海人)의 공궤(供饋) 등에 쓰이는 가축의 공급도 맡아보았다. 이와 같은 각종 행사에 가축을 조달하는 방법 및 수량은 표 1과 같다.
한편, 사축서의 축료(畜料) 확보를 위한 정책은 국초부터 여러 가지로 강구되었다. 주로 곡초(穀草)·생초(生草)를 경기의 여러 읍에서 공물(貢物)로 받아 충당하도록 하였다. 1470년(성종 1)에는 공안(貢案)에 따라 경기 여러 고을로부터 곡초 2414동(同), 생초 5000동을 수납하게 했는데, 수령들이 백성에게 이를 임의로 부과하는 폐단이 생겨났다. 그 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경기 여러 읍의 민전(民田)에서 곡초와 생초를 수납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축료가 너무 크게 늘어나 1509년(중종 4)에는 그 수량을 줄이도록 하였다. 대동법 실시 이후에는 축료를 호조와 선혜청(宣惠廳)에서 지급했는데, 풀 값을 확보하기 위해 오늘날의 여의도인 여화도(汝火島)에 위전(位田)을 설치하여 위전세(位田稅)를 받아 충당하기도 하였다. 또 지게미와 쌀겨인 조강(糟糠)은 서울 도성에 거주하는 방민(坊民)에게 돈을 받아 충당하였다. 사축서는 가축을 궁중에 조달하는 기능은 충실히 수행하였으나, 민간의 축산업을 발전시키는 데는 기여한 것이 적었다.
변천
사축서는 고려시대의 전구서에서 유래한다. 고려 목종 때 전구서를 두어 잡축의 사육을 맡아보게 하면서 그 책임자로 영(令)을 두었다. 문종 때는 승(丞) 1명을 더 두었는데, 충렬왕이 고쳐서 전의시(典儀寺)에서 관할하도록 하였다. 이속은 사(史) 3명, 기관(記官) 2명, 산사(算士) 1명이었다.
전구서는 조선 건국 후 1392년(태조 1)에 문무백관의 제도를 정할 때 그대로 설치되었으며, 종5품 영 1명, 종5품 승(丞) 2명과 사리(司吏) 2명이 소속되었다. 그 뒤 예빈시에 합하여 분예빈시라 부르다가, 1460년(세조 6)에 분예빈시와 사련소(司臠所)를 합하여 사축소라 칭하고, 별좌(別坐) 3명, 별감(別監) 6명을 두었다. 1463년(세조 9)에는 사축소 별감을 혁파하였으며, 1466년(세조 12)에 비로소 사축소를 사축서라 개칭하고 사축(司畜) 1명을 두었다. 사축서는 성종대의 『경국대전』에 이르러 종6품 아문으로 정비되어, 종2품 제조(提調) 1명, 종6품 사축 1명, 종6품 별제(別提) 2명과 서리(書吏) 4명, 차비노(差備奴) 6명, 근수노(根隨奴) 3명을 두게 되었다.
그 뒤 1595년(선조 28)에는 사축서를 전생서에 합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1637년(인조 15)에는 실제로 전생서에 합병되었다. 이후 1658년(효종 9)에, 전생서는 제향(祭享)을 담당하고 사축서는 사객(使客) 즉 사신 접대의 수요를 전담하게 하기 위해 분리해야 한다는 이조 판서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다시 설치되었다.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 따르면, 사축서는 기구가 축소되어 제조는 호조 판서가 겸임하고 사축 1명은 혁파되었다. 정6품 별제 2명은 그대로 두었으나, 서리는 서원(書員)으로 격하되었을 뿐 아니라 2명으로 감원되었다. 1767년(영조 43)에는 사축서가 호조 소속의 사섬시(司贍寺)로 이관함에 따라 사축서가 유명무실하다 하여 또다시 혁파하고 호조에 합병해 호조 낭청(郎廳) 1명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한편,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사축서의 재설치를 주장하고, 특히 양을 사육하는 곳으로 용산(龍山)에 위치한 율도(栗島), 전도(典島), 부평에 위치한 청라도(靑羅島), 강화에 위치한 미법도(彌法島) 외에 광주(廣州)의 당정주(棠亭洲)에 우리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사축서의 위치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모악(母岳) 남쪽’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영조실록』 28년 3월의 기록에는 ‘옛 연희궁의 동남쪽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또 『만기요람』에서는 ‘옛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었으나 뒤에 미동(美洞)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관직명사전(官職名辭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남도영, 『한국마정사연구』, 한국학연구총서9, 아세아문화사, 1976.
- 최영진, 「이조 축정사 소고」, 『인천교육대학교논문집』1, 196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