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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8 기준 최신판




총론

[1561년(명종 16)~1626(인조 4) = 66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과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형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자는 백선(伯善)이고, 호는 장주(長洲) 또는 장연(長淵)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문충(朴文沖)이고, 어머니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윤종형(尹宗亨)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찰방(察訪)을 지낸 박관(朴寬)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충무위(忠武衛)부사직(副司直)을 지낸 박순령(朴舜齡)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5년(선조 18)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고, 6년 뒤인 1591년(선조 24)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1593년(선조 26)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26년 12월 13일] 1597년(선조 30) 병조 좌랑(佐郞)을 거쳐서, 방어사 종사관(防禦使從事官)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0년 8월 11일, 선조 30년 9월 14일]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으로 전임되었다가, 예조 좌랑에 임명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1년 2월 6일, 선조 31년 7월 14일] 1599년(선조 32)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고,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거쳐서,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다가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선조 32년 4월 23일, 선조 32년 8월 3일, 선조 32년 8월 17일, 선조 32년 12월 16일]

1600년(선조 33) 외직인 평안도 강계판관(江界判官)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3년 4월 6일, 선조 33년 10월 27일] 이듬해인 1601년(선조 34) 호조 정랑(正郞)을 거쳐서,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 되었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으로 전임되었다가,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되었다.[『선조실록』선조 34년 4월 24일, 선조 34년 5월 11일, 선조 34년 8월 13일, 선조 34년 9월 24일] 1602년(선조 35) 홍문관 부교리(副敎理)로 전임되었고, 시독관(侍讀官)을 거쳐서,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선조 35년 1월 5일, 선조 35년 8월 2일] 1603년(선조 36)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후, 군기시(軍器寺)정(正)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6년 6월 26일]

1604년(선조 37)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전임된 후,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7년 6월 2일, 선조 37년 12월 10일, 선조 37년 12월 26일] 1605년(선조 38)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로서 시강관(侍講官)을 겸하였다.[『선조실록』선조 38년 7월 27일] 1606년(선조 39)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서,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고, 이듬해에 병조 참지(參知)를 거쳐서,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선조 39년 8월 4일, 선조 40년 2월 22일, 선조 40년 8월 13일]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고,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로 전임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즉위년 3월 1일, 광해군 즉위년 7월 16일] 1609년(광해군 1)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승진되었고, 예조 참판(參判)을 거쳐서, 1611년(광해군 3) 형조 참판이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7월 3일, 광해군 1년 12월 14일, 광해군 3년 1월 20일] 1612년(광해군 4)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겸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로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4년 11월 24일] 이후 사간원 대사간과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서, 1614년(광해군 6) 형조 판서가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4년 12월 13일, 광해군 6년 9월 4일]

묘소와 후손

부인 행주 기씨(幸州奇氏)는 기경인(奇敬仁)의 딸인데, 1남 박계영(朴啓榮)을 두었다. 서자로 박생영(朴生榮)이 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