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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조선시대 기병의 별칭.

② 조선후기 훈련도감 또는 지방군에 편제된 기병 부대.

개설

① 조선전기에는 기마병을 가리키는 용어로 기병(騎兵)과 마병, 두 용어가 혼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기병보다 마병이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거나 다소 공식적인 용어로 마병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전기 마병은 『진도법(陣圖法)』, 『계축진설(癸丑陣說)』 등 병서에 따르면 진을 칠 때 사방으로 나가 적군을 견제하고 진이 완성되면 진 안에서 대기하면서 보병과 함께 적군에 응전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세종실록』3년 7월 9일). 이들은 주로 기사(騎射), 또는 기창(騎槍)을 다루는 마병으로 구분된 것이 일반적이었다. 마병에게는 기본 무기 이외에 마병용 표준 환도(環刀)를 1451년(문종 1)에 제작·지급했는데 그 규격은 길이 1척 6촌, 너비 7푼으로 보병용 환도보다는 다소 작았다(『문종실록』1년 2월 25일).

조선후기에도 기병을 나타내는 용어로 마병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특별히 금군(禁軍), 수어청, 총융청 등의 군영과 지방의 각 도, 주요 고을에 마병을 편성하였다. 수어청과 총융청의 마병은 기본적으로 경기 지역의 마병으로 편성되었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훈련 시 수어청은 좌·우영(左·右營)에 마병 각 3초(哨), 난후마병(欄後馬兵) 1초 등이 편성되었고, 총융청에도 마병 2초가 동원되었다. 금군은 마병의 규모가 상당하였는데, 1652년(효종 3) 8월에는 600여 명의 금군을 모두 기병화하도록 하고(『효종실록』3년 8월 13일), 이후에는 1,000명으로 증원하였다. 효종 이후 700명으로 정원이 고정되어 이후 계속 유지되었다.

경기 이외에 각 도의 감영과 병영 소속의 마병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병영이나 감영에서 취재(取才) 시험을 치렀는데 과목은 유엽전(柳葉箭), 편전(片箭), 기추(騎芻)였다. 유엽전은 화살촉이 버드나무처럼 생긴 화살을 쏘는 시험이고, 편전은 짧고 작은 화살을 쏘는 시험이었으며, 기추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허수아비를 쏘는 시험이었다. 이 중 2과목에 합격한 자 중에서 점수를 계산하여 3명을 뽑아 왕에게 장계(狀啓)로 보고하였다. 우등자 1명은 과거시험의 마지막 단계인 3차 시험인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게 하고 그다음 1명은 2차 시험인 회시(會試)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음 1명은 군임(軍任)으로 승진·임명하였다.

② 임진왜란 중 중국 명나라의 새로운 전술 체계인 척계광(戚繼光)의 절강병법(浙江兵法)에 따라 훈련도감이라는 새로운 군영이 창설되었다. 훈련도감은 기본적으로 보병인 포수(砲手), 사수(射手), 살수(殺手)의 이른바 삼수병(三手兵)으로 편성되었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4년(선조 37) 북방 여진족의 위협이 나타나자 마병을 함께 편성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마병 편성을 지시하였으나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선조실록』37년 12월 17일). 당시 훈련도감에는 기병으로 짐작되는 별무사(別武士)가 약간 편성되어 있었으나 정식의 기병 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후금이 건국되고 후금의 위협이 커지자 1616년(광해군 8) 8월 광해군의 지시에 따라 훈련도감에서 별대(別隊), 별무사, 초군(哨軍) 가운데 말 타는 재주가 있는 자 50명을 뽑아내어 기병(騎兵)이라 칭하고 파총(把摠) 1명을 지휘관으로 삼았다(『광해군일기』8년 8월 21일). 그러나 이때의 마병 설치 계획도 구체적인 실현을 거두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인조대 들어 마침내 훈련도감에 최초의 기병 부대인 마병 좌·우령(左·右領) 200여 명이 편성되었다(『현종개수실록』4년 11월 14일). 그 정확한 창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1632년(인조 10)을 전후하여 훈련도감의 원군(元軍) 가운데 포수와 살수로서 능력이 모자란 자를 마병으로 전환하여 편성한 듯하다. 이는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호란을 통해 기병의 전술적인 유용성이 확인된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1634년 5월에는 마병을 500명으로 증액하여 5초(哨)로 편성하였다. 이를 계기로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따라 보병 중심의 삼수병 체제를 유지하던 훈련도감에서도 마병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군사의 편성과 훈련이 『연병실기(練兵實紀)』에 이루어지게 되었다(『인조실록』12년 5월 14일).

마병의 양성은 보병과 달리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고 필요한 전마(戰馬)를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사복시(司僕寺)를 통해 각 마병에게 관마(官馬)를 지급해 주도록 하였다. 이들이 말을 유지·관리할 수 있도록 보군보다 보인(保人)을 1명 더 주었고 급료도 콩 6~9두를 추가로 지급하였다. 마병에게는 무기로서 갑옷과 투구[甲冑], 예도(銳刀)의 일종인 환도(環刀), 통아(桶兒), 도리깨와 곤봉[鞭棍] 각 1개, 장전(長箭) 20발, 편전(片箭) 15발, 교자궁(交子弓)과 유궁(帷弓) 각 1장(張) 등도 지급하였다.

담당 직무

마병은 훈련도감의 주요 기병 부대였으므로 진법 훈련 시 진(陳) 후방에 대기하고 있다가 포수와 살수의 공격으로 적군이 약해지면 앞으로 달려 나가 적군을 포위하여 공격하거나,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격멸하는 임무를 주로 맡았다. 이를 위해 마병만의 진법 훈련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마병학익진(馬兵鶴翼陣), 마병봉둔진(馬兵蜂屯陣) 등이 그것이다.

훈련도감은 한성의 중심적 군영으로서 한성의 방어 임무를 담당할 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점차 궁궐 담 밖과 도성 내외의 순라(巡邏)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1628년(인조 6)부터 훈련도감 군병의 궁궐 담 밖 순라가 정례화되자 초경(初更)에 남영(南營)의 초관(哨官)이 입직하는 마병 20명을 거느리고 궁궐 담 밖을 2회 순찰하기도 하였다. 평시에 훈련도감 군은 한성에 있는 훈련도감의 여러 영(營)에 입직하며 변란에 대비하였는데, 『만기요람』에 의하면 마병의 경우 남영에 53명, 북일영(北一營)에 55명 등이 입직하였다.

왕이 행행(行幸)할 때에는 보통 훈련도감 마병이 선두에서 행렬을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는 행행하기 전 복병(伏兵)으로서 도성 부근과 내외에 배치되어 왕을 경호하기도 하였다. 『어영청거동등록(御營廳擧動謄錄)』에 의하면 어영군 및 훈련도감 군병은 제기삼거리, 동관왕묘(東關王廟) 삼거리 등 11곳의 복병 처에 배치되었는데, 훈련도감 마병은 33명이 각각 3명씩 다른 군병, 예를 들어 군관 1명, 포수 10명, 어영군 5명 등과 함께 배치되었다.

변천

효종대 북벌의 일환으로 훈련도감 증강이 이루어지면서 1654년(효종 5) 마병 1초가 증액되어 기존의 5초에서 6초가 되었다. 각 초는 마병 119명으로 총 정원은 714명이었다. 마병 6초에는 이 외에도 수솔마병(隨率馬兵) 60명이 편성되어 여러 보조적인 일을 담당하였다. 마병별장(馬兵別將) 2명이 3초씩 맡아 지휘·통솔하였으며 마병별장은 금위영과 어영청에서 중군(中軍) 후보 추천에 오른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효종대 6초로 증강된 마병은 이후에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다만 1728년(영조 4)에 무신란(戊申亂)이 일어났을 때 마병과 보군으로 자원하여 출전하였던 자들로 마병(馬兵) 1초를 편성하여 도순무사(都巡撫使)에 예속시켰다. 반란 진압 후에는 이들을 해산시키지 않고 그대로 무과에 합격시켜 좌전초(左前哨)로 편성하고 별기대(別騎隊)라고 불렀다. 이후 이들을 훈련도감 마병으로 편입하여 마병은 7초 833명으로 증가하였다.

마병은 각 초에 3기(旗)가, 그리고 각 기의 아래에 3대(隊)가 편성되어 있었다. 취사 등의 보조적인 일을 맡은 화병(火兵)은 9명, 사후(伺候)는 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별기대는 출신(出身) 101명, 서자지[書字的] 1명, 패두(牌頭) 1명, 사후 5명, 화병 9명, 기수(旗手)와 고수(鼓手) 각 1명씩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마병은 매년 도시(都試)를 한 차례 치러 수석한 자와 한 기예에서 만점을 받은 자는 한량(閑良)이면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도록 하고, 무과 출신의 경우에는 관계(官階)를 올려 주었다. 시험 과목은 철전(鐵箭), 유엽전, 편전, 기추 등이 있었다.

마병은 1882년 6월 훈련도감 군병이 주도한 임오군란이 청군에 의해 진압된 이후 훈련도감의 기능이 마비되고 이를 대체할 군영으로 친군영(親軍營) 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훈국사례촬요(訓局事例撮要)』
  • 김종수, 『조선 후기 중앙 군제 연구-훈련도감의 설립과 사회변동』, 신서원, 2002.
  • 노영구, 『조선 후기 병서와 전법의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 최형국, 『조선 후기 기병 전술과 마상 무예』, 혜안, 2013.
  • 이왕무, 「조선 후기 국왕의 행행시 궁궐의 숙위와 유도군 연구」, 『군사』6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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