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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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서씨(徐氏)(bulgaria.България).수도는 소피아(София, Sofia).

부여족이 서방으로 이동, 불가리아 왕국 세워...

몽고반점 가진 서양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 뿐!

부여(夫餘)는 한국 배달(倍達) 민족 직계 조상 중 하나이다. 신채호는 한때 한국 민족을 ‘부여족(夫餘族)’이라고 부르기 조차 하였다. 부여(夫餘)는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늦게 잡아도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약 1000여 년간 쑹화(松花) 강, 넌(嫩) 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 일대에서 크게 활동했다.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부여’는 ‘산해경(山海經)’의 불여(不與), ‘일주서(逸周書)’의 부루(符婁), ‘사기(史記)’의 부여(夫餘), ‘논어주소(論語注疏)’의 부유(鳧臾) 등으로 표기된다.

당시 고대 한자 발음으로 볼 때, 이들의 공통 발음은 짧은 소리로는 ‘불’, 긴 소리로는 ‘부르’다. ‘부르’는 더 긴 발음으로 ‘부유’로도 발음된다. 부여(夫餘)는 기원후 4세기 전반기까지는 동북 아시아의 최선진국이었으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이었다. 예컨대,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는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며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또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기록했다.》

부여의 통치조직은 중앙의 국왕 아래 최고 귀족장으로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여러 ‘가(加)’가 있어서 전국을 각각 동서남북의 사출도(四出道)로 나누어 통치했다. 돼지 개 소 말이 등장하는 한국민족의 ‘윷놀이’는 부여에서 유래한 민속이다. ‘가’들 가운데 왕족, 왕비를 내거나, 가장 강력한 ‘가’는 별도로 고추가(古雛加)라 칭했다. ‘가’ 제도와 고추가는 고구려(高句麗)에서도 신분제로 계승됐다.

부여의 고추가와 불가리아 고추불가 제국

신채호는 부여족의 특징은 정착지에 반드시 ‘불’자를 붙여 국호를 짓는데, 일찍이 만리장성 부근으로 이동해 들어온 한 ‘부여족 군단’을 추적했지만, 그 행방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했다. 어떤 계기인지는 불명하나, 부여족(夫餘族)의 일단이 4세기 말엽 서방으로 이동해 초원길을 거쳐 중앙 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 ‘캅카스’ 지방에 도착했다.

요동부터 카스피 해까지 이어지는 밝안산(백두산)∼부여호∼발칸산∼발카시호∼발칸산의 명칭 벨트가 부여족의 초원길 이동을 시사해 준다. 이 지방은 비잔틴 제국의 속지였다가 그에 앞서 이동해 온 동방민족인 아발(Avar·柔然)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부여족은 5∼7세기 초까지 돈 강 양안과 북캅카스에 흩어져 정착했다. 서양사에서는 이때부터 부여족이 불가(Bulghar)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 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돈 강 하류, 흑해 연안의 아발 세력이 약화되자, 635년 불가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 부족연합을 결성해 아발 지배로부터 독립해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 그러나 건국 7년 만인 642년 쿠브라트 칸은 사망했다. 쿠브라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투쟁 끝에 헤어졌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쿠비 불가’국을 수립했다가 그 남부를 장악했던 하자르(Khazar)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넷째 아들은 판노니아 평원(지금의 헝가리)을 찾아가 아발족에 복속하였다. 다섯째 아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비잔틴 제국에 보호를 구했다가 결국 복속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끝까지 외세에 복속하지 않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었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는 북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이름 붙인 볼가(불가·Volga) 강과 카마(고마·Kama) 강의 합류지점에 '고추 불가(Kotchou-Bulghar)국'을 건설하였다. 코트라그의 ‘고추 불가’국 명칭은 그들이 ‘고추가(加)’임을 표시하여, 그들이 ‘부여족’이라는 사실의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고추 불가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다. 고추불가국에는 922년 바그다드의 사절단이 도착하여 아랍 세계와의 통상이 시작됐는데, 이 사절단이 ‘고추불가’국을 볼가 강의 명칭을 따 ‘볼가불가(Volga Bulghar)’라 부르면서 아랍 세계에 그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추불가’족은 현재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 사는데, 그 언어의 문법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 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돼 동양인(한국인)의 모습이다.

○ 불가리아 소피아와 백제 사비성

한편,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서방 흑해 연안을 횡단해서 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에 도착했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4세는 680년 군대를 급파하여 불가족의 퇴거를 명하였다. 이때 비잔틴 로마군의 연락장교가 불가족의 군영 안에서 생활하면서 관찰을 기록하여 불가족의 생활양식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불가족과 비잔틴 제국 로마군 사이의 협상이 결렬돼 681년 대결전을 펼친다. 불가족 아스파르흐 칸은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 또는 Tangur)’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祭天)의식을 행했다고 로마군 연락 장교는 기록했다.

불가족은 681년의 대결전에서 승리하고, 정착하여 그해에 ‘불가리아’ 왕국을 건국했다. 국호 ‘불가리아’는 ‘불가(불)족의 땅(Bul+garia)’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고대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년)이다. 불가족은 귀족이 돼 ‘보야’(Boyar·‘부여’의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고 불렸으며,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불가리아 제1제국 귀족의 ‘보야’ 호칭도 그들이 ‘부여’족임을 알려 준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9세기 초에 판노니아 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대국이 되어서, 서쪽으로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니케포로스 1세의 비잔틴 제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고 809년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불가리아 황제 크룸(Krum) 칸에게 역습당해 참패했다. 크룸 칸은 비잔틴 로마군의 요새 ‘사르디카’를 점령했으며, 811년에는 산맥 고개에서 매복했다가 로마군을 대파해 비잔틴 황제 니케포로스 1세가 전사했다.

대승한 불가리아의 크룸 칸은 지금의 발칸 반도 대부분에서 로마군을 추방하고 수도를 사르디카로 옮겨 이름을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소피아)로 정했으며, ‘소비’의 동산에 올라 조상신 ‘단군(檀君)’ 에게 승전의 제천 제사를 올리고, 산 이름을 ‘발칸 산’(밝안산, 밝산, 白山·고대 한민족이 제천의식을 행한 산)으로 정하였다. 필자는 1989년 불가리아를 여행 답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서울 북악산처럼 발칸 산은 수도 소피아에 붙어 있는 높지 않은 산이었으며 크룸 칸의 제천 유적도 일부 남아 있었다. 발칸 산에서 발칸 산맥, 발칸 반도의 명칭이 나왔다. 이것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지배층이 부여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부여족은 어디를 가나 나라를 세울 때는 서울을 ‘소비’ 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예컨대 부여족의 일파가 세운 백제가 ‘하남 위례성’을 잃고 남쪽으로 천도해 지금의 부여에 수도를 정했을 때, 백제 성왕은 538년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수도 이름을 ‘사비(泗=)’로 정했다. ‘소비’와 ‘사비’는 호환된다.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수도를 ‘소비’라고 호칭한 것도 불가족이 부여족이라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이다.


○ 몽고반점을 간직한 불가리아인의 비밀


불가리아 황제 크룸 칸은 814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다가 병사했다. 패전으로 매우 취약해진 비잔틴 제국은 위기에서 구출됐다. 뒤를 이은 불가리아의 칸은 비잔틴 제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긴 평화의 시대가 오고, 불가리아의 보리스(Boris) 칸은 864년에는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여 기독교 국가가 됐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11세기들어 약화되어 이번에는 도리어 비잔틴 제국의 공격을 받고 그 속주로 떨어졌다. 그 사이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족 모습을 많이 갖게 됐다. 불가리아는 12세기 후반 다시 독립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년)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제2제국의 지배층은 이미 슬라브화하여 제1제국 지배층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이다. 부여족은 불가리아 주민에게 독립과 역사로 남아 있고, 발칸 산, 발칸 산맥, 발칸 반도, 소비 등 다수의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불가리아 말(언어) 문법 구조로 남아 있고, 문화와 생활양식의 전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 갓난아기 엉덩이의 반점(몽고반점)으로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 세계에서 갓난아기의 반점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뿐이다. 그 원인은 불가리아인의 원조상이 부여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가리아와 유럽 역사학자들은 현재 원(原) 불가족(Proto Bulgar)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단념하고, 5세기 흑해지방 마그나 불가리아를 그 기원으로 삼아 역사를 쓴다. 필자는 바로 그 이전의 원래 '불가족'이 동방의 ‘부여족’임을 처음으로 밝히고 강조하는 것이다.

서씨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

고조선(古朝鮮)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徐國)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요(고도)(皐陶)의 아들. 백익(伯益) 또는 백예(伯翳)라고도 한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절강 서씨(浙江 徐氏)는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절강)성에서 유래된 성씨인데 중국 명나라 절강성 출신 시조 서해룡(徐海龍)의 증손자 서학(徐鶴)으로부터 이어진 중국계 한국 성씨이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

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

기자조선의 후손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

기자조선의 영역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

부여씨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

백제 부여씨의 분파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

부여 부여씨의 인물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여현

여울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

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

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

백제 부여씨의 인물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

우복(優福)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

부여기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

부여고(夫餘古)

부여력(夫餘歷)

부여고(夫餘固)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

부여교기 - 30대 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부여왕 계보

백제왕 계보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 [[1]]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황룡(黃龍)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곡창(鹄蒼)

곡창(鹄蒼)

세계 최초 개이름.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泰山(태산)=서산(徐山)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월병(月餠)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대장군 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토루(土樓)

초계토루(初渓土楼)=푸젠성 토루(福建省土楼)=복건성 토루(福建省 土樓)

중국 푸젠 성 등지의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주거 형태.

초계토루군 서씨의 집성촌으로 가장 먼저 알려진 토루군입니다.

중국 푸젠성[福建省] 룽옌시[龙岩市]의 융딩[永定]에 위치한 토루(土楼).

쉬[徐]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추시춘[初溪村]에 지어진 토루군(土楼群)이다. 융딩[永定]에 있는 위앤투러우[圆土楼] 중 가장 원시적인 곳이자 커자(객가)[客家]의 인문적 색채가 잘 드러난 곳이다. 추시춘[初溪村] 쉬[徐]서씨의 3대조가 명대(明代, 1419)에 세운 지칭러우[集庆楼]가 대표적이다.

땅은 넓지만 행정과 공권력이 얇게 퍼져 있는 중국 특성상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고 계투나 비적, 맹수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만든 공동주택으로, 현대의 아파트에 비교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건물별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집성촌과 같은 역할을 하며 'xx루(樓)'와 같은 이름을 가진다.

12세기 이래 중국 남부로 이주해 온 객가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20세기에도 건축되었다. 전청루(Zhencheng Lou, 振成樓)는 191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중국 사신 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새만금 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서귀포(西歸浦)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서복(徐福)과 서귀포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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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원(徐載源): 1966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