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관청(享官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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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문묘에서 제사를 지내기 전에 여러 집사가 대기하던 건물.

개설

향관청은 문묘(文廟)에서 제사를 지낼 때 헌관(獻官) 및 여러 집사가 거처하며 심신을 경건히 가다듬던 장소로 1491년(성종 22)에 완성되었다. 성균관에 기숙하는 유생이 많을 때에는 이들이 거처하는 곳으로도 활용되었다. 향관청 건물로는 중앙에 향관청이 있고 뜰아래에 동·서 월랑(月廊)이 있으며, 그 아래로 포주(庖廚)가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395년(태조 4)에 준공된 대묘(大廟)에는 5칸의 향관청이 있었다. 그러나 성균관에는 향관청이 없었으므로 문묘제사 때마다 불편함이 많았다. 이에 1490년(성종 21) 성현(成俔)이 경연에서 “문묘의 석전제 및 친제를 드릴 때 여러 집사가 청재(淸齋: 몸과 마음을 깨끗이 재계함)할 곳이 없어, 성균관의 동재(東齋)·서재(西齋)를 빌려 우거하니, 그 재실의 유생들은 여염의 집에서 기숙하다 제향에 참여하게 되어 매우 옳지 못합니다. 청컨대 따로 향관청을 세우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향관청을 건립할 것을 청하였다. 이를 왕이 허락하였다. 성균관의 하급관원인 학정(學正)·학록(學錄)의 근무 공간인 정록청(正錄廳) 북쪽 빈터를 자리로 정하고, 성균관의 노비 공포(貢布)로 재목을 준비한 후 공사에 착수하여[『성종실록』 21년 7월 19일]. 1491년에 준공되었다.

조직 및 역할

성균관에 기숙하는 유생이 많을 때에는 향관청도 거처의 하나로 활용되었다[『중종실록』 6년 6월 9일].

변천

1506년(중종 1) 성균관의 동·서재, 명륜당의 동·서 협실(夾室), 정록청 등과 함께 향관청도 수리되었다(『중종실록』 1년 11월 27일). 이 향관청은 임진왜란 때에 완전히 불타 없어졌으며, 1653년(효종 4) 대사성이일상(李一相)의 진언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1740년(영조 16) 영조가 친히 석채(釋菜)를 행할 때 어재실(御齋室)로 이용하였고, 직접 칠언절구(七言絶句)와 소지(小識)를 지어 향관청의 벽에 붙였다[『영조실록』 16년 7월 26일]. 1966년에 파괴된 동·서 월랑과 포주는 1986년 문화재관리국의 보조로 동·서 월랑만 중건되었다.

참고문헌

  • 『태학지(太學志)』
  • 윤기 저·이민홍 역주, 『반중잡영(泮中雜詠)』,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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