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서씨
성씨 = 달성 서씨 (達城 徐氏)
관향 = 대구광역시
중시조 = 서진(徐晋)
인물 = 서균형, 서침, 서사선, 서변, 서중호, 서종철, 서정화, 서석재, 서정돈, 서석구, 서상기 , 서병수, 서승환, 서범수, 서영교, 서용교 서석준, 서규용, 서정돈, 서돈각,서일교
년도 = 2015
인구 = 407,431명
달성서씨(達城徐氏)는 대구광역시 대구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목차
- 1 역사
- 2 가족
- 3 항렬자
- 4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 5 기자조선의 후손설
- 6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
- 7 백제 부여씨의 분파
- 8 부여 부여씨의 인물
- 9 백제 부여씨의 인물
- 10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 11 역대 서국(徐國) 국왕
- 12 부여왕 계보
- 13 백제왕 계보
- 14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
- 15 서씨 분파
- 16 대구 서씨와 구분
- 17 집성촌
- 18 인물
- 19 달성공원(達城公園)
- 20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 21 달성공원 서침나무
- 22 구암서원(龜巖書院)
- 23 숭현사
- 24 대구 내곡동 심락재(大邱內谷洞尋樂齋)
- 25 대구 대림동 서종호 주택
- 26 달성서씨 시조 서진의 7대손인 서건손이 울산입향조
- 27 달성 서씨 대종회 옛 구암서원 기부채납..."구계 서침 선생, 정신 계승"
- 28 언제나 꼿꼿했던 달성서씨 문중, 손님맞이 음식 - 사천리 달성서씨 새내마을
- 29 영주 용혈리 달성서씨재사(榮州 龍穴里 達城徐氏 齋舍)
- 30 가창면 대일1리 대일박마을 달성서씨 집성촌
- 31 양산 달성서씨집성촌(達城徐氏集姓村)
- 32 중방동 달성 서씨 집성촌(中方洞 達城 徐氏 集姓村)
- 33 칠곡 달성서씨(達城徐氏)
- 34 청도 달성서씨(達城徐氏)
- 35 창원 달성서씨(達城徐氏)
- 36 김천 달성서씨(達城徐氏)
- 37 성주 달성서씨(達城徐氏)
- 38 경산 달성서씨(達成 徐氏)
- 39 영천 달성서씨(達城徐氏)
- 40 음성 달성서씨(達城徐氏)
- 41 순창 달성서씨(達城徐氏)
- 42 부안 달성서씨(達城徐氏)
- 43 여수 달성서씨(達城徐氏)
- 44 마산 회원동 달성 서씨 시혜불망비(馬山檜原洞達城徐氏施惠不忘碑)
- 45 대구 중구 진골목
- 46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47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 48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 49 밴드 가입방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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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같이 보기
역사
이천서씨(利川徐氏)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 8세손인 중시조 서진(徐晉)은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오르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출생년도는 대략 서기 1260년에서 1280년 사이로 추정된다. 부인은 초계 주씨이다.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은 대구 달성공원(達城公園)에 있다. 2세는 문하시중(門下時中)찬성사(贊成事) 서기준(徐奇俊), 3세는 문하시중(門下時中)찬성사(贊成事) 서영(徐穎)이다.
4세 서균형(徐鈞衡, 1340년 ~ 1391년)이 1360년(공민왕 9년)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평리(門下評理) 등을 거쳐 1389년(공양왕 1)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재직시 왕명으로 폐왕 우왕을 강릉에서 살해하였고, 1390년 예문관대제학을 거쳐 1391년 양광도도관찰사가 되었다. 시호는 정평(貞平)이다.
5세 서침(徐沈)은 조선조에 전의소감(典醫少監)을 거쳐 전라도처치사를 지냈다. 조선 세종조에서 대구 달성을 나라의 관방으로 쓰겠다며 거두어 들이고자 하며 그 보상책을 논하자 침이 보상받기를 사양하고 그 대신 대구 부민들이 관청에 바치는 적모의 이자를 한 석당 닷되씩을 감해 줄것을 주청하니 조정에서 특별히 허락하여 대구 부민들이 조선말까지 그 혜택을 받았다. 서침의 박시제중(博施濟衆)에 감복(感服)한 대구 사림(士林)들이 1665년에 대구에 구암서원을 건립하고 서침을 봉안하여 매년 제향하였다. 세종이 회화나무를 심어 침의 마음을 기리게 했는데 현재 달성공원 (대구)달성공원내에 있는 달성공원 서침나무가 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침은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서문한(徐文翰)은 승사랑으로 광흥창 부승을 거쳐 현감을 지냈고, 차남인 서문간(徐文幹)도 중시에 올라 현감을 역임했으며, 3남 서문덕(徐文德)은 이조정랑과 만경현감을 지냈다. 대사간이었던 서충(徐衷)의 증손인 서한정(徐翰廷)은 세종 때 진사로 태학에서 학문을 연구했으나, 수양대군(세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소백산 기슭에 은거하였다.[1]
임진왜란 때 서응시(徐應時)는 중봉 조헌의 휘하에 들어가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으며(이조판서에 추증), 서인충(徐仁忠)은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김상헌과 함께 화의를 반대했다. 또 서수천(徐壽千)은 이순신 막하에서 선봉수문장으로 임명되었다.
근현대 들어 구한말에는 시서화에 능해 팔능(八能)이라 불렸던 서병오(徐丙五)가 있으며,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서상일(徐相日)과 총독부 요인을 암살하려다 체포된 서상한(徐相漢) 형제가 유명하다. 또 사헌부 감찰 서목렬(徐穆烈)의 아들 서재승(徐在承)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영주 근방에서 활약하였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連城君))-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대부.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증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본인: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손자 : 서문한(徐文翰 현감)
- 증손자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
- 증손자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
- 고손자: 서지원(徐智元 학자)
- 고손자: 서인원(徐仁元 목사)
- 고손자: 서용원(徐勇元 생원)
- 고손자: 서숙원(徐叔元 생원)
- 고고손자: 서우(徐佑 (증贈) 형조참의(刑曹參議))
- 증손자 : 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
- 손자 : 서문간(徐文幹 현감)
- 손자 :서문덕(徐文德 현감)
- 손자 : 서문한(徐文翰 현감)
- 동생 : 서습(徐漝 생원)
- 동생 : 서환(徐渙 생원)
- 본인: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증조할아버지: 서지유(徐之宥 상호군)
- 증조할아버지: 서원(徐遠 생원)
- : 서충(徐衷) 대사간)
- : 서사민(徐士敏 지군사(知郡事))
- : 서균(徐均 생원)
- : 서한정(徐翰廷 증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 : 서진(徐震 종사랑(從仕郞))
- : 서호(徐浩 전연사 직장)
- : 서치(徐治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
- : 서진(徐震 종사랑(從仕郞))
- : 서한정(徐翰廷 증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 : 서균(徐均 생원)
- : 서사민(徐士敏 지군사(知郡事))
- 작은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 서충(徐衷) 대사간)
- 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증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항렬자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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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幹) 상(相) |
병(炳) 흠(欽) 광(光) 口열(烈) 병(丙) |
태(泰) 口기(基) 정(廷) 재(載) 口곤(坤) 口규(奎) |
석(錫)口 화(和) 진(鎭)口 |
口수(洙) 口원(源) 口호(浩) |
동(東)口 병(柄)口 상(相)口 정(正)口 |
口교(敎) | 보(輔)口 규(逵) |
口덕(德) | 영(永) |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 부여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
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
기자조선의 후손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한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한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한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
기자조선의 영역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
부여족(부여씨)의 후예설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융과 여동생(부여태비)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왕(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왕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
백제 부여씨의 분파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
부여 부여씨의 인물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
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
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
백제 부여씨의 인물
우복(優福)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부여고(夫餘古)
부여력(夫餘歷)
부여고(夫餘固)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
부여교기 - 30대 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 약목(若木)
부여왕 계보
- 동명왕(東明王)
백제왕 계보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대구 서씨와 구분
달성(達城)서씨와 대구(大丘)서씨는 족보상으로 시조가 다르다. 달성 서씨는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있고, 대구 서씨는 고려 군기소윤(軍器少尹) 서한(徐閈)을 시조로 한다. 달성 서씨와 대구 서씨는 근원이 같다고 추측되지만 분파된 시기와 계대를 확실히 고증할 수 없다. 달성서씨는 판도공파 또는 향파(鄕派)라 하고, 대구 서씨는 소윤공파 또는 경파(京派)라 한다. 두 파는 1702년(肅宗 28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 하여 임오보(壬午譜)를 만들었으나 1736년(영조(英祖) 12년)에 경파(京派)만이 단독 족보를 만들어 대구 서씨(大丘徐氏)로 갈라섬으로써 양파가 족보를 달리하게 되었다. 임오보에서 판도공파(달성 서씨) 계보 서두에 기록된 원문에 "版圖公派亦系達城必是同貫而世代已遠譜牒無徵未能明知故不敢渾錄於本譜姑爲別譜以附篇末(같은 관향인데 세대가 멀고 보첩으로 증명할 수 없어 능히 알지 못하므로 본보에 섞어서 기록하지 못하고 별보로 하여 책 끝에 붙인다)"하였다. 과거에 본관을 혼용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대구 서씨인데도 호적에는 본관이 달성으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고, 달성 서씨인데도 호적에는 본관이 대구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조선조 방목 등 각 문헌에 대구 서씨 인물들의 관향이 달성으로도 되어 있다.
집성촌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동
- 대구광역시 동구 (대구광역시)동구 도동
- 대구광역시 북구 (대구광역시)북구 태전동 (이매)
- 경상남도 고성군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오동리
- 경상남도 고성군 (경상남도) 고성군 삼산면 병산리
- 경상남도 밀양시
-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좌삼리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조산리
-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예둔리
- 경상북도 영천시 본촌동,봉동,작산동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어은리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평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 가안리 가천마을-의병장 서인찬(徐仁瓚) 의사와 항일의병 활동을 한 서중표(徐仲杓) 의사의 고향
-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평천리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
- 경상북도 안동시 수하동
- 충청북도 청주시 북이면 장재리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지경리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 전라남도 순천
- 서울특별시 송파구
인물
- 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
- 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
- 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
- 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
- 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
- 서섭(徐涉 남은(南隱).유학자)
- 서사원(徐思遠 학자)
- 서한정(徐翰廷 학자)
- 서효재(徐孝載 학자)
- 서사진(徐思進 임진왜란 의병장.이재(怡齋))
- 서인충(徐仁忠 임진왜란 장군(의병장))
- 서몽호(徐夢虎 임진왜란 의병장)
- 서방경(徐方慶 임진왜란 의병장)
- 서응시(徐應時 임진왜란 의병장)
- 서수천(徐壽千 이순신장군 막하 수문장)
- 서시립(徐時立 효자)
- 서변(徐忭 학자)
- 서찬규(徐贊奎 한말 학자)
- 서효격(徐孝格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 서효원(徐孝源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 서효달(徐孝達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 서효신(徐孝信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장)
- 서상일(徐相日 항일 독립운동가)
- 서상한(徐相漢 항일 독립운동가)
- 서재승(徐在承 항일 의병장)
- 서상경(徐相庚 독립운동가)
- 서병오(徐丙五 동양화가)
- 서동균 (서화가)
달성공원(達城公園)
달성공원은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에 있는 공원이다. 본래 달성토성이었다. 면적 12만 8,700m2. 도심 속에 숲이 우거진 시민의 휴식처로서, 삼한시대에 부족국가를 이루었던 달구벌(達句伐)의 성터라고 한다. 고려 중엽 이후 달성 서씨(達城徐氏)가 대대로 살던 사유지였으나, 조선 세종(世宗) 때 서씨 일문이 헌납하여 국유로 귀속되었다. 1905년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1967년 5월 대구시에서 새로운 종합공원 조성계획을 세워 현재의 대공원으로 만들었다. 공원은 토성(土城) 1,600m의 사적과 산책도로 ·잔디 ·광장 ·화단 등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 600평의 종합문화관을 비롯하여 동물원 ·관풍루(觀風樓) ·망향루(望鄕樓)가 있다. 그 밖에 동학의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동상, 의병장 허위(許蔿)의 공덕비,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어린이 헌장비, 이상화 시비(李尙火詩碑) 등과 어린이 놀이터가 있다.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
달성공원 서침나무
구계 서침선생이 헌납한 달성공원에는 수령 300년이 넘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는 한때 서침의 세거지였던 이곳을 지켜주는 수문장이다. 그의 올곧은 인품을 상징하여 '서침나무'라 불린다. 이 노거수는 대구시 보호수(지정번호 1-3)로 지정된 나무이다.
구암서원(龜巖書院)
구암서원(龜巖書院)은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 (산격동)에 있는 서원이다. 1975년 2월 5일에 '건조물 경북 제2호'로 지정, 1982년 3월 4일에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구계 서침의 덕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이다. 서침은 고려말∼조선초의 변혁기에 향촌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에 노력하였다. 대구부민이 구계선생을 구암서원 숭현사에 봉향하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구계선생이 조선초에, 달성 서씨 胄孫(주손)으로 세거지인 달성에 살았는데 임금께서 달성이 국가의 군사요새로 필요하다고 하면서 命換其址(명환기지)케 하고 蓮信(현재의 영선시장자리)과 新池(현재의 서문시장)下의 蒙利土地(몽리토지)에 대한 세금을 서씨 일문에 받게 하고,南山古驛(남산고역)과 東山一帶(동산일대)의 땅을 下賜하며, 두터운 상과 세록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胄孫(주손) 구계선생이 「이 나라의 모든 것이 국왕의 땅이거늘 국가시책에 따라 땅을 바친다고 어찌 臣(신) 혼자만이 부귀를 바라겠습니까?」 라고 쾌연히 사양하고는 일가의 사사로운 은혜를 받기 보다는 대구부민이 고르게 은혜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대구지방의 還穀利子(환곡이자)를 한섬에 다섯되씩 감해 주시기를 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아 실시 하게 되었다. 그 뒤 대구부민이 조선말까지 그 혜택을 입었다.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서원에 들어서면 관리사인 백인당, 정문인 연비루, 동재(경례재), 서재(누학재), 강당(초현당), 내삼문(경앙문), 맨위에 사당인 숭현사가 있다. 구암서원은 정남향으로 대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조망을 가지고 있고, 대구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으로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구암서원은 1665년(현종 6년)에 연구산(連龜山) 서남쪽(현재 대구초등학교 서남쪽 언덕)에 숭현사(崇賢祠)를 건립하고 대구부민이 구계 서침을 봉향하였다. 이후 1717년(숙종 43년)에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229번지로 이건하고, 1718년(숙종 44년) 3월에 서거정을 추가 배향하고, 1741년(영조 17년) 2월에 약봉 서성(徐渻)을, 1757년(영조 33년) 8월에 함재 서해(徐嶰)를 추가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24년 유림에서 복설하고, 1943년 숭현사와 강당을 중수 하였고, 숭현사를 1974년에 보수하였다. 1975년 2월 5일 건조물 경북 제2호로 지정되었다가 대구직할시 승격 후에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으며, 1996년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1동 연암공원로 17길 20번지 연암공원내로 옮기고 2008년 8월27일 유림에 의해 약재 서사원(徐思遠)을 추향하였다
숭현사
숭현사(崇賢祠)는 先賢(선현)을 높이 받들어 제향하는 사당으로써 1665년(현종 6년)에 연구산(連龜山)에 세워졌는데, 1718년(숙종 44년)에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229번지로 이건하였다.
현재는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 (산격동)의 구암서원 내에 있다.
숭현사의 중앙에는 서침과 서거정의 위패가, 오른쪽에는 서해, 왼쪽에는 서성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매년 9월 1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경비는 자손들에 의해 충당되고 있다.
배향 인물이 달성 서씨 대구 서씨이기 때문에 문중서원 성격이 강하다.
서침(徐沈)
서거정(徐居正, 1420년 ~ 1488년)
서해(徐解)
서성(徐省, 1588년 ∼ 1631년)
대구 내곡동 심락재(大邱內谷洞尋樂齋)
대구광역시 동구 내곡동에 있는 18세기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달성 서씨 문중 재실.
대구 내곡동 심락재는 세심헌(洗心軒) 서도형(徐道珩)을 추모하는 재실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대구 내곡동 심락재 주인 서도형이 직접 지은 「심락재기」에 고간지(古干支)로 상장:경(上章:庚) 곤돈:자(困敦:子)나타나는 것으로 봐, 대구 내곡동 심락재는 서도형 생존시인 경진년인 1720년으로 추측된다. 서도형은 본래 경산 중방(中方)에서 살았지만 나중에 이곳 노곡(老谷)[노실]으로 이거하여 많은 문하생을 배출한 인물이다.
대구 대림동 서종호 주택
개항기에 건립된 대구광역시 동구 대림동에 있었던 달성서씨 문중의 재실이자 주택.
1995년 『대구시사』에서는 대구 대림동 서진영 주택으로, 2006년 『문화유적분포지도』에서는 대구 대림동 서종호 주택으로 적혀 있다.
달성서씨 시조 서진의 7대손인 서건손이 울산입향조
태화동에서 태화강을 따라 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신삼호교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속 직진하면 다운(茶雲)동에 들어서게 되고 이곳이 바로 달성 서씨 감찰공파(監察公派)의 집성촌이다. 울산사람들은 흔히 달성 서씨를 다전서씨라 부른다. 400여년 전부터 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기 때문이다.
달성 서씨 대종회 옛 구암서원 기부채납..."구계 서침 선생, 정신 계승"
달성 서씨 대종회(회장 서영택)가 대구 중구 동산동 한옥마을에 자리한 옛 구암서원을 대구시에 기부했다. 구암서원은 조선조 세종 임금 당시 세거지인 달성공원을 나라에 헌납하고 포상 대신 백성들의 환곡 이자를 감면해 달라는 청이 허락돼,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준 구계(龜溪) 서침(徐沈)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언제나 꼿꼿했던 달성서씨 문중, 손님맞이 음식 - 사천리 달성서씨 새내마을
마을 곳곳에 500년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천리 새내마을.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고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돈암 서한정’ 선생의 후손들이 자리 잡은 선비 마을인 동시에, 아직까지도 마을 곳곳에 서원이나 정자들이 남아있는 살아있는 역사촌이기도 하다.
영주 용혈리 달성서씨재사(榮州 龍穴里 達城徐氏 齋舍)
이 건물은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부호군(副護軍)인 서승절(徐承節)의 묘소수호를 위해 조선후기에 건립된 재사이다. 각 부재에서 중수한 흔적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후대에 여러차례 중수하면서 규모를 눌렸던 것으로 보여진다. 건물배치는 "一"자형 4칸 아래채와 까치구멍집 안채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고 안채 앞 양쪽으로 방안간채와 뒤주채가 마주보고 있다. 안채의 상부가구는 5량가이며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정면4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가창면 대일1리 대일박마을 달성서씨 집성촌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1리에 있는 달성 서씨 동성 마을.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1리 대일박마을은 달성 서씨(達城徐氏) 집성촌이다. 이 마을은 1570년(선조 3)경 영동 김씨(永同金氏)들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하며, 1670년 조선 효종(孝宗) 때 천안 군수 달성인 서변(徐忭)이 임금에게 직소하였다가 곤장을 맞고 죽자 그 후손들이 피신하여 이 마을에 정착한 이래 서씨들의 세거 집성촌이 되었다고 한다.
양산 달성서씨집성촌(達城徐氏集姓村)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서진을 시조로 하고 서몽호·서의손·서두조를 입향조로 하는 달성 서씨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들. 서씨의 중심 본관은 이천서씨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천서씨에서 분파된 것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조선씨족통보』에는 이천서씨에서 달성·장성·연산·남평·평당·부여 등이 갈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조는 서진(徐晋)으로 고려 때 봉익대부판도판서 벼슬을 역임하면서 공을 세워 달성군에 봉해지고 달성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세거하게 되어 후손들이 본관을 달성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였다.
중방동 달성 서씨 집성촌(中方洞 達城 徐氏 集姓村)
경상북도 경산시 중방동에 있는 달성 서씨 동성 마을. 중방동 달성 서씨 집성촌은 대구광역시 달성군을 본관으로 하는 달성 서씨의 동성 마을이다. 달성 서씨 시조는 서진(徐晉)으로, 고려 시대에 봉익대부(奉翊大夫)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서진의 후손들은 대구를 중심으로 세거하면서 경산을 비롯해 전국 각지로 분가하였다. 중방동에는 1755년(영조 31)부터 달성 서씨들이 세거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을 ‘중방 서씨’라 부르기도 한다.
칠곡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을 시조로 하고 서순조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칠곡군의 세거 성씨. 달성 서씨(達城徐氏) 시조(始祖) 서진(徐晉)은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판도판서(判圖判書) 등을 역임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져 달성[현재 대구광역시]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그곳에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후손들이 본관을 달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고 있다.
청도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고 서대건(徐大建)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청도군의 세거 성씨. 달성 서씨(達城徐氏) 시조 서진은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판도 판서(判圖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지고 달성[현 대구광역시 달성군]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시조 서진의 아들 서기준(徐奇俊)과 손자 서영(徐穎)까지 삼대가 달성군에 봉해졌다고 하며, 이에 후손들이 달성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달성 서씨는 현감공파(縣監公派)·학유공파(學諭公派)·판서공파(判書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생원공파(生員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등 9파로 나뉘어졌다.
창원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고 서사일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창원시 세거 성씨.
김천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서수창(徐壽昌)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김천시의 세거 성씨.
성주 달성서씨(達城徐氏)
영조(英祖)때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지낸 현감공파(縣監公派) 16세손(世孫) 서영석(徐榮碩)이 약(約)250년전(年前)에 성주읍(星州邑) 선남면(船南面), 벽진면(碧珍面), 월항면(月恒面) 인촌리(仁村里) 등지(等地)에 자리를 잡아 현재(現在)까지 세거(世居)해 오고있다.17세손(世孫) 서태걸(徐泰杰)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지냈으며 17세손(世孫) 서만기(徐萬起)는 행검사우진중(行儉士友進重), 영묘박사(英廟博士)였고 21세손(世孫) 서경홍(徐慶弘)은 선원각참봉(璿源閣參奉)을 지냈다. 17세손(世孫) 서태걸(徐泰杰)의 자손(子孫)은 벽진면(碧珍面) 운정리(雲亭里), 월항면(月恒面) 인촌리(仁村里)에 살고 있으며, 21세손(世孫) 서경홍(徐慶弘)의 자손(子孫)은 선남면(船南面) 용신리(龍新里) 등지(等地)에 살고 있다.
경산 달성서씨(達成 徐氏)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서사선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경산시의 세거 성씨.
영천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서도(徐渡)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세거 성씨.
음성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서관준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순창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부안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고, 서상구·서산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부안군의 세거 성씨.
여수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고 서득선 등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여수시 세거 성씨.
마산 회원동 달성 서씨 시혜불망비(馬山檜原洞達城徐氏施惠不忘碑)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원동에 있는 달성 서씨(達城 徐氏) 부인의 비석. 1908년 서모(徐某)라는 여인이 갑부 최씨(崔氏) 가문에 출가하였는데 갑작스럽게 남편이 죽자 전 유산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희사(喜捨)하였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베푼 달성 서씨 부인의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1916년 4월 동민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비에는 ‘부인 달성 서씨 시혜 불망비(婦人達城徐氏施惠不忘碑)’라고 새겨져 있다.
대구 중구 진골목
대구 중구 진골길31에 위치한 진골목은 여성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진(긴)골목입니다. 1907년 2월 21일 대구 근면 대회에서 남자들이 나랏빚을 갚기 위해 금연을 결의하자 진골목에 살던 일곱 분의 부인이 패물을 바쳤고 패물 헌납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고 합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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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만에 전국의 살고 계시는 이천 서씨. 달성 서씨. 대구 서씨. 부여 서씨. 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 모든 서씨(徐氏)들의 소통방을 새롭게 개통합니다.
갈수록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전국에 살고 계시는 서씨 (徐氏)가족 여러분들의 마음의 힐링과 더불어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
전세계서씨일가연합회(全世界徐氏一家聯合會)인 우리는 서로가 협조해서 가장 모범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간에 노력해야 합니다.
같이 보기
- 이천 서씨
- 대구 서씨
- 달성 서씨
- 부여 서씨
- 연산 서씨
- 남양 서씨
- 당성 서씨
- 봉성 서씨
- 절강 서씨
- 중국 서씨
- 일본 서씨
- 몽고서씨
- 러시아서씨
- 튀르키예서씨
- 멕시코서씨
- 불가리아서씨
- 중앙아시아서씨
- 카자흐스탄서씨
- 우즈베키스탄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