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무사(宣武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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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에 있었던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참여한 명나라의 장수 형개(荊芥), 양호(楊鎬) 및 전몰 군사들을 모신 곳.

개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형개, 도어사(都御史)양호와 전몰 군사들을 제향하던 사당이다. 1598년(선조 31)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인 남대문 내 태평관(太平館) 서쪽에 세웠으며, 갑오개혁 이후 국가 전례를 정비하였고 1908년(융희 2) 칙령 제50호로 제사를 폐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조선을 도운 명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형개와 경리조선군무도찰원우첨도어사(經理朝鮮軍務都察院右僉都御史)양호를 제향하는 사당이다. 조선후기에는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의 신종황제(神宗皇帝)를 제사하는 제단인 대보단(大報壇)을 비롯하여 1593년(선조 26)에 창건하여 병부상서석성(石星),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 등을 제사하는 무열사(武列祠), 전란에 희생된 명나라 군사들을 제사하기 위해 세운 민충단(愍忠壇) 등 임진왜란과 관련된 공로자들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많이 세웠다.

선무사에는 1598년(선조 31) 창건 당시에는 형개의 위패만을 봉안하였으나, 1604년(선조 37)에 양호를 추가로 배향하였으며, 1760년(영조 36) 선무사 마당에 별도의 전각을 마련하고 민충단에 모셨던 명나라 전몰 장병의 위판을 옮겨 함께 제향하였다. 이러한 제향은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에 대한 보은과 대명의리론의 상징인 대보단과 함께 중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직 및 역할

선무사는 3칸의 정당(正堂)을 두고 주위에 담장을 둘렀으며 남쪽에 삼문(三門)을 설치하였다. 정당에는 형개와 양호의 위패를 모셨으며, 그 동쪽에 지은 1칸의 관군사(官軍祠)에 명나라 전몰 장병의 위패를 모셨으며 서쪽에는 2칸짜리 비각(碑閣)을 세워 이들을 기리는 비를 봉안하였다. 3칸짜리 전사청에서 제사를 준비하도록 하였으며, 삼문 밖 동남쪽에 8칸의 향관청(享官廳)을 두었다. 제사는 국가 전례 중 소사(小祀)로서 매년 음력 3월과 9월 두 번째 정일(丁日)에 지냈다.

창건 당시에 선조의 어필로 ‘재조번방(再造藩邦)’이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1746년(영조 22)에는 영조의 어필로 ‘수은해동(垂恩海東)’이라는 현판을 써 걸게 하였다.

변천

선무사는 1880년대까지만 해도 충렬사(忠烈祠), 현절사(顯節祠)와 함께 순조대의 전례대로 치제하게 하였다(『고종실록』 21년 3월 1일). 그러나 갑오개혁 이후 제향을 폐지하거나 축소하면서 중국 관련 의례가 점차 축소되고 선무사의 제사도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는 음력 3월과 9월 두 번째 정일(丁日)에 제사를 모셨으나 1896년(고종 33) 8월 14일 궁내부(宮內府)에서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에 관한 별지를 개록하여 상주한 바에 따르면 선무사의 제사를 3월 두 번째 정일에만 모시도록 하여 제사가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종실록』 33년 8월 14일). 선무사의 제사는 1908년(융희 2) 7월 23일 칙령 제50호로 향사리정(享祀釐正)에 관한 건을 배포하면서 제사를 폐지하였다.

참고문헌

  • 『경성부사(京城府史)』
  • 『선무사비고(宣武祠備考)』
  • 『선무사의궤(宣武祠儀軌)』
  • 『황성신문(皇城新聞)』
  • 이영춘, 「조선후기의 사전의 재편과 국가제사」, 『한국사연구』11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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