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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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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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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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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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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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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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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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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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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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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강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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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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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서씨]]

2024년 1월 14일 (일) 11:55 기준 최신판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삼종사 묘역은 들 가운데 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구릉. 옛 주소는 화룡현 청파호이다. 삼종사란 대종교(大倧敎)의 홍암(鴻巖) 나철(羅喆, 1863~1916) 대종사,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7~1923) 종사,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 종사를 말한다.

반일지사(나철, 서일(徐一), 김교헌) 묘역

반일지사 나철, 서일(徐一), 김교헌은 20세기 전반기에 동북지구에서 한때 화룡시 청파호를 기지로 반일계몽운동과 반일교육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민중의 반일의식을 높이고 인민의 반일사상각오를 높이기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였으며 반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전개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놀았다. 서일이 령도한 <북로군정서> 소속의 반일 무장부대와 <국민회> 소속의 반일무장부대가 1920년 10월 화룡지구에서 협동작전을 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청산리전투>는 일본 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반일운동이 깊이 있게 전개되도록 힘있게 추동하였다.

화룡시문화유물보호단위 화룡시인민정부 1991년 9월1일 공포

삼종사가 화룡시를 중심으로 펼친 반일 계몽운동과 교육, 독립전쟁을 잘 드러낸 안내문이다. 안내문 아래에는 두 줄로 “대한민국(사)나철선생(항일지사)선양사업회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금곡”라는 글을 적은 팻말이 덧붙여 있다.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이 이곳 연변 화룡과 무슨 인연일까. 홍암 나철이 전남 보성 벌교 출신이기 때문이다. 보성 벌교에는 나철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선양사업회가 있다.

나철 대종사는 철종 14년(1863)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인영(寅永), 호는 홍암(鴻巖). 29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練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있다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의 지사를 모아 1904년 유신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직전인 1905년 6월 동지 이기(李沂)・오기호(吳基鎬) 등과 같이 일본에 건너가 정계 요인을 방문하여 “동양평화를 위해 한(韓)・청(淸)・일(日)이 동맹할 것과 일본은 한국에 선린의 교의로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 안 매국노를 모두 제거해야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단도를 두 자루 사들고 귀국하였다. 이후 을사 오적(五賊)을 제거하기 위해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을 모아 수차례 처단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1907년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다. 고종의 특사로 풀려난 그는 1908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구국운동을 했다. 나철은 국권수호를 위해 다방면에 노력을 했으나 여의치 않아 고민하던 중 민족주체성을 확립하고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단군교를 중광(重光)하였다. 그가 1904년 일본에서 귀국했을 때 서울역 근처에서 한 백발노인으로부터 책 두 권을 받았는데 ‘삼일신고’와 ‘신사기’였다고 한다. 1908년 일본에서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을 만나 ‘단군포명서’를 받았다. 그해 12월 두일백으로부터 나철은 영계(靈戒)를 받았다. 나철은 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단군교를 선포하였다. 이날을 대종교에서는 중광절(重光節)이라 한다. 단군교를 중광한 나철이 포교활동을 왕성하게 벌여 단군교는 교도수가 2만여명에 달할 만큼 교세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1910년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칭하고 제1세 교주에 추대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중국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에 지사(支司)를 설치하고 총본사 이전 계획을 추진하였다. 나철은 1911년 서울을 출발하여 강화, 평양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백두산 북쪽 청파호를 답사한 후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총본사를 이전하였다. 총본사를 이전하고 청일학교(靑一學校) 등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시행하고 포교활동을 통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대종교총본사를 중국으로 이전한 나철은 총본사 산하에 사도본사(四道本司)를 설치했는데 동도본사의 책임자가 서일(徐一)종사이다. 대종교가 중국으로 총본사를 이전한 후 대종교 교도수는 30만에 달하였다고 한다. 교단을 정비한 후 나철은 서울로 돌아와 남도교구에 교단 조직과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대종교가 확장되니 일제는 탄압을 하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하고, 종교가 아니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남도본사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처하자 1916년 음력 8월14일 나철은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가 이튿날 조식법(調息法)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에 따라 청파호에 유해를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교헌 종사는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했다. 서울에 있는 조계사는 김교헌 집안의 재산이었다. 김교헌은 말죽거리 50여만 평과 조계사 터 340간의 저택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고 한다. 1916년 대종교(大倧敎) 대종사 나철의 교통을 계승하여 제2대 교주가 되었다. 1917년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대종교의 총본사를 길림성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겼다. 그는 만주지역의 역사와 상고사에도 관심을 가져 ‘신단실기(神檀實記)’,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여 만주 지역 한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8년 11월 대한독립선언서(일명:무오독립선언)에 39명중 1인으로 서명하여 주동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총재에 서일(徐一)을 임명하여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에서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1921년 11월에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임시정부에서 영어에 능통한 그를 외교대표로 임명하여 파송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도록 외교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후 독립군과 함께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여 1923년 일제의 재만동포에 대한 학살 현장을 보고 비분과 과로로 병을 얻어 영안현 남관 총본사에서 분사(憤死)하였다. 이듬해 1월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백포 서일(徐一) 종사는 어떠한 사람인가. 독립기념관의 독립운동가 자료를 참고하면 그는 함북 경원(慶源) 출신으로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1911년 길림성 왕청현(汪淸縣)에 망명하여, 청일학교(淸一學校)・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는 등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그는 대종교를 신봉하여 시교사(施敎師)로서 수년간에 걸쳐 수만 명의 교우를 얻고 동일도본사(東一道本司) 전리(典理)와 총본사 전강(典講)을 역임했다. 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指講演)’, ‘도해(圖解)’, ‘신화강의(神話講義)’, ‘진리도설(眞理圖說)’, ‘삼문일답(三門一答)’, ‘회삼경(會三經)’ 등을 저술하여 교리를 전파했다.

그는 의병을 규합하여 자유공단(自由公團)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약 1만 5천명의 단원을 거느린 단장으로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또한 일제와 무력항쟁을 하다가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들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선출되어 국내 진입을 계획하였으며 본부를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에 두고 청년동지들에게 정신교육을 통하여 자주독립의식을 심어주었다.

1918년에는 여준(呂準)・정신(鄭信)・김좌진(金左鎭)・김동삼(金東三)・손일민(孫一民)・서상용(徐相庸) 등 38인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무오독립선언서는 3・1독립운동에 앞선 조국의 독립선언이 되었다. 이듬해인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계화(桂和)등과 함께 중광단(重光團)의 토대위에 군사행동을 적극적으로 취하기 위하여 동북만에 산재한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대한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여 단원을 모집하는 한편 신문을 간행하여 독립사상을 격려하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19년 8월에는 김좌진을 맞이하여 정의단을 개편하고 임전태세의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를 조직하여, 본영을 왕청현(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에 두고 ‘체코’ 군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을 갖추었다. 그는 군정서의 총재로서 김좌진을 총사령 겸 사관연성소 소장으로 임명하여 십리평(十里坪) 산림속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들에게 맹렬한 군사훈련을 실시한 지 1년여만에 청산리독립전쟁(청산리대첩)(靑山裏獨立戰爭)을 치르게 되어 일본군 3,300여 명을 사살하는 독립군 사상 초유의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20년에는 임시정부 직할의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府) 총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청산리독립전쟁후 일본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북로군정서의 전 병력이 북만 밀산(密山)으로 옮겨갔으며, 국민회・독립군의 안무군(安武軍)・홍범도군(洪範圖軍)・광복단(光復團)・도독부(都督府)・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야단(野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 모두 3,500명의 병력이 모두 이곳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란 대군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때 그는 동단의 총재로 추대되어 전 독립군을 지휘하였다. 그 후 대한독립군은 노령(露領) 자유시(自由市)로 이주하고, 그는 밀산현 당벽진(當壁鎭)으로 옮겨가서 다시 기회를 기다리며 군무의 여가를 타서 교서(敎書)의 저술에 전념하던 중 1921년 8월 26일 토비들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청년동지들이 다수 희생되었다. 나라 잃은 슬픔에 겹쳐 부하들마저 무참히 희생됨에 통탄을 금치 못하던 그는 그 이튿날 8월 27일 아침 마을 뒷산 산림속에 정좌하고 자결 순국하였다. 1927년 이곳 청파호로 이장되어 세 분 종사가 함께 백두산을 바라보고 있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서일(徐一) 총재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과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종교인.개설본관은 이천 서씨(利川). 함경북도 경원 출신.

본명은 서기학(徐夔學), 호는 백포(白圃).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鏡城咸一師範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하고 교육구국사업에 종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에서 항일투쟁의 어려움을 느끼고 만주로 건너갔다.1911년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청년동지들에 대한 민족정신과 한학을 가르쳐 정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교육에도 뜻을 두어 간도지방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1912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리의 연구와 포교활동에 주력하였으며, 1916년 총본사(總本司) 전강(典講)이 되어 활동한 결과, 나철(羅喆)의 교통(敎統) 계승자의 물망에 올라 사교(司敎)로 초승(超陞)되고 영선(靈選)에까지 올랐다.1917년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겨 만주와 노령(露領)의 동포에게까지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을 발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듬해 중광단을 토대로 군사적 행동을 위해 계화(桂和) 등과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다.1919년 대종교 2세교주인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이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려고 하였으나 독립군 양성과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교통의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같은 해 8월현천묵(玄天默)·김좌진·계화 등과 함께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軍政府)로 만들고, 12월에는 다시 한 민족에게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 하여, 이것을 토대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면서 총재에 취임하였다.또한 틈틈이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하며 수도에 힘써 교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저술에도 힘을 기울이며 포교활동도 하였다.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고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마련해준 군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정규병력 1,500명으로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였다.또한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세워 중견사관을 길러내고, 각지에 야간강습소와 소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1920년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찔렀고 병력을 북만(北滿)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시켰다. 이듬해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인해 밀산현으로 들어온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의 도독부군(都督府軍) 및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등 여러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1921년 6월 27일 자유시 수비대 29연대, 2군단 기병대대, 라키친 저격연대가 동원되어 사할린 부대에 대한 무장해제에 들어갔다.그러나 러시아 군인과 항일무장독립군 부대원 사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러시아 군인은 사할린 부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동원된 러시아 부대는 무장을 한 항일무장독립군에 대하여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청년장병 다수가 희생당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나게 되었다.이에 같은해 8월 27일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라는 글귀를 남기고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활동과 지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대종교에서는 그를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증명으로 종교의 교리를 체계화한 대철(大哲)로 성인(聖人)이라고 추앙하고 있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 그리고 계시를 받고 지었다는 『회삼경(會三經)』 등이 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1세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의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 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

4세 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掌冶署令).정 3품.장관)

5세 서면(徐冕 주부(注簿).정 4품.차관보)

6세 서린(徐嶙 판대부사(判大府事).정 2품.부총리)

7세 서찬(徐瓚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

8세 서인(徐諲 교수(敎授).도승지(都承旨).정 3품.장관.대학자)

9세 서욱(徐勖 도승지(都承旨).정 3품. 장관)

10세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判司宰事).종 2품.부총리)

11세 서유(徐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 정2품. 장관.양경공파(良敬公派))

12세 서경흥(徐敬興. 목사(牧使). 정3품.당상관.차관)

13세 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

14세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

15세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

16세 서희안(徐希顔. 사용공(司勇公)

17세 서득천(徐得天. 의병장(義兵將).부사용(副司勇) · 창의순절(副司勇 · 倡義殉節)

18세 서사도(徐思道. 의병장(義兵將).율곡 이이(栗谷 李珥) 문인.임진란 순절(壬辰亂殉節 )

서사근(徐思近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判決事)·.의병장(義兵將))

서사원(徐思遠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서사적(徐思迪)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19세 서일원(徐一元 .용기위사정(龍驥衛司正).학자(學者)

서종언(徐從彦 이흥군(利興君).오위부총관(五衛副摠官). 종 2품.차관)

서일회(徐一會)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대종교(大倧敎)

1909년 나철(羅喆)이 조직한 종교.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삼종사 묘역은 들 가운데 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구릉. 옛 주소는 화룡현 청파호이다. 삼종사란 대종교(大倧敎)의 홍암(鴻巖) 나철(羅喆, 1863~1916) 대종사,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7~1923) 종사,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 종사를 말한다.

중광단(重光團)

1911년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서일(徐一) 등이 국외로 탈출하는 의병들을 규합해서 조직하였다. 단장은 서일이 맡았고, 본부는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에 있었다. 둥베이 지방 무장독립운동의 효시가 된 단체로,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군사활동보다는 청년 지사들의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애국운동 함양 등 정신교육에 치중하였다.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3·1운동 직후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 등이 중광단(重光團)의 토대 위에 적극적인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동북만주의 대종교도(大倧敎徒)를 규합하여 조직하였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지린성 옌지시 이란구(吉林省 延吉市 依蘭區)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되었던 독립군 단체.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군정회(大韓軍政署, 약칭 군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약칭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대한군정서로 인준받았다.

청산리대첩

1920년 10월 21∼26일, 서일(徐一)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靑山里 抗日 大捷 紀念碑)

청산리(靑山里) 대첩 80주년을 기념하여 2001년에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청산리 산림장 입구에 건립된 비석.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서일(徐一)이 1920년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군 연합부대.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흑룡강성 계서시 118현도 영성촌(黑龙江省 鸡西市 一一八县道 永胜村)

서일(徐一)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

백포 서일(徐一) 선생의 시어록비(독립기념관 어록비공원)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동 삼방로 95 (남화리) 독립기념관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손자를 만나다

대를 건너 이어지는 북로군정서 창설의 역사

1911년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선택하고 고향을 떠난 서일 총재가 두만강을 건너 처음 만난 사람이 봉오동을 무장독립군 기지로 건설하고 있던 최운산 장군이다. 북간도 봉오동에서 처음 만난 최운산 장군과 서일 총재는 서로의 의기를 알아보았고 그 자리에서 무장투쟁을 결의하였다. 서일총재는 최운산 장군이 내어준 덕원리, 즉 서대파에 머물며 학교를 열었고, 서대파를 근거지로 대종교인들을 이끌었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함께 북로군정서를 창설하고 서대파를 무장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백포 서일 총재의 고손자 서영승씨 “독립지사 후손답게 고국 위해 봉사”

“선조의 항일·희생 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백포 서일 총재의 고손자로 이날 행사에 참석한 서영승씨(인천시 연수구)는 2대째 독립지사 가문의 후손이다. 서영승씨의 아버지인 서희우씨부터 서만섭, 서일 총재까지 이어지는 가계도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기 위해 평탄치 않은 가정사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 통해 재조명 '청산리 독립 전쟁의 서일 총재'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 ”로 시작하는 가곡 <선구자>의 첫 소절이다. 한때는 한국인이라면 이 가사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졌던 시기가 있었다. 가곡 <선구자>는 1절만 윤해영 작사이고, 2·3절은 후에 작곡자 조두남이 작사했다고 한다. 1절이 자주 불려서 2·3절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원래 제목은 ‘용정의 노래’ 였다. 1980년대까지는 널리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에 나오는 지명 때문에 만주, 특히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리하여 1980년대까지 매우 자주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나 곡 모두 훌륭한 가곡으로 평가되었으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던 가곡으로 매번 선정될 정도였다.

항일무장투쟁의 별 -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 정길영 (지은이)

서일은 교육자이며 애국계몽운동가요, 종교지도자이며 철학자요, 군사전략가이며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는 짧은 일생을 살면서 오로지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살신성인한 인물이었다.   

백포(白圃) 서일(徐一)과 대종교-그 정체성(正體性)의 여정(旅程)-김 동 환 (국학연구소)

백포 서일과 청산리대첩- 김 병 기 (광복회학술원)

1910~20년대 중국 동북지역 - 항일무장투쟁과 서일- 이 동 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백포 서일의 독립운동과 자유시참변- 장 우 순 (성균관대학교)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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