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인(保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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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군미·군전 등을 내는 방식으로 군역을 부담하는 자.

개설

군역에는 직접 징발되어 일정한 기간 번(番)을 서거나 노동력 봉사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을 흔히 정군(正軍)이라 하였다. 반면에 정군 호(戶)의 경제를 보조하는 봉족(奉足)이) 있었다. 15~16세기에 봉족은 정군이나 정군이 속한 국가기관에 포(布)나 쌀이나 화폐 등을 바치는 보인(保人)으로 변하여 갔다. 군역은 정군과 보인의 역을 모두 포괄하였다.

내용 및 특징

처음에는 정군이 봉족이나 보인을 지배하여 그들에게 직접 납부를 받았다. 이를 직정(直定)·직납(直納)이라 하였다. 이와는 달리 정군 개인이 아닌 그가 소속하는 기관에 납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납부를 받은 기관은 그 받은 것으로 정군에게 군기(軍器)나 식사를 제공하였고, 번을 서기 위한 재원을 분배하거나 기관 자체의 경비에 사용하였다. 앞쪽의 보인을 의자보(衣資保)라고) 하였고, 후자의 보인을 관납보(官納保)라고 하였다.

보인은 원칙적으로 포로 납부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군포(軍布)라고 불렀지만, 쌀 등의 곡물이나 동전으로 내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후기에는 공식적으로 군포 1필이나 쌀 6말[斗], 조 8말, 콩 12말, 그리고 동전으로는 2냥(兩)을 납부하였다.

보인의 부담액은 종류에 따라 1년에 1~3필의 차이가 있었다. 이에 농민들이 부담이 가벼운 보인으로 투속하는 현상이 번져 나갔다. 결국 숙종 30년(1704)에는 양인의 군포 부담을 2필씩으로 균등하게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또한 1750년(영조 26)의 균역법(均役法) 실시로 양인은 1필, 천인은 반 필씩으로 반감되었다. 이때 정병 55,000여 명을 제외한 500,000명 이상의 양인 군역 부담자를 포만 내는 군인으로 정하였다. 이로써 사실상 양인 장정은 곧 보인으로 규정되었고, 여기에 천인 보인까지 합하면 전체의 수가 약 1,000,000명에 이르렀다.

변천

태종 15년(1415)에 조정에서 정군에 지급하는 봉족의 수를 경작 면적과 인정(人丁)의 많고 적음에 따라 지급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5년 11월 11일). 세종 23년(1441)에는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의 구분 없이 건강한 자를 택하여 정군으로 삼고, 솔정(率丁)의 수에 따라 봉족을 주도록 하였다(『세종실록』23년 6월 8일). 봉족은 정군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있었다. 그로 인하여 태종 7년(1407)에는 “정군이 자기가 배를 타지 않고, 능력을 불문하고 봉족을 시켜 대신하게 하니, 적(賊)을 만나면 모두 배 밑바닥에 엎드려서 손도 쓰지 못하고 죽게 된다.”고 군역 운영상의 문제점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세조 10년(1464)에 조선초기부터 실시한 봉족제(奉足制)를 보법(保法)으로 바꾸어 시행하면서 종래의 봉족을 보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16세기 중엽 이후 실제 동원되어 군역을 지던 군역 종사자들도 포(布)를 바치고 실제 근무는 하지 않는 납포군(納布軍)으로 변하였다. 이렇게 되자 정군과 보인의 구별이 어려워졌다. 이와 동시에 사적으로 자신의 복무를 타인이 대신하게 하고, 그에게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는 대립(代立)이 퍼져 나갔다. 지방관도 군포를 받고 군역을 제해 주는 방군수포(放軍收布)를 공공연히 실시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정군과 무관하게 보인으로 책정되어 군영에 포를 바치는 부류가 생겨났다.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청은 이러한 보인을 적극 확보하여 재정 수입원으로 삼았다. 이와 아울러 여전히 번상 근무를 하고 있던 기병(騎兵) 등이 아무런 혈연적·사회적 관계가 없는 사람을 보인으로 삼는 일도 생겨났다. 실역(實役)을 지지 않는 대가로 군포를 내고 병조(兵曹)가 이것을 주관하여 국가 재정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군역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도망을 가기도 하고, 승려가 되기도 하며, 세력자의 그늘에서 사노비가 되어 합법적으로 군역 부과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그럴수록 국가는 군역을 확보하는 데 온 정성을 쏟았다. 공사천(公私賤)도 속오군(束伍軍)으로 편성되고, 어린아이까지 보인으로 편성하는 폐단이 빚어졌다. 결국, 17세기 말에는 16세부터 군역을 부과하던 기존 원칙이 허물어지고 11세부터 보인으로 편성한 적도 있었다. 이에 군역의 역종별 정족수를 일정 수준으로 하향 고정화하여 역부담이 가능한 건실한 양정으로 충당하는 것으로 군역정책이 변화하였다. 이 정책은 18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다.

조선말엽에는 균역법의 실시 결과 지방 고을에서 재정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러자 각 고을은 사적으로 보인을 모집하여 재정을 충당하였다. 그 결과 보인의 수가 더욱 늘어났다. 이렇게 늘어난 군포 부담을 양인 농민들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이를 부담하기 위해서 군포계(軍布契)가 조직되었고, 양반 지주들도 일부 부담하였다. 그 결과 양반도 사실상의 보인이 되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양반들 중에는 자기 노비 이름으로 군포를 내는 현상도 나타났다.

참고문헌

  • 김용섭, 「朝鮮後期 軍役制의 動搖와 軍役田」, 『東方學志』 32,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2.
  • 손병규, 「18세기 지방의 私奴軍役 파악과 운영」, 『韓國史學報』 13, 高麗史學會, 2002.
  • 송양섭, 「19세기 幼學戶의 구조와 성격 -『丹城戶籍大帳』을 중심으로-」, 『大東文化硏究』 47, 成均館大 대동문화연구원, 2004.
  • 이규대, 「軍布의 代錢納과 鄕村社會의 變化; 19세기 嶺東地方을 중심으로」, 『한국사론』 21, 국사편찬위원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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