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윤손(安潤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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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0년(세종 32)~1520년(중종 15) = 71세]. 조선 중기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의 문신.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자는 홍조(弘祖)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용안현감(龍安縣監)을 지낸 안극변(安克辨)이고, 어머니 안산 김씨(安山金氏)는 성균관(成均館)사성(司成)을 지낸 김최(金最)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섬서(司贍署) 영(令)을 지낸 안철산(安鐵山)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의정부(議政府) 참지사(參知事) 등을 지낸 사간공(思簡公)안성(安省)이다.

성종 시대 활동

1474년(성종 5) 진사시(進士試)와 생원시(生員試)에 연이어 합격하고, 1476년(성종 7) 별시(別試)에 을과(乙科) 3위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임명되었다가 이어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다.[『양곡집(陽谷集)』 권11 「동지중추부사안공신도비명(同知中樞府事安公神道碑銘)」 이하 「안윤손신도비명」으로 약칭] 1478년(성종 9)에는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으로서 한명회(韓明澮)가 남효온(南孝溫)과 심원(深源) 등이 세조(世祖)를 비난하고 붕당(朋黨)을 만들려 한다며 탄핵하자, 남효온이 강응정(姜應貞), 박연(朴演) 등과 함께 결성한 것은 붕당이 아니라 계(契)라며 변호하였다.[『성종실록』성종 9년 4월 24일] 같은 해 안윤손(安潤孫)은 임사홍(任士洪)이 귀양 간 일에 연루되었는데, 이때 임사홍의 아버지 임원준(任元濬)이 안윤손은 중종이 임사홍을 아끼는 바람에 주서(主書)로 낙점되지 못하였다고 김수동(金壽童)에게 말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안윤손은 임금의 마음을 함부로 아는 척 하였다며 불경죄로 추국을 당하였는데, 김제신(金悌臣), 심회(沈澮), 허종(許琮) 등이 그의 무고함을 아뢰고, 여러 대간(臺諫)들이 의논한 결과 죄를 벗을 수 있었다.[『성종실록』성종 9년 6월 19일, 성종 9년 6월 20일, 성종 9년 6월 21일, 성종 30년 3월 4일] 이어 안윤손은 경연청(經筵廳) 전경(典經)이 되어 수렵의 폐단과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였다.[『성종실록』성종 10년 3월 1일]

1479년(성종 10)부터 안윤손은 홍문관(弘文館)정자(正字)와 경연청 전경을 거쳐, 홍문관 저작(著作)과 홍문관 박사(博士), 홍문관 수찬(修撰),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홍문관 교리(校理)로 홍문관 내에서 계속하여 승진하였다.[『성종실록』성종 10년 5월 1일, 성종 10년 5월 12일, 성종 11년 6월 2일, 성종 11년 9월 5일, 성종 12년 6월 26일, 성종 13년 2월 25일, 성종 14년 8월 7일, 성종 14년 8월 23일] 그리고 1484년(성종 15)에는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1486년(성종 17)에는 북도(北道) 지방이 피폐해졌다하여 특별히 회령부 판관(會寧府判官)에 임명되었는데, 문관(文官)으로서 북방(北方)에 나가 수재(守宰)가 되는 것은 안윤손이 처음이었다.[『성종실록』성종 15년 2월 8일, 「안윤손신도비명」] 1489년(성종 20) 5월에는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올라,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북방 오진(五鎭)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성종실록』성종 20년 5월 18일, 성종 20년 5월 30일]

이듬해인 1490년(성종 21) 이녹숭(李祿崇)의 청탁을 들어준 것이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 물러났으나, 얼마 후에 직첩을 돌려받고 곧 대신들의 천거를 받아 다시 임용되었다.[『성종실록』성종 21년 4월 16일, 성종 21년 7월 7일, 성종 21년 10월 15일] 그리고 1491년(성종 22) 서쪽을 정벌하러 가는 도원수(都元帥)이극균(李克均)의 천거로 안윤손은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성종실록』성종 22년 7월 28일, 「안윤손신도비명」] 그러나 이듬해인 1492년(성종 23) 어머니가 연로하였으므로 외직(外職)을 청하여 금산군수(錦山郡守)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아전들을 엄격히 통제하며 고을을 다스렸다.[「안윤손신도비명」]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498년(연산군 4) 종부시(宗簿寺)첨정(僉正)에 임명되었고, 이어 사복시(司僕寺)부정(副正)이 되었다.[「안윤손신도비명」] 이어 1499년(연산군 5)에는 무재(武才)를 인정받아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라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가 되었으나, 때마침 침입해온 왜구를 막지 못하였다고 파직되었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연산군 5년 9월 23일, 연산군 6년 1월 17일, 연산군 6년 1월 19일, 연산군 6년 2월 1일, 연산군 6년 2월 22일] 그리고 그 벌로 장형(杖刑)에 처해졌으나, 왜군이 들어온 곳이 평상시에는 수비를 하지 않는 곳이라는 점이 참작되어 장형은 면할 수 있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6년 2월 22일, 연산군 6년 2월 26일] 그러는 사이에 안윤손은 복직되어 1500년(연산군 6) 2월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으며, 1502년(연산군 8) 2월에는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6년 2월 5일, 연산군 8년 2월 9일] 이어 1503년(연산군 9)에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및 형조 참의(參議)를 지냈다.[『연산군일기』연산군 9년 5월 6일, 연산군 9년 5월 10일] 이어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고, 3년 상을 마친 후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그리고 정조사(正朝使)로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1506년(연산군 12)에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안윤손신도비명」]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 이 발생하여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인 1507년(중종 2) 안윤손은 주청부사(奏請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반정의 당위성을 알리고 중종의 승습(承襲)을 주청하였다.[『중종실록』중종 2년 7월 22일] 이어 한성부좌윤과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그는 공신 임명에 신중을 기할 것을 주장하였다.[『중종실록』중종 2년 7월 24일, 중종 2년 8월 7일, 중종 2년 9월 1일, 중종 2년 9월 10일, 중종 2년 9월 11일] 1508년(중종 3) 함경북도절도사(咸鏡北道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노쇠하여 말을 탈 수 없다는 유순(柳洵)의 의견에 따라 안윤손은 체직되었다.[『중종실록』중종 3년 2월 26일, 중종 3년 2월 29일] 이후 한성부우윤과 한성부좌윤에 다시 임명되었다가, 1509년(중종 4) 윤9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다.[『중종실록』중종 3년 7월 4일, 중종 3년 12월 6일, 중종 4년 윤9월 27일] 이때 그는 서적들을 향교에 비치해 유생들의 강습에 도움을 줄 것을 청하였고, 이에 조정에서는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소학(小學)』, 『자지통감(資治通鑑)』, 『송감(宋鑑)』 등을 하사하였다.[『중종실록』중종 5년 1월 21일]

이어 형조 참판(參判)이 되었는데, 아들 안자문(安子文)이 인왕산 기슭에 집을 짓고 입안(立案)을 위조한 것이 발각되는 사건에 연루되면서 파직되었다.[『중종실록』중종 7년 1월 12일, 중종 7년 6월 23일, 중종 7년 6월 24일, 중종 7년 6월 25일] 이후 1520년(중종 15) 성균관 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체직되었다. [『중종실록』중종 14년 1월 14일, 중종 15년 1월 4일] 그리고 그 해 윤8월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1세였다.[「안윤손신도비명」]

성품과 일화

안윤손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평생동안 청렴하고 소박하여 살림을 늘리지 않았다. 또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살면서 좋은 날이나 명절이 되면 반드시 술과 찬을 마련하고 자손들을 모아 놓고서 어버이의 즐거움을 다해드린 뒤에야 그쳤다.[「안윤손신도비명」] 아울러 사람됨이 후중하고 정직하였는데, 성종조(成宗朝)에 사관(史館)에 뽑혀 들어가 맨 먼저 임사홍의 간사한 짓을 적발하여, 뒷날 사관(史官)의 법이 되니 당시에 훌륭히 여겼다. 벼슬살이에는 직무에 임하여 부지런하고 조심스럽게 법을 지키며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는데, 만년에 아들로 인하여 불의의 누명을 얻게 되었다. 사림(士林)들이 모두 실정이 아님을 알았으나, 안윤손이 자식을 위해 숨기고 스스로 발명하지 않았으므로, 시의(時議)가 애석하게 여겼다.[『성종실록』성종 8년 2월 17일]

한편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해진다. 한림(翰林)으로 있을 당시 일찍이 임금을 야대(夜對)에 모셨는데, 강독이 끝나자 경연관(經筵官)이 모두 물러갔으나 도승지(都承旨)임사홍은 다시 들어가 부복(俯伏)하였고, 안윤손 역시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임사홍이 안윤손이 뒤에 있음을 모르고, “요즈음 대간이 말을 경솔하게 하니, 청컨대 종종 견책하소서.”하자, 임금이 답하기를, “인주(人主)의 위의(威儀)는 비단 격렬한 천둥일 뿐만이 아닌데, 여기에 견책이 뒤따른다면 누가 감히 할 말을 다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안윤손이 이 대화를 사책(史冊)에 크게 써서 표시함으로써 이에 임사홍의 간악함이 비로소 알려져 그를 논박하여 의주(義州)로 귀양을 보냈다.[「안윤손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안윤손의 묘소가 어디에 위치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소세양(蘇世讓)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의 내용은 전해진다.[「안윤손신도비명」]

안윤손의 부인 순천 김씨(順天金氏)는 김원석(金元石)의 딸로,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안자흠(安子欽)은 제검(提檢)을 지냈고, 차남 안자명(安子明)은 부사직(副司直)을 지냈으며, 삼남 안자문은 진사(進士)이다. 장녀는 장악원(掌樂院)정(正)권성(權晟)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성균관 전적(典籍)이문창(李文昌)에게 출가하였으며, 삼녀는 찰방(察訪)윤내신(尹來莘)에게 출가하였다.[「안윤손신도비명」]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안산김씨족보(安山金氏族譜)』
  • 『양곡집(陽谷集)』
  • 『충재집(冲齋集)』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두산백과』
  • 원중거 저, 박재금 역,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소명출판,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