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영(北一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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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도성의 주요 군영인 훈련도감에 속한 분영(分營)의 하나.

개설

16세기 말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창설되고 곧바로 도성 방위에서 훈련도감의 중요성이 높아지자 5개의 분영을 설치하였다. 효종대 이전 이 분영을 조정하여 북영 등 여러 영으로 개편·증설하면서 북일영을 경희궁(慶喜宮)의 무덕문 밖에 창설하였다. 그 주둔 군사는 훈련도감의 기병인 마병 50여 명으로 편성되었고 초관(哨官) 1명이 통솔하였다. 북일영의 주 임무는 무덕문 일대의 호위와 국왕의 시위였다. 19세기 후반 임오군란 이후에는 훈련도감이 폐지되자 북일영은 총융청의 탕춘대(蕩春臺) 신영(新營) 군사들이 주둔하면서 총융청의 관할로 바뀌고 이후에는 경리청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중 도성 방위의 핵심 군영으로서 그 군사적 중요성이 매우 높아진 훈련도감은 급속히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본청 이외에 한성과 궁궐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1594년(선조 27) 훈련도감에 전, 후, 좌, 우, 중영(中營)의 다섯 개 영을 도성 내외에 설치하였다. 이 오영은 이후 원동에 위치한 북영(北營), 돈화문 밖의 남영(南營), 경희궁 숭의문 밖의 서영(西營), 경희궁 흥화문 밖의 신영, 응봉 밑의 광지영(廣知營), 경희궁 무덕문 밖의 북일영(北一營) 등의 여러 영으로 개편·증설되게 된다. 이 분영들은 대체로 왕궁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훈련도감 군병들은 북일영 등의 분영에 입직하여 왕궁의 호위를 담당하였다. 북일영의 정확한 설립 시기는 현재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1652년(효종 3) 7월 무덕문(武德門)의 역사(役事)를 마치기 위해 그곳의 수문장과 군사들을 동원하는 문제로 무덕문 일대의 경비가 소홀해지는 문제점이 나타나자 북일영의 군사 30명을 차출하여 수직(守直)하게 하라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17세기 전반기에 창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훈련도감 군사들은 각 분영에 입직하여 서울의 경비 임무 및 왕궁의 호위를 담당하였다. 그 규모는 창설 초기에는 포수(砲手)살수(殺手) 각각 1초(哨)로서 정원은 200여 명 정도였다. 북일영은 궁문의 호위와 국왕의 시위를 담당하기 위해 대체로 기병인 마군(馬軍)으로 편성되었고 그 내부에 마구간을 설치하였다. 다만 다른 분영에 비해 규모는 상당히 작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북영과 신영이 각각 235칸과 197칸에 달하는 데 비해 16칸에 불과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소규모의 마군으로 편성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일영에는 지휘관인 초관 1명과 마군 55명으로 편성하여 입직하도록 하고 말 18필을 대기시켰다. 다만 군영의 장소가 좁고 제대로 숙직 시설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 임무가 북영, 서영 등 규모가 큰 분영의 경우 한성의 경비 및 도성 내외의 순라(巡邏) 등을 담당한 데 비해 북일영은 서영과 더불어 경희궁의 주둔지 근처, 즉 무덕문 일대의 호위와 국왕의 시위를 주목적으로 창설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변천

임오군란의 여파로 1882년(고종 19) 10월 훈련도감이 혁파되고 청나라의 영향을 받아 친군좌·우영(親軍左·右營)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용호영,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 등 기존의 군영도 체제와 역할 등에서 조정이 있었다. 이에 총융청의 탕춘대 신영 군사를 북일영으로 옮기도록 하고, 북일영의 입직 군사 20명은 금호문(金虎門)으로 옮겨 입직하도록 하였다. 1894년(고종 31) 3월에는 북일영을 경리청(經理廳)으로 옮겨 소속시키고, 8월에는 친군용호영(親軍龍虎營)의 신영을 북일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훈국등록(訓局謄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김종수, 『조선후기 중앙군제연구-훈련도감의 설립과 사회변동-』, 혜안, 2003.
  • 배항섭, 『19세기 조선의 군사제도 연구』, 국학자료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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