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일(兪命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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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39년(인조 17)~1690년(숙종 16) = 52세]. 조선 중기 현종(顯宗)~숙종(肅宗) 때의 문신. 의주부윤(義州府尹)과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만초(萬初)이고,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을 지낸 유비(兪棐)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생인(李生寅)의 딸이다.

현종~숙종 시대 활동

1660년(현종 1)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1669년(현종 10) 장릉참봉(章陵參奉)이 되었다가 1673년(현종 14) 전옥서(典獄署)봉사(奉事)로 승진하였다.[『도곡집(陶谷集)』 권15 「의주부윤유공묘갈명병서(義州府尹兪公墓碣銘并序)」 이하 「유명일묘갈명」으로 약칭]

1678년(숙종 4) 장흥고(長興庫)봉사(奉事)에 제수된 후, 1681년(숙종 7)에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유명일묘갈명」] 그 뒤 예조 좌랑(佐郞)을 거쳐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인 1682년(숙종 8)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지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8년 1월 12일, 숙종 8년 3월 27일, 숙종 8년 6월 25일, 숙종 8년 11월 10일, 숙종 8년 12월 4일] 1683년(숙종 9) 전국이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각 지방으로 어사(御史)들이 파견되었는데, 이때 유명일(兪命一)은 황해도로 파견을 나갔다.[『숙종실록』숙종 9년 1월 18일] 그해 2월 서울로 돌아와서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숙종실록』숙종 9년 2월 22일] 한편 이무렵 송시열(宋時烈)이 태조(太祖)의 시호(諡號)의 글자 수가 적다며 시호를 가상할 것을 주장하면서,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만으로도 가상할 근거가 충분하다고 하였다.[『숙종실록』숙종 9년 3월 25일, 숙종 9년 4월 1일] 이에 시호 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며 반대를 하는 목소리들이 나왔고, 그 가운데에는 유명일과 박태유(朴泰維)도 포함되어 있었다.[『숙종실록』숙종 9년 3월 25일, 숙종 9년 6월 12일]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박태유가 많은 이들이 송시열에게 부합하려고 한다며 비판을 하자, 오히려 유명일은 박태유가 송시열을 공격하였다면서 탄핵하였다.[『숙종실록』숙종 9년 6월 2일, 숙종 9년 6월 12일, 숙종 9년 7월 4일] 결국 박태유는 고산찰방(高山察訪)으로 좌천되었으나, 태조의 시호 추상과 관련된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西人)은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 갈라지기 시작하였고, 유명일은 노론에 편입되었다.

이어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을 교대로 역임하던 가운데, 1685년(숙종 11) 유명일이 사헌부 장령(掌令)홍수주(洪受疇)를 논핵하여 파면케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숙종실록』숙종 10년 6월 24일, 숙종 10년 9월 13일, 숙종 10년 9월 24일, 숙종 11년 2월 25일, 숙종 11년 4월 9일, 숙종 11월 10월 8일] 이 사건은 당파들이 서로 얽히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학유(學諭)김성대(金盛大)가 소론의 윤증(尹拯)을 배척하다가 정거(停擧)당하자, 노론의 송규렴(宋奎濂)이 이에 대한 부당함을 주장하여 그 정거가 풀렸다.[『숙종실록』숙종 11년 3월 25일, 「유명일묘갈명」] 그러자 남인(南人)의 홍수주가 이 명을 다시 거두어 줄 것을 계청하였고, 이에 노론의 유명일이 홍수주를 탄핵하였던 것이다.[『숙종실록』숙종 11년 3월 26일, 숙종 11년 10월 8일] 이렇듯 유명일은 노론 가운데에서도 과격파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당파의 축출에도 앞장섰다.

이후 유명일은 사간원 정원과 사헌부 장령,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숙종실록』숙종 11년 7월 16일, 숙종 11년 9월 27일, 숙종 12년 2월 14일, 숙종 12년 6월 13일] 그리고 그해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임명되어 부임한 후 의주 지역의 방비가 소홀한 점을 우려하여 약조(約條)를 지키고 관시(關市 : 외국인과의 교역)를 엄하게 하는 데에 힘썼으나, 이내 사임하고 교체되어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12년 8월 23일, 「유명일묘갈명」] 1687년(숙종 13) 외직으로 나가 안변부사(安邊府使)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두고 돌아왔는데, 이때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유폐되자, 눈물을 흘리며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고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유명일묘갈명」] 그리고 1690년(숙종 16) 2월 21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52세였다.

성품과 일화

유명일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집안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고, 조정에서는 공직(公直)한 절개를 지켰다. 재능과 지모는 족히 세상의 수요(需要)가 될 수 있었고, 문장은 나라를 빛내기에 족했다. 소박과 염약(廉約)으로 마음을 다졌고 소탈하고 평범하게 처신하였다.[「유명일묘갈명」]

묘소와 후손

유명일의 묘소는 처음에는 경기도 광주(廣州)에 조성하였으나, 뒤에 경기도 파주시의 파평산으로 옮겼으며, 부인 창원 황씨(昌原黃氏)와 합장하였다. 이의현(李宜顯)이 쓴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유명일묘갈명」]

부인 창원 황씨는 관찰사(觀察使)황준구(黃儁耈)의 딸로 자녀는 4남을 두었다. 장남은 진사(進士)유덕기(兪德基), 차남은 진사 유복기(兪復基), 삼남은 첨지(僉知) 유억기(兪億基), 4남은 진사 유택기(兪宅基)이다.[「유명일묘갈명」]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도곡집(陶谷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윤정, 「숙종대 태조 익호의 추상과 정계의 인식-조선 창업과 위화도회군에 대한 재평가」, 『동방학지』134,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