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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0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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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신응시 |
한글표제 | 신응시 |
한자표제 | 辛應時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학자/유학자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명종~선조 |
집필자 | 최양규 |
자 | 군망(君望) |
호 | 백록(白麓) |
시호 | 문장(文莊)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32년(중종 27) |
사망 | 1585년(선조 18) 1월 1일 |
본관 | 영월(寧越) |
주거지 | 서울, 황해도 배천(白川) |
묘소소재지 | 황해도 배천군(白川郡) 비봉산(飛鳳山) |
증조부 | 신석(辛奭) |
조부 | 신윤형(辛尹衡) |
부 | 신보상(辛輔商) |
모_외조 | 여흥 민씨(驪興閔氏): 민거(閔琚)의 딸 |
형제 | (동생)신응명(辛應命) |
처_장인 | (첫째부인)무령 정씨(武靈丁氏): 정기(丁琦)의 딸 →(자녀)1남 (둘째부인)은진 송씨(恩津宋氏): 송응서(宋應瑞)의 딸 →(자녀)1녀 |
자녀 | (1자)신경진(辛慶晉) (1녀)윤흔(尹昕)의 처 |
저술문집 | 『백록유고(白麓遺稿)』, 『주문문례(朱門問禮)』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신응시(辛應時)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명종실록(明宗實錄)』 명종 18년 3월 18일, 『명종실록』 명종 18년 12월 2일, 『선조수정실록』 선조 17년 11월 1일, 『선조수정실록』 선조 5년 9월 1일 |
총론
[1532년(중종 27)∼1585년(선조 18) = 54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문신.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증직은 이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자는 군망(君望)이고, 호는 백록(白麓)이다. 본관은 영월(寧越)이고, 거주지는 서울인데, 황해도 배천(白川) 출신이다. 아버지는 부사(府使)신보상(辛輔商)이고, 어머니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호분순위사(虎賁巡衛司) 부위(副尉)민거(閔琚)의 딸이다. 둘째 부인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현감(縣監)송응서(宋應瑞)의 딸이므로, 그는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의 5촌 이모부였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휴암(休菴)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고봉(高峰)기대승(奇大升), 우계(牛溪)성혼(成渾), 율곡(栗谷)이이(李珥)와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명종 시대 활동
1552년(명종 7)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으며, 7년 뒤에 1559년(명종 14) 정시(庭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8세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서 성균관(成均館)박사(博士)가 되었다. 1563년(명종 18)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에 임명되어 순회세자(順懷世子)를 가르쳤는데, 세자는 명종과 인순왕후(仁順王后)심씨(沈氏) 사이에 태어난 유일한 혈육이었다. 당시 세자는 병약하여 서연(書筵)에서 사부(師傅)들의 가르침을 받고 글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때 서연에서 설서신응시가 문학권순(權純)과 함께 두 사람이 순회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데, 세자가 새로 강론할 책장을 읽지 아니하므로, 서연관(書筵官)이 두세 번 억지로 읽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세자가 끝내 그 말을 듣지 않고, 짜증을 부리면서 도리어 서연관으로 하여금 빨리 나가라고 소리쳐서, 서연관들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나왔다. 명종이 그 말을 듣고 놀라서, “경들이 동궁(東宮)을 보양하는 직임에 있으니,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세자를 보니 어리석고 나약해서 학문에 힘쓰지 않는다.” 하니, 설서신응시는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세자 사부를 사양하여,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으로 전직되었다.(『명종실록(明宗實錄)』 명종 18년 3월 18일) 당시 인종의 처외삼촌 이량(李樑)이 인사권을 잡고, 신응시의 명성을 듣고 한번 만나보자고 요청하였으나, 신응시가 끝내 이조 참판이량을 찾아가지 않아서 결국 그는 벼슬길에서 쫓겨났다.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순회 세자는 13세의 어린 나이로 돌아갔고, 명종의 혈손은 없었으므로 대가 끊어졌다. 이에 충격을 받은 문정대비(文定大妃)도 죽은 손자의 뒤를 따라 승하하였고, 또 순회세자를 보호하던 이조 판서이량도, 인순왕후의 형제인 심의겸(沈義謙)의 공격을 받고 실각되었다.
1563년(명종 18) 12월 신응시는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는데, 명종이 앞서 뽑힌 박순(朴淳) · 정윤희(丁胤禧) · 유전(柳琠) · 최옹(崔顒) 등 4명과 뒤에 뽑힌 기대승 · 이산해(李山海) · 신응시 · 이후백(李後白) 등 4명을 궁궐 뜰에 모아서 시험을 보이고 수석을 차지한 신응시와 나머지 7명에게 차등 있게 상품을 하사하였다.(『명종실록』 명종 18년 12월 2일) 당시 홍문록에 선발된 8명은 나중에 모두 정승 · 판서를 지낸 유명한 인재들인데, 그 중에서 신응시가 시문(詩文)의 제술에 가장 뛰어났던 것이다. 호당(湖堂)에 들어가서 곧바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남계집(南溪集)』 속집(續集) 권21 「홍문관부제학 증이조판서 신공신도비명(弘文館副提學贈吏曹判書辛公神道碑銘)」] 호당은 홍문관이고, 사가독서는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글을 읽으면서 학문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이다. 이때부터 3사(三司) 곧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는데, 그 중에서 홍문관에 가장 오랫동안 있었다. 1565년(명종 20)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566년(명종 21) 명종이 백관들에게 중시(重試)를 보이자,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5세였다.[『방목』] 중시에 뽑혀서 사헌부 지평(持平)과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을 번갈아 맡았다. 1567년(명종 22)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정랑(正郞)을 거쳐 예조 정랑이 되었다.[『남계집』 속집 권21 「홍문관부제학 증이조판서 신공신도비명」]
순회 세자가 갑자기 죽어서 자기 혈육이 끊어진 명종은 후궁에게서 서출 아들을 얻고자 무척 노력하였다. 그러나 병약한 명종이 후사(後嗣)를 얻지 못하자, 안팎에서 세자(世子)를 세우지 않고 있는 것을 크게 걱정하였다. 이때 신응시는 동료 황정욱(黃廷彧)과 같이 의논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세자를 세울 것을 건의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예조 판서의 저지를 받고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나 영의정이준경(李浚慶)이 명종의 허락을 얻아서 중종의 서출 7왕자 덕흥군(德興君)의 3자 하성군(河城君)이균(李鈞)을 후사로 삼으니, 그가 바로 선조(宣祖)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1567년 6월 명종이 3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는데, 그때 신응시는 남보다 갑절이나 슬퍼하여 조정에서 물러나올 때마다 사람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벽을 향해 눈물을 흘렸으므로, 집안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였다.[『남계집』 속집 권21 「홍문관부제학 증이조판서 신공신도비명」]
선조 시대 활동
1567년 선조가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인순대비(仁順大妃)의 명령에 따라 선조의 원래 이름 이균(李鈞)을 새 이름 이연(李㫟)으로 바꾸었는데, 왕의 새 이름은 예조 정랑신응시가 지어서 바친 것을 채택한 것이다. 그때 마침 중국 명나라에서 죽은 임금 명종에게 시호(詩號)를 올리는 칙사(勅使)와 새 임금 선조를 왕으로 책봉(冊封)하는 조사(詔使)를 연달아 파견하자, 우의정박순(朴淳)이 원접사(遠接使)와 반송사(伴送使)에 임명되어 칙사와 조사를 영접하였는데, 박순이 신응시와 이산해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서, 평안도 의주(義州)에 가서 사신을 영접하고, 또 전송하였다. 신응시는 시문(詩文)을 잘 지었으므로, 접반사(接伴使)가 중국 사신들과 대작(對酌)할 때 그가 즉석에서 시(詩)를 지어서 화답(和答)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정승박순은 선조 때 신응시를 중요한 자리에 천거하였다.
1567년(선조 즉위) 홍문관 교리(敎理)에 임명되었는데, 경연(經筵)에서 참석하여, 생부(生父) 덕흥군을 추존(追尊)하려고 하던 어린 선조에게 『황명통기(皇明通紀)』을 인용하여 이를 일깨워 주었는데, 이를 탐탁치않게 여기던 인순대비의 칭찬을 받았다.[『남계집』 속집 권21 「홍문관부제학 증이조판서 신공신도비명」] 1568년(선조 1) 춘추관(春秋館)에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하는 실록청(實錄廳)을 성치하였는데, 홍섬(洪暹)이 총재관(摠裁官)이 되고, 신응시를 비롯하여 황정욱 · 이산해 · 정철(鄭澈) · 유성룡(柳成龍) 등 당대의 재사(才士)들이 그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1년 8월 12일] 1569(선조 2) 이조 정랑에 임명되어, 선조 초기에 인사 행정을 담당하여, 서인 심의겸의 편을 든다고 비난을 받았다. 1570년(선조 3) 영남 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으므로 이조 정랑신응시를 보내어 특별히 재해 상황을 살펴보고 기민(饑民)을 구제하게 하였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3년 2월 1일] 그가 인순대비의 명령을 받고 달려가서 촌락(村落)을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물어보고, 고을의 수령들 가운데 탐욕을 부리거나 포학한 짓을 하는 자를 찾아내어 모두 처벌하였다.[『남계집』 속집 권21 「홍문관부제학 증이조판서 신공신도비명」]
1570년(선조 3) 겨울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황해도 배천(白川)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하였는데, 제전(祭奠)을 드리고 난 여가에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에서 예절을 논한 대목을 뽑아서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는데, 나중에 이것이 『주문문례(朱門問禮)』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남계집』 속집 권21 「홍문관부제학 증이조판서 신공신도비명」] 상례(喪禮)를 끝마치고, 상복(喪服)을 벗자마자, 1573년(선조 6) 옛날 관직인 이조 정랑으로 돌아가서, 비변사(備邊司)낭청(郎廳)을 겸임하였다. 그때 순무어사(巡撫御使)에 임명되어 호남(湖南) 지방으로 나가니, 수령들이 지레 겁을 먹고 조심하였다. 그러나 순무어사신응시는 전라도 영암(靈巖)과 무장(茂長) 두 고을의 수령이 왜구(倭寇)의 방비를 철저하게 하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선조가 비변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파직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기 20여 년 전의 일이었다.[『선조실록』선조 6년 6월 13일] 의정부 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쳐,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어, 예문관 응교를 겸임하였는데, 이는 장차 문형(文衡) 곧 대제학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홍문관 전적(典籍)을 거처 곧바로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되었다. 그때 직제학신응시가 선조에게 여섯 가지 잠언(箴言)을 지어서 올렸는데, 학문을 힘쓸 것[勤學], 백성을 사랑할 것[愛民], 어진이를 가까이 할 것[親賢], 간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納諫] 등이었다. 인순대비가 22세의 선조로 하여금 잠언을 가납(嘉納)하고 포장(褒奬)하게 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6년 1월 1일]
1574년(선조 7)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되었다.[『선조실록』선조 7년 2월 23일, 『선조수정실록』선조 7년 1월 1일 · 7월 1일] 우부승지신응시가 좌부승지정지연(鄭芝衍)과 함께 시사(時事)를 말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선조수정실록』선조 7년 7월 1일] 그때 선조가 전교하기를, “승지신응시 · 정지연은 사간원이 아뢰는 말을 저지하고, 자신들의 뜻을 아뢰었는데, 그들의 한 말이 비록 옳았다고 하더라도 그런 버릇을 키울 수 없으니, 모두 파직시키라.” 하였다.[『선조실록』선조 7년 8월 3일] 선조가 20세가 넘어서 친정(親政)을 하면서 인순대비의 세력을 멀리 하였다. 1575년(선조 8)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1576년(선조 9) 신응시의 서울집이 백악산(白岳山) 아래 있었는데, 개천의 아름다운 돌들을 담장 가에 옮겨두었다가 발각되었다. 선조가 중사(中使)를 몰래 보내어 이를 적발하고, 권력을 믿고 거리낌 없이 행동한다고 그를 미워하자, 대간(臺諫)에서 그를 탄핵하여, 감사에서 파직당하고, 그 고신(告身)도 3등(等)을 빼앗겼다.[『선조실록』선조 9년 2월 26일] 이리하여 한 동안 벼슬에서 물러나서 고향 황해도 배천에서 은거하였다.
얼마 뒤에 영의정박순의 추천으로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전직되었다. 그 뒤에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外直)을 자청하여 황해도 연안부사(延安府使)로 나갔다가, 임기가 차자, 조정으로 돌아와서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었다가, 전라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남계집』 속집 권21 「홍문관부제학 증이조판서 신공신도비명」] 1582년(선조 15) 중국 명나라 조사황홍헌(黃洪憲) · 왕경민(王敬民)이 황태자가 탄생한 사실을 알리려고 조선으로 나오자, 광주목사신응시를 불러서 의주 영위사(迎慰使)로 삼았는데, 그가 시문(詩文)에 능하였기 때문이다. 접빈사이이과 함께 의주에서 중국 사신을 영접하여 연회를 베풀고 시(詩)를 서로 화답하였는데, 접반사이이가 연고가 있으면 영위사신응시가 대신하였다. 사신의 접대가 끝나자, 다시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1583년(선조 16) 예조 참의가 되었다가, 병조 참지로 옮겼고, 1584년(선조 17) 다시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계갑일록(癸甲日錄)』]
그해 선조가 의정부 3의정에게 각각 현재(賢才)를 추천하게 하자, 영의정박순은 학행(學行)에 신응시를, 덕행(德行)에 이산보(李山甫)를, 장수 재목으로 서익(徐益)을 추천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17년 11월 1일) 이리하여 선조가 신응시를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하였는데, 그가 홍문관에 나가서 동료들을 모아놓고 강론할 글을 의논하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수레에 실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선조가 의관(醫官)을 보내고 약제(藥劑)를 하사하였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남계집』 속집 권21 「홍문관부제학 증이조판서 신공신도비명」] 1585년(선조 18) 1월 1일 혈압으로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4세였다. 신응시는 『주자대전』 중에서 예(禮)에 관한 부분을 따로 발췌하여 『주문문례』를 간행하였다.[『사계전서(沙溪全書)』 권8] 그의 아들 대제학신경진(辛慶晉)이 아버지 신응시의 시문(詩文)과 남긴 글을 모아서 『백록유고(白麓遺稿)』를 간행하였다.[『남계집』 속집 권21 「홍문관부제학 증이조판서 신공신도비명」]
성품과 일화
신응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채가 빼어났는데, 키가 커서 장신(長身)이고 피부가 옥과 같이 희었으며 성품이 명랑하여 좁고 막힌 병통이 없었다.[『남계집』 속집 권21 「홍문관부제학 증이조판서 신공신도비명」] 행동이 과묵하고 남에게 관대하였으나, 성격이 강직한데다가 뜻이 매우 높았다. 그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우러나왔고 임금의 앞에서 위엄을 무릅쓰고 간쟁(諫爭)하고 남김없이 말을 다하고 마음의 동요하는 바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정시(庭試)에서 일곱 번이나 장원할 만큼 문장에도 뛰어났다. 사람들은 신응시가 임금을 보필할 만한 동량(棟梁)의 재목으로 생각하여 재상이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신응시는 청백리로서 정직한 신조(信條)를 지키면서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고 권세와 이끗을 멀리하여 위아래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선조 18년 1월 1일 「신응시 졸기」] 이리하여 그는 끝내 문형(文衡)의 대제학(大提學)이 되지 못하고, 부제학(副提學)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가 박순만큼 오래 살았으면, 문형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판서와 정승의 자리에도 올랐을 것이다.
과거에 급제하고부터는 신응시는 차분히 자신을 지켰고, 권세가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낮은 벼슬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고, 오직 자기 직무에만 부지런히 힘썼다. 만년에 동인(東人) · 서인(西人)으로 분당될 때에는 비록 서인 심의겸의 당이라고 하여 배척을 당하였으나, 그의 논의가 공평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주장하기를, “대개 사람의 사정(邪正)과 시비(是非)는 마땅히 그 사람마다 그 됨됨이를 가지고 따져야 된다. 만약 저쪽은 옳고 이쪽은 그르다거나,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바르게 여기고, 뜻을 달리하는 사람은 바르지 않게 여기면, 관리의 임용이 당사자의 현부(賢否)와 관계없이 이루어져, 벼슬에 나오려고 애쓰는 자들만이 득세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명분과 절개는 쓸어버린 듯이 없어지고 세상의 도의는 점점 쇠퇴해질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사관(史官)의 사평(史評)에서, “그 뒤에 동서 붕당이 일어나서 서로 공방전을 벌여 선악의 구별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의 예언이 더욱 증명되었던 것이다.” 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18년 1월 1일 「신응시 졸기」]
1572년(선조 5) 신응시가 모친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을 때 그의 친구 남일(南逸)박응남(朴應男)이 배천으로 찾아와서 그의 문정(門庭)에 손님이 많은 것을 보고 묻기를, “그대는 어찌 손님이 이렇게도 많은가. 나는 평생 동안 사귄 친구가 두세 사람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가깝게 지낸 적이 없다. 직책이 대간에 있는데, 이미 그들과 친근히 지내다가, 그들의 죄를 탄핵한다면 원한이 더 깊어질 것이니, 애당초 서로 친근하게 지내지 않은 것이 제일 낫다.”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잠시라도 한 자리에 앉은 적이 없다.” 하였다. 그가 평소 가장 친근하게 지내던 고봉기대승이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다가,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돌아가자, 그가 상가(喪家)를 찾아가서 눈이 온통 진무를 정도로 곡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곡하는 것은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이지, 사사로운 정의 때문이 아니다.” 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5년 9월 1일) 신응시와 기대승 · 박응남은 모두 명종 때 이량의 세력에 맞서다가 벼슬길에서 쫓겨났으며, 선조 때 중용되었던 인재들이다.
1567년 선조가 왕위에 올랐는데, 인순대비의 명령에 따라 선조의 원래 이름 이균(李鈞)을 새 이름 이연(李㫟)으로 바꾸었는데, 왕의 새 이름은 예조 정랑신응시가 지어서 바친 것을 채택한 것이다. 태조이성계(李成桂)가 왕이 된 다음에 이름을 이단(李旦)으로 바꾸었는데, 단(旦)은 바다에 떠오르는 해를 뜻한다. 선조의 원래 이름인 이균(李鈞)은 균(鈞)이 서른근의 무거운 쇠를 뜻하므로 제왕의 이름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늘에 떠다니는 해를 뜻하는 연(㫟)을 써서 이연(李㫟)으로 바꾸었다. 왕의 이름은 대개 해와 관계있는 글자를 쓴 것은 임금이 하늘의 해[日]와 같은 존재라는 천명사상(天命思想)에서 나온 것이다. 왕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기휘(忌諱)하여. ‘휘(諱)’라고 하여 쓰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 다만 중국 명나라와 왕래하는 표문(表文) · 전문(箋文)의 외교 문서에는 사용되었다.
선조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 신응시는 오랫동안 경연에 참석하여 선조와 강론(講論)하면서 옳은 것을 권하고 그릇된 것을 배척하여, 임금을 보필하는 데에 매우 공로가 많았다.[『선조수정실록』선조 18년 1월 1일 「신응시 졸기」] 1567년(선조 즉위) 그가 홍문관 교리가 되었을 때 16세의 선조가 어느 날 경연에서 강론을 끝마치고 나서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황명통기』는 매우 좋은 책이다.” 하자, 신응시가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어디서 그런 책을 구해서 보셨습니까? 경연에서 강론하는 책 이외에는 일체 보지 말기를 바랍니다. 더구나 『황명통기』로 말하면, 그 끝부분의 논의가 바르지 못해서 일반 선비들도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는데, 하물며 임금께서 어찌 볼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것은 명나라 세종(世宗)이 생부 흥헌왕(興獻王)을 추숭(追崇)하려다가 이에 반대하는 신하 220여 명을 죄 주었던 일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선조수정실록』선조 1년 10월 5일] 이리하여 인수대비는 그가 경연에서 강론할 때 임금을 계도(啓導)한 공로가 있다고 칭찬하고, 비단을 하사한 다음에 어린 임금에게 계속 권장하도록 명하였다.[『남계집』 속집 권21 「홍문관부제학 증이조판서 신공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묘소는 황해도 배천군 동쪽 비봉산(飛鳳山)에 있는데, 현석(玄石)박세채(朴世采)가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남계집(南溪集)』 속집(續集) 권21 「홍문관부제학 증이조판서 신공신도비명(弘文館副提學贈吏曹判書辛公神道碑銘)」] 비문은 그의 5세손 신상동(辛相東)이,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박세채를 찾아와서 비명을 써달라고 부탁하여, 그가 죽은 지 1백여 년이 지나서, 세운 것이다. 그가 죽은 뒤에 광국 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대사헌(大司憲)에 추증(追贈)되었고, 그 뒤에 아들 신경진이 호성 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었기 때문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남계집』 속집 권21 「홍문관부제학 증이조판서 신공신도비명」]
황해도 배천 문회서원(文會書院)과 동서사(東西祠)에 제향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3] 1697년(숙종 23) 배천의 유생 신질(辛咥) 등이 상소하기를, “본 고을의 문회서원은 선조께서 어필(御筆)로 편액(扁額)을 써서 경적(經籍)과 함께 하사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불타버렸습니다. 그래서 명나라 조사주지번(朱之蕃)에게 청하여 다시 그 편액을 썼으며, 그 뒤에 중국의 남강현(南康縣)의 학제(學制)를 모방하여 동서사(東西祠)를 세워 이이 · 성혼 · 조헌(趙憲) · 안당(安瑭) · 신응시 · 오억령(吳億齡) · 김덕성(金德誠)을 주사(主祀)로 하고, 또 박세채를 추향(追享)하였습니다. 그 형세와 재력이 조잔(凋殘)하고 피폐(疲弊)하니, 청컨대, 다른 서원(書院)의 전례에 의하여 관(官)에서 제물과 폐백을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숙종이 그대로 따르고, 친히 ‘문회서원(文會書院)’이란 네 글자를 써서 승지김세익(金世翊)을 보내어 편액을 내리고 치제(致祭)하게 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23년 10월 1일]
첫째 부인 무령 정씨(武靈丁氏)는 별제(別提)정기(丁琦)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낳았다. 둘째 부인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현감송응서(宋應瑞)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낳았다. 송시열의 조부 송응기(宋應期)는 송응서와 동서간이므로, 신응시는 송시열의 5촌 이모부였다. 외아들 신경진(辛慶晉)은 율곡이이의 제자로서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헌을 지냈다. 외동딸은 참판윤흔(尹昕)에게 시집갔다. 손자 신희손(辛喜孫)은 젊어서부터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에게 수학하였는데, 그 정의(情誼)가 자제(子弟)와 같았으며. 군수를 지냈다.[『사계전서』 권47] 또 신응시는 형제가 7명인데, 서로 화목하게 지냈다. 그의 동생 신응명(辛應命)은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를 지내다가, 1586년(선조 19) 나이 36세 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백록유고(白麓遺稿)』
- 『간이집(簡易集)』
- 『계갑일록(癸甲日錄)』
- 『계미기사(癸未記事)』
- 『고봉집(高峯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명재유고(明齋遺稿)』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서계집(西溪集)』
- 『석담일기(石潭日記)』
- 『송계만록(松溪漫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시정비(時政非)』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 『오음유고(梧陰遺稿)』
- 『우계집(牛溪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조천기(朝天記)』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퇴계집(退溪集)』
- 『해동역사(海東繹史)』
- 『혼정편록(混定編錄)』
-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
- 『충암집(冲庵集)』
- 『화담집(花潭集)』
- 『동고유고(東皐遺稿)』
- 『미암집(眉巖集)』
- 『소재집(穌齋集)』
- 『사암집(思菴集)』
- 『약포집(藥圃集)』
- 『초간집(草澗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약포유고(藥圃遺稿)』
- 『송강집(松江集)』
- 『동강집(東岡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청계집(靑溪集)』
- 『중봉집(重峰集)』
- 『태천집(苔泉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기암집(畸庵集)』
- 『백강집(白江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지호집(芝湖集)』
- 『강한집(江漢集)』
- 『풍서집(豐墅集)』
- 『숭덕재유고(崇德齋遺稿)』
- 『모당집(慕堂集)』
- 『구천유고(龜川遺稿)』
- 『수초당집(遂初堂集)』
- 『검재집(儉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