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20년대 중국 동북지역 - 항일무장투쟁과 서일- 이 동 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1910~20년대 중국 동북지역 - 항일무장투쟁과 서일- 이 동 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1. 머리말
서일(徐一)은 1910~20년대 중국동북지역 현재 학계에서는 만주라는 지명 대신 ‘중국동북지역’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대체로 중국의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동북3성을 말한다. 남만·북만 또는 서간도·북간도라고도 하는데 한국근대사에서 지칭하는 간도는 백두산 동북방,두만강 대안의 북간도와 백두산 서남방,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로 이루어져 있다. 북간도는 연길·화룡·왕청의 3현과 훈춘현 등 4개 현이 중심이 되었으나 넓게는 액목·돈화·동녕·영안 등 4개 현도 아울러 지칭하기도 하였다, 북간도와 대칭을 이루는 서간도에는 집안·통화·유하·회인·관전·임강·장백·무송·안도·흥경·회령 등 여러 현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고조선의 역사가 깃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발흥지로 환도산성·오녀산성·광개토대왕비·장수왕릉 등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널려 있다.(윤병석,『1910년대 국외항일운동Ⅰ-만주·러시아』(한국독립운동의역사 16),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3~9쪽 참조). 항일무장투쟁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서일의 초명(初名)은 기학(夔學), 호(號)는 백포(白圃), 당호(堂號)는 삼혜(三兮), 본관은 이천(利川)이다. 대종교총본사,『대종교중광육십년사』, 1971, 389~390쪽 ;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인물대사전』,중앙일보출판법인중앙M&B, 1999, 901쪽. 그는 1881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서 태어났다. 서일의 약력에 대해서는『대종교중광육십년사』, 388~393쪽 참조. 채씨 부인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다. 강용권,「서일종사와 그의 후예들」,『소리6』,국학연구소, 2008, 74쪽. 서일은 1911년 만주 왕청현 덕원리로 가족들과 함께 망명하였다. 망명 당시 서일, 채씨부인, 서일의 맏딸 서모(출가후 병고로 이름조차 알수 없음, 당시 10세), 둘째딸 서죽청(6세), 아들 서윤제(4세) 모두 여섯 식구였다. 유족으로는 서윤제의 아들 서경섭이 하얼빈 남강구 바름가 98호에 살고 있다. 부친은 서재운(徐在云)이다. 서일은 어려서는 김노규(金魯奎) 김노규는 함경도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그는 간도 영유권의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간도지방과 관련된 우리 민족의 여러 활동 사실들을 이 지방의 지리와 함께 역술한 『북여요선』을 저술하였다. 1903년에 저술한 이 책은 1책 43장으로 엮은 필사본이다. 그 외에도 우리 토속사상을 담은『학음유고』가 있다.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여 주역을 전공한 후 1902년 함경북도 경성군 유지의숙(有志義塾)을 졸업하였다. 『독립신문』1921년 12월 6일「獨立軍總裁徐一氏自狀」. 함일학교 서일 외에도 함일학교 출신으로 간도대한국민회 사령 안무, 대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과 그외 김병철, 김학섭 등이 있다.(『함경북도지』, 382쪽) 의 전신인 유지의숙은 1900년 3월 10일 이운협(李雲協) 유지의숙 설립 당시 이름은 ‘李泳晉’이었으나 ‘이운협’으로 개명하였다(『황성신문』1901년 3월 19일 광고). 이운협은 함경도지역의 대표적인 계몽운동가로 1907년 12월에 결성된 대한협회 경성지회 평의원․교육부사무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설립하였다. 『私立咸一實業學校設置關係書類』,「請願書」(1909년 5월 8일) ;『황성신문』1900년 5월 17일「詞藻」. 서일은 1912년 10월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대종교총본사,『대종교중광육십년사』, 390쪽.
서일의 생애와 활동을 살펴보면 대종교와 독립운동, 그리고 민족교육이라는 세요소를 일치시키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체계적으로 극대화시키고자 노력한 점이 주목된다. 서일에 관한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
강용권,「민족독립운동과 서일」,『수촌 박영석교수화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탐구당, 1992. 김동환,「백포 서일의 생애와 사상」,『대종교 중광의 인물과 사상』(대종교 중광 9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발표문, 1999). 강용권,「서일종사와 그의 후예들」,『소리6』,국학연구소, 2008. 김동환 외,「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선도문화』 제8집, 국제뇌교육대학원 국학연구원, 2010. 이동언,「서일의 생애와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8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1. 리광인,「백포 서일 총재 평전」,『만주벌의 혼-독립군 총재 서일』, 백포서일기념사업회, 2011. 김동환, 「백포 서일의 생애와 사상」,『만주벌의 혼-독립군 총재 서일』, 백포서일기념사업회, 2011. 이덕일, 「서일과 민족독립운동에 관한 몇가지 문제」, ,『만주벌의 혼-독립군 총재 서일』, 백포서일기념사업회, 2011. 임형진, 「백포 서일의 독립정신과 자유시참변」, 백포 서일 총재 및 자유시참변 제90주기 추모대제전, 2011. 정길영,「서일의 대일항쟁 전략과 그 결과」,『국학연구』 제16집, 국학연구소, 2012. 이근철,「서일의 신관에 관한 철학적 연구」,,『국학연구』 제16집, 국학연구소, 2012. 신운용,「서일의 민족운동과 대종교」, 『국학연구』 제16집, 국학연구소, 2012.」, 최윤수,「종교지도자로서의 서일」, 『국학연구』 제16집, 국학연구소, 2012. 김동환,「백포 서일 그 미래지향을 위한 제언」, 『국학연구』 제16집, 국학연구소, 2012. 이동언,「서일의 대종교에서의 활동과 항일무장투쟁」,『내가 몰랐던 독립운동가 12인』, 선인, 2013. 정길영, 『항일무장투쟁의 별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 경인문화사, 2019.
중광단→대한정의단→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단으로 발전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본고에서는 1910~20년대 중국동북지역 항일무장투쟁에서 서일의 위상을 재조명 하고자 한다. 서일에 관한 연구가 미진한 이유는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1942년 임오교변 당시 일제가 서일의 유족 집을 수색하여 관련 자료를 모두 압수해 갔다. 서일에 관해서는 대종교의 민족운동과 항일무장투쟁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서일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2. 서일의 항일무장투쟁
1) 중광단
서일이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것은 1911년 이후이다. 그는 북간도로 건너온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1911년 3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31세의 나이로 단장에 추대되었다. 『독립신문』1920년 4월 22일「대한군정서약사와밋 군정서총재의 신청서」.그러나 중광단 창립초기에는 항일무장투쟁 준비보다는 주로 독립정신과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정신교육에 치중하였다. 『독립신문』1920년 4월 22일「대한군정서약사」; 신용하,「대한(북로)군정서 독립군의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2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203쪽.
당시 중광단에 참가한 인물들은 대부분 대종교도들로서, 특히 서일을 비롯한 백순․현천묵 현천묵에 대해서는 박경,「현천묵의 민족운동과 대종교」,『한국민족운동사연구』9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7. 참조. ․박찬익․계화․김병덕(金秉德-金星)․채오 등 중광단의 지도층은 대종교의 중심인물들이다.‘중광단’이라는 명칭 또한 과거 우리 고유의 단군신앙에 대한 부활을 의미하는 대종교의 ‘중광(重光; 교문이 다시 열림)’에서 따온 것이다. 중광단이 조직된 지역은 당시 대종교의 주요 거점이었던 왕청현으로 이 지역은 대종교에서 1910년 施敎師 박찬익을 파견하여 포교의 거점을 잡았던 곳이다. 이 시기에 이미 북간도로 이주해 온 한인들의 수가 20만 명이 넘었고 이 중 많은 인구가 이미 대종교를 신봉하였다. 김동환,「백포 서일의 삶과 사상」, 95쪽.
특히 중광단과 관련하여 주목을 끄는 것은 東圓黨이라는 비밀단체이다. 동원당에 대해서는 오세창,「만주 한인의 3․1운동」,『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탐구당, 1992, 538~542쪽 참조. 그동안 대종교의 비밀결사인 歸一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있으나, 동원당에 대해서는 대종교의 중심인물로서 대한정의단과 북로군정서의 핵심이었던 「李鴻來의 가출옥문서」와 1925년 4월 6일「청진지방법원 판결서」에서 그 실체가 파악되었다. 동원당은 서일을 중심으로 수명의 동지가 협의하여 1912년 음력 8월 연길현 삼도구 청파호에서 조직하였는데 독립운동을 완수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략을 결정하고 이를 지도하기 위한 비밀단체였다. 그러나 동원당의 존속기간과 귀일당과 同體異名 여부도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동원당도 서일이 수전병행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조직한 비밀결사로 생각된다. 서일이 1919년 연길현 국자가에서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自由公團이라는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였는데 단원이 15,000여 명이었다는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한국독립운동사』3, 국사편찬위원회, 1968, 954쪽.
한편 서일은 수전병행의 실천방안으로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직접 설립한 明東學校를 위시하여 중광단에서 설립한 교육기관도 東一學校․靑一學校․學成學校․船口學校 선구학교는 대종교에서 1928년 만주 밀산현 평안진 선구촌에 설립한 학교로 교장은 나철의 장남인 나정련이었고, 선구학교의 운동회 응원가는 서일 작사로 알려져 있다. 후일 곡을 붙여서 학교응원가로 사용되었다.(독립군시가집편찬위원회편,「운동회운동가」,『배달의 맥박(독립군시가집)』(증보판), 송산출판사, 1986, 464쪽). 등 10여 개교를 헤아린다. 서일은 대종교와 독립운동, 그리고 민족교육이라는 세 요소를 일치시키면서 수전병행을 극대화시켜 나갔다. 김동환,「백포 서일의 삶과 사상」, 99쪽.
1919년 2월 대종교 제3세 교주 김교헌 등 39인의 명의로 만주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가 선포되었다. 발표일자는 ‘단군기원 4252년 2월 ○일’로 되어 있고 서기로는 1919년 3월이다.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주체는 만주지역 항일무장단체인 大韓獨立義軍府이다. 선언서 내용에 ‘檀君大皇祖’가 언급되어 있고, 발표장소도 대종교총본사인 것으로 보아 대종교와 깊은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 39인 중에서 李世永․韓興․崔炳學․李承晩․金躍淵․李大爲․黃尙奎․安昌浩․임방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사들이 대종교 중심인물들이었다. 김동환,「무오독립선언의 역사적 의의」,『국학연구』제2집, 국학연구소, 1988, 167~172쪽. 서일은 서명자 명단에 보이지 않는데 대종교에서 서일의 위치를 감안해 보면 당연히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중광단 단장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중광단은 1919년 5월 일부 공교도 대한정의단에 참여한 공교도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성극․ 강희․ 이규 등으로 공교는 중국 청나라 말기에 강유위가 창시한 유교의 한 분파이다. 들과 연합하여 大韓正義團을 조직하고 변화를 통한 발전을 시도한다. 그러나 政體의 이견으로 공교도의 대표적 인물인 김성극이 축출되면서 순수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정비되었다. 즉 당시 공교도들은 保皇主義를 내세웠고 대종교인들은 대종교의 敎義인 弘益人間속에 배태되어 있는 인본주의적 가치와 가까운 共和主義를 주장하였다. 공교도와의 결별은 서일이 중광단 이후부터 실천해 오던 수전병행을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2) 대한정의단
중광단은 3․1운동 이후 대한정의단으로 발전하여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서일은 대한정의단 단장에 취임하였다. 대한정의단에서 제정한 4대 강령과 7대 규약, 3대 符信은 다음과 같다. 강덕상,『현대사자료』26, 「조선」2, 249쪽.
4대 강령
一. 정대한 의리의 찬양
一. 정당한 의무의 이행
一. 정직한 의무의 장려
一. 정순한 의리의 찬동
7대 규약 一. 서약을 반드시 실천함 一. 명령을 반드시 집행함 一. 양민을 침범하지 말 것 一. 다른 단(團)을 간섭 말 것 一. 규율을 반드시 준수할 것 一. 역무를 반드시 부담할 것 一. 망언을 하지 말 것
3대 부신(符信) 一. 단장의 인증 또는 증권의 호수가 있지 않은 경우에는 복종하지 않을 것. 一. 단장의 수집명령에 의하여 굴기(屈期) 집합할 것. 一. 서약서와 동호의 증권이 있지 않으면 단원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 단 증권을 분실했을 때는 보증연서로서 청원함, 또한 본 증권의 호수를 비밀로 할 것.
대한정의단은 이를 위해 비밀리에 독립군을 편성하고 부대원을 모집하였으며 산하단체로 대한군정회를 조직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무렵 대종교 2세 교주인 김교헌이 교통을 전수하려 하였으나 서일은 항일무장투쟁에 전념하기 위해 5년간 교통전수를 유보하기로 하였다. 대종교총본사,『대종교중광육십년사』, 390~391쪽.
서일은 1919년 5월 중광단을 대한정의단으로 발전시켜 단장에 취임하여 4대 강령과 7대 규약을 제정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1919년 7월 서일은 대종교 동도본사의 중심인물인 계화․김붕․김일봉․정신․김암 등과 함께 일본 내각총리대신 原敬 하라 다카시(原敬;1856~1921)는 이와테현(岩手縣) 모리오카시(盛岡市)에서 태어났다. 1879년 사법성법학교를 중퇴하고 기자생활을 거쳐 1882년 외무성에 들어갔다. 1892년 조선에서 일어난 방곡령사건과 관련하여 조선정부와 배상액 협상을 위해 내한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896년 조선주재 일본공사로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사임하였다. 이후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사장이 되었다. 1900년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체신상을 지냈고, 1902년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 1918년 데라우치(寺內正毅) 내각이 무너지자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종래의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소위 문화정책을 표방하였다. 1921년 도쿄역(東京驛)에서 암살당하였다. 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서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신을 보낸 시점과 내용을 살펴보면 서일이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일제에게 보낸 일종의 통첩으로 생각된다. 서일은 대한정의단을 1919년 10월 군정부로 개편한 후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 기지를 구축하였다. 이서신은 이후 서일이 이끌고 있던 대한군정서의 정신적 배경과 투쟁 방향을 알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서신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일등이 일본내각총리대신 원경에게 보낸 편지」(독립기념관 소장, 자료번호 3-003861-135, 봉투포함). 원래 서신은 순한문으로 되어있다.
日本內閣總理大臣原敬 閣下
기미 칠월 일 조선인사 서일(徐一) 계화(桂和) 김붕(金鵬) 김일봉(金一鋒) 정신(鄭信) 김암(金암) 등은 일본내각총리대신 원경(原敬) 각하에게 삼가 글을 보냅니다. 무릇 시(時)는 다시 오지 않고 세(勢)는 양립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시무(時務)를 아는 자는 세(勢)에 연유하기를 귀히 여기고, 세위(勢位)를 잡는 자는 시(時) 타기를 귀히 여기니, 이것이 소위 시무(時務)와 세위(勢位)가 아니면 영웅을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금일 일본은 과연 동아 선진국이니 저희들은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훗날 일본이 또다시 세계 부강국가 되니 저희들은 또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집사자(執事者)는 조선인으로써 조선을 위해 듣기를 꾀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동양의 다행스러움이 심합니다. 시험삼하 보건대 서세(西勢)가 동점(東漸)하는 것이 날로 심한데 하루라도 오히려 동양인의 위세가 멀리 서양 땅에 한 치라도 보탰다는 것을 듣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무릇 오족(五族) 중에 세력의 우승(優勝) 경계를 점한 자는 오로지 백인(白人)이며, 육대주(六大洲) 중에서 크게 시국의 경쟁 마당이 된 것은 오로지 동아(東亞)입니다. 영국이 인도에게, 프랑스가 안남에게, 독일이 소아세아에게, 아프리카가 서백리아에게 있는 것이 모두 그러한데, 오로지 일본이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기세로 원동(遠東)의 한 모퉁이에서 일어나 유신(維新) 50년에 울연(蔚然)히 동아(東亞)의 강자가 되었으니, 일전(一戰)하여 청조(淸朝)에서 대만(待滿)을 나누어 가지고, 두 번 싸워 아령에서 여순을 빼앗고, 세번 싸워 덕조에서 청도를 점거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의 세력이 해가 중천에 뜬 것 같아서 백인의 원동(遠東)의 책략이 드디어 크게 꺾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은 다만 땅을 넓힐 계획에만 힘쓴다면 이미 심근고체하여 황족(黃族:아시아 황인종) 사이에서 우이(牛耳)를 잡고자 하는 것과 같으니, 장차 백인(白人)의 뜻을 능가함이 있다면 일본이 지금 동아시아에 베풀고 있는 책략 또한 이미 늦었을 뿐이니 어찌하겠습니까? 다만 19세기 이래로 서인 침략주의의 자취를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진실로 20세기가 갈수록 새로워지는 좋은 계책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성효(成效)는 항상 착착(着着) 서인(西人)의 뒤에 서있게 되니 어찌하겠습니까? 다행인 것은 하늘은 가득 찬 것을 누르고, 크게 강한 것은 반드시 꺾으므로 구주의 전쟁이 생각 밖에서 일어나면 백인이 우세하고 강한 자가 저절로 서로 죽이는 까닭으로 황족의 화가 그 때문에 조금 늦어질 뿐입니다. 만약 수년 전에 백인국으로 하여금 마음과 힘을 합하여 오로지 원동(遠東)의 계책에 뜻을 두었다면 하나의 일본으로는 능히 그 칼끝을 묶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세가 진실로 추(鄒)나라로 초(楚)나라 대적하기를 면하지 못하고 황족(黃族) 살이 백인의 강식(强食)이 되지 않는 것은 거의 드물 것입니다. 지금인 즉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의 세력이 한 번 죽고 한 번 다치는데 만약 가운데 서서 그 변하는 것을 보는 자가 있어서 다치는 것을 따라서 찌른다면 저 백인이 어찌 저자거리의 새끼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때에 황족이 떨치지 못하는 것은 그 또한 백인의 다행일 뿐입니다. 개전(開戰) 이래 구주(歐洲)와 백인(白人)의 나라가 상처를 입지 않음이 없었는데도 백 년 동안 도모하던 원동(遠東)의 책략이 일거에 땅을 휩쓸자 이에 서서 도모하는 자는 그 배꼽을 씹고, 앉아서 이야기 하는 자는 그 발을 그려서 시(時)를 구하고 세(勢)를 당길 책략에 급급(汲汲)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평화(平和)의 회의가 겨우 끝나자 연맹(聯盟)의 논의가 또 거론되니, 이 두 가지가 백인을 위한 계책이라 한다면 가(可)하나 진실로 황족(黃族)의 이로움은 아닙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수 년 동안의 전쟁에서 백인의 성년(成年) 중 열에 하나도 남지 않았으니, 이와 같이 수년을 이어간다면 백족은 남아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회의가 부득불 속개(續開)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난(亂)을 겪은 여러 국가로 하여금 백성과 더불어 휴식함으로써 삶을 도모하고 교훈의 계책으로 삼지 않는다면 백족에 강일(强日)이 없으니, 이것이 연맹회가 부득불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백인은 어찌 능히 동아(東亞)의 여러 나라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오로지 하나의 일본이 있어서이니 백인이 베개조차 감히 높이 베지 못하고, 황화(黃禍)의 설 황화(黃禍)의 설 : 황색 인종이 진출하기 때문에 백색 인종에게 미치는 침해나 압력. 청일전쟁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일본의 진출에 대한 반감에서 이를 주창하였다. 이 따라서 일어나면 밖으로는 평화(平和)의 주장을 펼쳐 동서(東西) 소약(小弱) 제족(諸族)들이 합치기를 유혹(誘惑)하지만, 안으로는 실로 황족(黃族)의 강자(强者)를 견제(牽制)하는 것입니다. 호주는 인종차별을 철폐하고자 하지 않는 나라인데 이것이 아니면 어찌하겠습니까? 미국은 배일(排日) 운동을 때만 있으면 격렬하게 일으키는 자인데 또 이것이 아니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이 진실로 동양지사들이 한 번 아프고 두 번 눈물 흘리는 때인데, 방관자(傍觀者)는 이것을 황족의 위기(危機)라 하지 않는 자가 없고, 당국자(當局者)는 오로지 스스로 편안히 여기는 계책으로 삼는 즉 어찌 스스로 원교근공(遠交近攻)의 계책에 빠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의 진취주의(進取主義)를 견지(堅持)하는 자는 걸핏하면 섬나라는 답답해서 살수가 없을 뿐이니 반드시 한반도를 병탄(倂呑)해서 대륙으로 나아가는 거점(據點)으로 한 연후에야 동양의 패권(覇權)을 잡을 수 있고, 서양인이 세상에 횡행(橫行)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호라. 이는 바로 시(時)를 지나치고 세(勢)를 거스르는 주장입니다. 대저 시(時)와 세(勢)라는 것은 상(常)을 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최고의 전제국가인 노서아(露西亞)가 변하여 공화정이 되니 시(時)에는 상위(常位)가 없으며, 세계최대 강국인 보로사(普魯士:프로이센)이나 한 번 패하여 포로 죄수가 되니 세(勢)에는 상승(常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바로 민족평등의 시대이며, 특별히 지난날 한 사람이 횡행하던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한 즉 소위 침략주의자(侵略主義者)는 이미 호로(葫蘆)가 되었을 뿐입니다. 다만 조선 한 가지 일로 논한다면 합병하는 것이 일본에 유리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그것이 불리를 야기하는 것은 거의 굽힐 수 없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조선은 오래된 나라입니다. 그 역사가 독립되었고 그 종교가 독립되었으며 언어 문자 윤리습속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라도 독립하지 않음이 없으니 진실로 대만(臺灣)이나 유구(琉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그 백성의 지혜가 조금이라도 열리고 인심(人心)이 자결(自決)한다면 십 수년 내에 정부가 동화(同化)를 고심한 것이 헛된 일로 돌아갈 뿐이니 그것이 첫 번째 불리함입니다. 합병한 이래 한국에게 베푼 시책이 성수불루(盛水不漏) 성수불루(盛水不漏) : 가득 찬 물이 조금도 새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물이 빈틈없이 꽉 짜였거나 매우 정밀함을 이르는 말. 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생각이 압죽사순 달퇴암수인 까닭에 관리에 있는 자 감히 대도시 가운데를 혼자 걸을 수 없어서 항상 경찰의 역할에 급급해야하며, 마음을 쓰고 재물을 쓰는 것이 미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것이 두 번째 불리함입니다. 조선은 가난한 나라입니다. 온 나라의 재물을 통틀어도 경상의 용도에 제공할 수 없어 모국(母國)의 재물을 쏟아 보충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이 세 번째 불리함입니다. 조선은 강한 민족입니다. 임전무퇴(臨戰無退) 배물견적(背勿見敵)의 유훈(遺訓)과 여습(餘習)이 오래도록 사람 마음속에 젖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조춘(早春)에 독립(獨立)을 선언한 이래로 적수단심(赤手丹心) 갑부을기(甲仆乙起)로 사상(死傷)과 형옥(刑獄)의 참상(慘狀)을 당하였으나 분발하여 스스로를 돌보지 아니하고 광복한 후에야 그만두기를 기약하니 까마귀도 궁하면 오히려 쪼는데, 하물며 온 나라 사람이 일심(一心) 동성(同聲)함이겠습니까? 만약 일본으로 하여금 대규모로 진압 정책을 시행하고 수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수억의 재물을 쓴다면 다행히 전승(全勝)하는 공(功)은 있겠으나, 진실로 그 마음을 열복 (悅服)시키기에는 어려우니, 그것이 네 번째 불리함입니다. 또 황족의 다툼은 백인의 이득이니 조개가 도요새를 물면 반드시 어부의 독수(毒手)가 있을 것이며, 참새가 사마귀를 잡으면 우인(虞人) 우인(虞人) : 경험이 많고 능숙한 사냥꾼. 의 비탄(飛彈)이 없을 수 없으니, 그것이 다섯 번째 불리함입니다. 일한(日韓)의 다툼이 한 번 일어나면 중화(中華)의 반대당과 아국(俄國)의 과격파(過激派) 또한 장차 기회를 타서 동양평화를 유지하는 대책이 장차 무너질 것이니, 그것이 여섯 번째 불리함입니다. 또 일본의 강함은 구미(歐美) 사람이 싫어하는 바가 될 것이며, 그것이 조선 독립을 도와 독립(獨立)하게 하는 것이라 말하는 자가 어찌 우리 한국을 진시로 애련(愛憐)해서이겠습니까? 그 방도가 진실로 일찍이 일본의 세력을 점점 깎으려는 것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군사를 일으키는 일에 재물을 써서 없애는 것에 조금도 아까움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로써 팔(八)을 굴복하려고 하니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까? 그것이 일곱 번째 불리함입니다. 이러한 큰 불리(不利)가 있는데도 일본이 오로지 유리하다고 한다면 저희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동아를 위한 계책으로는 두 가지 이익에 만전을 기하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조선을 분립(分立)함으로써 지난날 우방이 부식(扶植)한 맹약을 실천하고, 중화(中華)와 친선(親善)함으로써 동양평화 유지 정책을 온전히 하는 것입니다. 정치(鼎峙)하여 서고, 순치(脣齒)로 의지하며 그 주권을 굳건히 하고, 그 실력을 배양하여 구미 사대 강국과 능히 싸울 수 있은 다음에 나아가 안남(安南) 인도(印 度) 등 백인에게 속박 아래에 있는 동아 제족(諸族)들을 구한다면 서인(西人)들이 감히 고기를 묶듯이 할 수 없으며, 동양인들은 일본에 덕(德)을 돌리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무릇 이와 같이 한다면 천하(天下)를 대적하는데 장차 무엇이 거리껴서 하지 못하겠습니까? 백인이 일패도지(一敗塗地)하고 일본이 홀로 동아의 영웅이 되는 것 또한 시세(時勢)의 조화가 아님이 없으며 실로 천년에 한 번도 만날 수 없는 좋은 기회입니다. 때가 이르렀는데 행하지 않으면 지자(知者)가 경계할 바이며, 그 허물은 적은 것이 아닙니다. 어찌 당국(當局) 집사(執事)가 심모원려(深謀遠慮)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무른 일찍이 오늘날의 병렬(竝列)하여 오강(五强)을 논하자면 일본이 자부심으로 기뻐하기에는 부족하며, 인종차별은 바로 일본의 막대한 치욕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이 계책을 계획한 것은 진실로 선제후진(先齊後秦)이 아니며 일본이 이 계책을 쓰는 것 또한 위초비조(爲楚非趙)가 아닙니다. 원컨대 광부(狂夫)의 말이라 하여 버리지 말고 또한 사사로이 도모한 것이라 의심하지 않으신다면 진실로 우리 동양의 다행이요 황족(黃族)의 복입니다. 각하의 판단을 공경하며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서일 등이 일본내각총리대신 원경에게 보낸 서신내용을 요약하면 세계열강들은 대개가 백인들로서 그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남의 나라 영토를 침략하고 지배하여 왔는데 아시아에서는 현재 일본이 그들과 같이 침략행위를 행하고 있고, 특히 한국을 합병한 일이 일본에게 불리한 점을 7가지로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또한 한국과는 오랜 관계를 지속해 왔던 나라에 행할 행위가 아니므로 일본은 침략행위를 중단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힘써 달라는 내용이다. 대한정의단은 중광단과 마찬가지로 대종교 정신을 토대로 한 항일무장투쟁을 추구했다. 따라서 단장인 서일은 獨立軍政會라는 무장조직을 정의단 내에 따로 설치하고 본격적인 무장혈전을 준비하는 것이다. 또한『一民報』와『新國報』라는 한글신문을 발행하여 재만동포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여기서도 주목되는 것은 순수한글 사용의 정신적 배경이 대종교 정신에 기반을 두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글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주시경이나 지석영 ․ 김두봉 등 한글개척의 선각자들이 모두 대종교도로서, 대종교의 정신에 의해 한글사랑을 실천했다는 것과 연결된다. 대종교총본사,『대종교중광육십년사』, 99~101쪽. 대한정의단은 독립군 편성을 위한 준비로 각지에서 결사대원 또는 단지결사대원을 모집하여 총 1,037명의 결사대원을 확보하였다. 서일은 대한정의단에 대한 정비와 더불어 왕청현을 중심으로, 대종교 정신을 통한 민중적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 갔다. 신용하,「대한(북로)군정서 독립군의 연구」, 204~206쪽.
그러나 대한정의단의 주요 인물들은 군사부문에 비전문가로서 항일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정의단 총재 서일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좌진․조성환 등 한말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군사전문가들이 많은 吉林軍政司와 연합을 추진하였다. 길림군정사는 김좌진이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1919년 3월 중순 조직한 독립군단체이다. 길림군정사의 경우는 군사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으나 이를 뒷받침해 줄 대중적인 지지 기반을 갖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가을 대한정의단 총재 서일의 연합제의를 받아들여 길림군정사와 연합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북로군정서)로 발전하였다. 김준엽․ 김창순 공저,「중광단․ 정의단․ 북로군정서」,『한국공산주의운동사』제4권, 1974,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4, 138쪽. 대한정의단은 1919년 10월 軍政府로 개편하였다가 정의단의 군정부 조직의 중심인물은 대종교인이었다. 그 명단을 보면 서일․현천묵․김좌진․계화․이장녕․김규식․이범석․조성환․박성태․정신․김찬수․박두희․홍충희․이홍래․윤창현․나중소․김성 등이다.(고대민족문화연구소,「동만지방」,『한국문화사대계(민족국가사)』, 1964, 695쪽 ; 박영석「대종교의 민족의식과 독립운동」,『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일조각, 1982, 163~164쪽)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대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북간도에서 대한군정서가 조직된 것과 같은 시기에 서간도에서는 부민단과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서로군정서가 조직되었다. 양군정서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서로 협의․원조하였다. 주목할 점은 양군정서의 간부들이 대부분 대종교 신도였으며, 양군정서의 활동이 대종교 단군신앙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양군정서 대표 서일과 이상룡은 서신과 대표 파견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고 군사작전 협조를 도모하였다. 『일제기밀문서』고경 제23793호 북로군정서 대표 김좌진과 서로군정서 대표 성준용 사이의 체약문 ; 李相龍,『石洲遺稿』제3권,「答徐白圃書」,「與徐白圃書」,「與金佐鎭書」;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제8권(문화투쟁사), 773쪽 ; 佐佐充昭,「간도 한인사회와 대종교의 민족독립운동」, 68쪽. 1920년 이상룡이 서로군정서 군사요원을 안도현으로 성준용․이범석․강남호를 파견할 당시 지은시 ‘送成駿用李範錫姜南鎬遊內島山(내도산 내도산은 乳頭山이라고도 하는데 연길에서 백두산에 거의 이른 지점인 二道鎭을 지나서 위치하고 있다. 으로 가는 성준용․이범석․강남호를 전송하다)’ 『石洲遺稿』, 「送成駿用李範錫姜南鎬遊內島山」, 제1권, 31쪽, 를 보아도 양군정서 간부들은 대종교 단군신앙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일본군과 혈전에 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기 이상룡의 시(詩) 내용 중 “此行必獲神明助(이번 걸음에 반드시 신명의 도움을 얻으리니) 檀帝於昭眷大東(단군께서 아아 밝게 우리 대동을 돌아보시리라)”.〔안동독립운동기념관편,『국역 석주유고』상, 경인문화사, 2008, 169쪽〕
3) 대한군정서
대한정의단은 1919년 10월 軍政府로 개편한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대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서일이 1911년 3월 조직한 중광단이 1919년 5월 대한정의단으로 확대되고 1919년 가을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발전하였다. 대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 총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대한군정서의 중앙조직은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누었으며 총재부는 군정서의 대외업무와 행정업무를 담당하였고, 사령부는 군사부분을 담당하였다. 사령부 총사령관 김좌진은 李章寧․羅中昭 나중소에 관해서는 박환,「나중소의 생애와 독립운동」, (제4회 고양독립운동사 학술심포지움 발표문. 2016. 9. 7)이 있다. 등과 함께 대한군정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1920년 2월초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였다. 김좌진은 사관연성소 소장이 되어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으로 교관과 각종 교재를 지원받았으며 교관으로는 이범석․金奎植 등이 훈련을 담당하였다. 사관연성소는 1920년 9월 9일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하였으며 『동아일보』1930년 2월 16일「故白冶金佐鎭種種揷話 (三)」(대한군정서 사관연성소 소장 김좌진 명의로 발급한 졸업증서) ;『독립신문』1921년 2월 25일「대한군정서보고」. 이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敎成隊를 조직하였다. 이때 조직된 교성대는 최정예부대로서 이후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대한군정서의 주축이 되었다. 청산리대첩에 참전했던 대한군정서 간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대종교총본사,『대종교중광육십년사』, 369~380쪽.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부관 나중소
부관 박영희(朴寧熙)
연성대장 이범석
종군장교 이민화(李敏華) ․ 김훈(金勳) ․ 백종열(白鐘烈) ․ 한건원(韓建源)
대대장서리 홍충희(洪忠憙)
제1중대장서리 강화린(姜華麟) 이동언,「청산리대첩과 강화린(근호) 중대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369호 월례연구발표회 발표문(2020. 12. 8).
제2중대장 홍충희 제3중대장 김찬수(金澯洙) 제4중대장 오상세(吳祥世) 대대부관 김옥현(金玉玄)
청산리대첩 후 대한군정서의 서일 총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 부하 300여 명이 일본군 1,300여 명을 격살”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청산리대첩은 한국독립군이 벌인 전투 중에서 대승을 거둔 대표적인 전투였다.『독립신문』1920년 12월 13일「대한군정서보고」.
4) 대한독립군단
청산리대첩에서 대패한 일제는 대종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당시에 희생당한 대종교도들만도 수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서일은 동포들의 희생을 최소화시키고 장차 연해주로 이동하기 위한 전략으로 대한군정서를 소만 국경지역인 밀산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밀산은 독립군이 장기간 주둔하기에는 한인사회의 재정적인 기반이 취약한 곳이어서 독립군 지도자들은 러시아지역인 연해주로 이동하여 체제를 정비하고 새로운 항일무장투쟁 방략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연해주는 간도와 마찬가지로 1910년대부터 항일독립운동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고, 약 20만에 이르는 한인들이 대규모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독립군 근거지로는 적지로 부상하고 있었다. 더욱이 러시아 10월혁명 이후 소련정부가 피압박 약소민족 해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해주지역은 만주지역 독립군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인식되었다. 독립군단 지도자들은 연해주로 이동을 결정한 후 하나로 통일된 독립군단을 결성하기 위해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 조직은 3개 대대로 구성된 1개 여단을 두었으며, 1개 대대는 3개 중대, 1개 중대는 3개 소대로 구성되었다. 1개 소대의 인원은 27명이었으며 병력은 3,500명에 달하였다. 1920년 12월에 밀산현 평양진에 집결한 독립군 단체는 대한독립군․대한군정서․간도대한국민회․대한신민단․군무도독부․의군부․혈성단․야단․대한정의군정사 등이다. 밀산조선족백년사편찬위원회,『밀산조선족백년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7, 47~48쪽. 서일은 밀산으로 집결한 10여 개의 단체를 통합하여 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총재로 추대되었다. 대한독립군단 지휘부의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Ⅲ, 原書房, 1967, 382~383쪽 ; 신용하,「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한국근대민족운동사연구』,일조각, 1988, 332~333쪽 ; 김춘선․안화춘․허영길 공저,『최진동장군』,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183~193쪽.
총 재 서일 부 총 재 홍범도 고 문 백순 ․ 김호익 외교부장 최진동 사 령 관 미상(김좌진 겸임설 있음) 참모부장 김좌진 참 모 이장녕 ․ 나중소 군사고문 지청천 제1여단장 김규식 참 모 박영희 제2여단장 안무 참 모 이단승 제2여단 기병대장 강필립 중대장 김창환 ․ 오광선 ․ 조동식
1921년 1월초 대한독립군단은 노령 연해주와 흑룡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문창범 등의 도움을 받아 소만 국경인 우수리강을 넘어 이만을 거쳐 연해주로 향하는 대이동을 시작하였다. 황민호․홍선표,『3․1운동 직후 무장투쟁과 외교활동』(한국독립운동의역사 2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141~142쪽 ; 박영석,「만주지역에서의 항일독립운동」,『만주지역 한인사회와 항일독립운동』,국학자료원, 2010, 102쪽. 1921년 1~2월초 이만에서 만주에서 이동해 온 독립군 부대들과 연해주지역 독립군부대 3,000여 명이 대한의용군총사령부(일명 대한총군부)를 조직하고 군사 통일을 실현하였다. 대한의용군총사령부 조직당시 서일 ․ 홍범도 ․ 최진동은 참모부원으로 선출되었다. 장세윤,『홍범도의 독립전쟁』, 2007, 역사공간, 212~214쪽. 같은 해 3월 14일 노령 소추풍령에 집결한 독립군 단체들은 1,000여 명에 달하였는데 밀산에서 결성된 대한독립군단을 다시 대한독립군총합부로 재편하였다. 대한독립군총합부는 총장 서일, 부총장 韓春雲, 군무부장 김좌진, 외교부장 최진동, 서기 朴來順, 경리부장 홍범도, 서기 李弘來, 비서과장 蔡黙, 정찰과장 徐仁極, 모연부장 金星地를 각각 선출하였다. 불령단관계잡건-조선인의부-재만주의 부(27) 비수3358호, 기밀제150호, 대정10년 3월 14일 ;『동아일보』1921년 3월 2일「小秋風嶺에 在한 大韓總合部內幕」기사에는 ‘大韓總合部’ 또는 ‘大韓國總合部’로 나와있다.김춘선․안화춘․허영길 공저,『최진동장군』, 187쪽. 대한독립군총합부는 니콜리스크에서 러시아 과격파와 연맹하고 인쇄기 2대를 구입하여 문서를 인쇄하여 선전하고, 홍범도․김좌진 등은 친일파 암살과 군자금 모금을 위해 부하 5명을 경성․평양․의주․원산․청진 등지의 조선인 형사와 친일파 성명 조사를 위해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였다.『동아일보』1921년 3월 19일「친일파 성명조사 서일의 명령으로 부하 5명이」.
1921년 4월 12일 이만에 모인 독립군 단체 수뇌들은 다시 독립군대회를 열어 대한의용군총사령부를 ‘대한독립단’으로 개칭하고 체제를 정비하였다. 신용하,「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 333쪽. 그러나 대한독립단은 당시 흑룡주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러시아 원동정부의 공동항일투쟁 제안에 반대하여 김좌진 등 대한군정서 계열의 독립군들이 이만을 떠나게 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다. 장세윤,『홍범도의 독립전쟁』, 214쪽. 대한독립군단의 일부 부대들은 1921년 3월경 자유시에 진주하였으나 지휘부는 줄곧 이만에 있었다. 홍범도․최진동을 비롯한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이 일제와 러시아 홍군세력의 중간지대인 이만으로부터 전로고려공산당 오하묵일파의 기반인 자유시로 지휘부를 옮긴 것은 1921년 5월 중순경이었다. 이때 서일․김좌진․이범석 등 북로군정서 지휘부는 자유시로 가지 않고 이만에서 밀산으로 되돌아왔다. 박영석,「백야 김좌진의 민족독립운동」, 189쪽 ; 김춘선․안화춘․허영길 공저,『최진동장군』, 197쪽.
한편 최진동․지청천․안무 등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서로군정서 계열은 공산세력들의 제의를 받아들여 자유시로 불리던 알렉세브스크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이른바 ‘자유시참변’을 겪게 되었다. 자유시참변은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와 간도지역에서 이동한 독립군이 고려혁명의회와 대한의용군으로 나뉘어져서 벌인 군권쟁탈전의 소산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재만독립군 주력부대가 소속해 있던 대한의용군은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였고 그 과정에서 지청천을 위시하여 수많은 독립군이 체포되고 감금되는 등 다수의 희생자가 생겼다. 채근식,『무장독립운동비사』, 102~106쪽 ; 박영석,「만주지역에서의 항일독립운동」, 102쪽 ; 박영석,「백산 이청천」,『재만한인독립운동사연구』, 314~327쪽. 1921년 6월 27일 ‘자유시참변’ 자유시참변은 한국독립운동사상 최악의 비극적인 사건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흑하사변’․‘흑룡주사건’․‘아무르사건’․‘자유시사변’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려진다. 으로 인해 독립군이 막대한 타격을 입고, 노령 국경부근인 밀산에서 재기를 위해 군사훈련을 하던 중 1921년 8월 26일 당벽진에서 수백 명의 토비들이 야습하여 살인, 방화 그리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로 인해 진중이 초토화되고 훈련 중이던 수많은 청년병사들이 희생당하자 서일은 다음날 독립군 지휘자로서 책임을 지고 자결을 결심하였다. 서일은 그의 스승인 홍암 나철이 殉命三條를 남기고 1916년 음력 8월 15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를 마음에 새기면서, 마침내 1921년 8월 27일 다음과 같은 홍암 遺書 중의 한 구절을 읊조리면서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대종교총본사,『대종교중광육십년사』,385~393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제8권, 776~780쪽 ; 채근식,『무장독립운동비사』, 98~100쪽.
굿것이 수파람하고 도깨비 뛰노니 하늘․땅의 정기빛이 어두우며 배암이 먹고 도야지 뛰어 가니 사람․겨레의 피․고기가 번지르하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오.
서일의 유해는 밀산현 대흥동에 안장하였다. 1924년 3월 16일 대종교 제3세 교주 윤세복은 서일에게 宗師․喆兄의 교질을 추승하였고, 1927년 봄 서일의 유해를 밀산현 당벽진에서 화장하고 화룡현 淸湖로 이장하였다. 이로써 나철․김교헌․서일 대종교 3종사묘역이 조성되었다. 대종교총본사,『대종교중광육십년사』, 396쪽.
4. 서일 사망설에 대한 검토
서일 사망과 관련하여 자살설과 피살설이 있다. 서일의 사망과 관련한 일제측 자료와 한국측 자료를 살펴보기로 한다. 일제측 자료로는 간도총영사관에서 본국에 보고한 2건의 기밀보고서가 있다. ①「軍政署 軍務總長 徐一의 死亡」,『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0)』(秘受13298號-高警 第28943號) 國外情報(1921년 11월 16일), ②「元 大韓軍政署 總裁 徐一의 死亡에 관한건」,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0)』(秘受 13990號-機密 第497號) 외무대신 백작 우치다(內田康哉)에게 보고한 보고서(1921년 11월 27일)가 있고, 한국측 자료로는 ③『대종교중광육십년사』, ④『동아일보』1921년 11월 15일「배일거두 서일 피살설」, ⑤『신한민보』1922년 1월 19일「독립군 총재 서일씨의 자결」등이 있다. 자료 ①과 ④는 마적에게 피살되었다는 내용이고, 자료 ② ③ ⑤는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서일 사망에 대한 상기자료 중에서 자료 ②는 일제의 기밀보고서인데 서일의 부친 徐在云의 통신으로 자살설을 뒷받침하는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로 생각된다. 기밀보고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元 大韓軍政署 總裁 徐一의 死亡에 관한건」,『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0)』(秘受 13990號-機密 第497號) 외무대신 백작 우치다(內田康哉)에게 보고한 보고서(1921년 11월 27일).
“전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은 마적의 유탄을 맞고 죽었다고도 하고 혹은 그런 사실이 없고 현재 생존해있다고 전하는 정보 등 구구하다. 그런데 11월13일 밀 산현에서 재 왕청현 대왕청 유수하 친부 旨 서일은 자살했다는 통신이 있었지만 자살이라는 것은 서일의 죽음을 장식할 한 수단이 아닌가 생각되나 작년 9월 이 래 그 행동에 관한 소식이 두절된 등 오늘날까지 경과에 비추어보면 사망설은 사 실인 것 같다. 전 군정서 총재 서일은 음력 8월 27일(9월 27일) 밀산현 쾌상봉 벽 리에서 자살했다는 내용이 11월 13, 14일 경 재왕청현 대왕청 유수하 친부 서재 운에게 통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 통신에 서일이 자살사망에 이른 사정에 관해서 말하는 것에 의하면 서일은 음 8월27일 동지 10여명과 만나 독립에 관한 문제를 토의했지만 금후의 행동에 관해 아무런 기대할만한 방침 등이 없고 또한 유일하 게 의지한 태평양회의는 형세 전도가 낙관할 만하지 못하다는 일반의 관측이 있어서 서일은 매우 이를 비관하여 나철(지금부터 7,8년전 자살한 서일의 사부이다) 의 유서를 품에서 꺼내어 재삼 암송하고 나서 서일은 자리를 바꿔 모인 동지에 대해 <지금 나 선생의 유서를보니 나의 희망한 조국독립의 전후관계는 거울을 보 는 것처럼 본서에 상세하게 적 혀있다. 급히 토의할 필요도 없다.>고 하여 산회 하였는데 동일 저녁때에 이르러 서일이 외출한 채로 돌아오지 않은 결과 음력 9 월 9일(외출한지 12일째)에 쾌상봉 벽리라고 하는 산곡에서 사체를 발견했다. 사 체를 살펴보니 전신에 한 점의 상처도 없었다. 생각건대 독약자살을 기도한 것 같다.
또한 서일의 자살의 원인에 관해 다음의 일설이 있다.
러시아 과격파의 지원을 받는 최명록(최진동-필자 주) 일파와 서일 일파와는 항상 서로 반목한 상태에 있었다. 최근 최명록의 세력이 커지는데 반해 서일 측은 고 립되고 세력을 잃는 모습을 보이는 데다가 최명록은 위압적으로 그 손을 서일 일 파에게 뻗쳐 서일의 부하를 자신의 세력안에 흡수하고자 기도하고 있던 사실에 관해 서일이 이에 분개하였고 또한 유일한 희망을 건 태평양회의에서 조선독립문 제를 의논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오히려 죽 어서 명예를 후세에 남기려한 점도 없다고 할 수 없다. 자살한 것이 라는 별보가 있었다.”
서일은 자신의 죽음으로 대종교의 발전과 분열된 독립진영이 단합하여 대일항전에 분발할 것을 촉구하고자 수전병행의 행동철학을 최후까지 실천하였다. 서일은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과 함께 대종교 교세 확장에 크게 기여하여 대종교 전성기 시대를 이룬 인물이다. 김교헌은 서일에게 대종교 교통을 전수하고자 할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돈독한 관계였고 대종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김교헌은 서일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고, 병을 앓다가 1923년 11월 영안현 남관의 대종교총본사 수도실에서 병사하였다. 대종교총본사,『대종교중광60년사』, 362~365쪽.
5. 맺음말
서일은 1881년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함경도의 대표적인 유학자 김노규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한 후 1902년 경성유지의숙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 고향에서 10년간 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하다가 경술국치 후 1911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1912년 왕청현 덕원리에 명동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매진하다가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서일이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것은 1911년 이후이다. 그는 북간도로 건너온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1911년 3월 중광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추대되었다. 중광단은 1919년 5월 일부 공교도들과 연합하여 대한정의단으로 발전시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이어 대한정의단 총재 서일은 김좌진․조성환 등 군사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길림군정사와 연합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한군정서는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대첩에서 대패한 일제의 추격을 피해 서일은 대한군정서를 소만 국경지역인 밀산으로 이동시키고 대한독립군․대한국민회 등 10여개 독립군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총대로 추대되었다. 자유시참변으로 타격을 입고 밀산에서 재기를 준비하던 중 1921년 8월 26일 수백 명의 토비들의 야습을 받게 되자 다음날인 27일 서일은 독립군 지휘자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 순국하였다. 서일이 중광단을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서게 된 것도 대종교 투쟁목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서일의 항일무장투쟁은 단순히 대일항전을 통한 민족독립을 넘어서 대종교의 이상국가 건설과도 직결된다. 이러한 목표완성을 위해서는 조국광복을 위한 투철한 투쟁정신과 더불어 종교적 완성을 위한 수행과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서일은 수전병행의 행동철학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서일(徐一) 총재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과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종교인.개설본관은 이천 서씨(利川). 함경북도 경원 출신.
본명은 서기학(徐夔學), 호는 백포(白圃).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鏡城咸一師範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하고 교육구국사업에 종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에서 항일투쟁의 어려움을 느끼고 만주로 건너갔다.1911년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청년동지들에 대한 민족정신과 한학을 가르쳐 정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교육에도 뜻을 두어 간도지방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1912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리의 연구와 포교활동에 주력하였으며, 1916년 총본사(總本司) 전강(典講)이 되어 활동한 결과, 나철(羅喆)의 교통(敎統) 계승자의 물망에 올라 사교(司敎)로 초승(超陞)되고 영선(靈選)에까지 올랐다.1917년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겨 만주와 노령(露領)의 동포에게까지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을 발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듬해 중광단을 토대로 군사적 행동을 위해 계화(桂和) 등과 대한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다.1919년 대종교 2세교주인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이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려고 하였으나 독립군 양성과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교통의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같은 해 8월 현천묵(玄天默)·김좌진·계화 등과 함께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軍政府)로 만들고, 12월에는 다시 한 민족에게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 하여, 이것을 토대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면서 총재에 취임하였다.또한 틈틈이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하며 수도에 힘써 교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저술에도 힘을 기울이며 포교활동도 하였다.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고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마련해준 군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정규병력 1,500명으로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였다.또한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세워 중견사관을 길러내고, 각지에 야간강습소와 소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찔렀고 병력을 북만(北滿)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시켰다. 이듬해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인해 밀산현으로 들어온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의 도독부군(都督府軍) 및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등 여러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1921년 6월 27일 자유시 수비대 29연대, 2군단 기병대대, 라키친 저격연대가 동원되어 사할린 부대에 대한 무장해제에 들어갔다.그러나 러시아 군인과 항일무장독립군 부대원 사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러시아 군인은 사할린 부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동원된 러시아 부대는 무장을 한 항일무장독립군에 대하여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청년장병 다수가 희생당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나게 되었다.이에 같은해 8월 27일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라는 글귀를 남기고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활동과 지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대종교에서는 그를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증명으로 종교의 교리를 체계화한 대철(大哲)로 성인(聖人)이라고 추앙하고 있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 그리고 계시를 받고 지었다는 『회삼경(會三經)』 등이 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계
부인 : 채씨
장녀 : 서모(徐模, 1902~?)
차녀 : 서죽청(徐竹淸, 1906~?)
사위 : 최관(1900~?)
아들 : 서윤제(1908~1969) 독립운동가
자부 : 권씨(1907~1931)
손자 : 서경섭(徐敬燮, 1925~2008)
손자 : 서만섭(徐萬燮, 1930)
목차
- 1 가족
- 2 대종교(大倧敎)
- 3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 4 중광단(重光團)
- 5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 6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 7 청산리대첩
- 8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靑山里 抗日 大捷 紀念碑)
- 9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 10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 11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 12 백포 서일(徐一) 선생의 시어록비(독립기념관 어록비공원)
- 13 회삼경(會三經)
- 14 사단법인 서일총재기념사업회
- 15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손자를 만나다
- 16 백포 서일 총재의 고손자 서영승씨 “독립지사 후손답게 고국 위해 봉사”
- 17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 통해 재조명 '청산리 독립 전쟁의 서일 총재'
- 18 항일무장투쟁의 별 -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 정길영 (지은이)
- 19 백포(白圃) 서일(徐一)과 대종교-그 정체성(正體性)의 여정(旅程)-김 동 환 (국학연구소)
- 20 백포 서일과 청산리대첩- 김 병 기 (광복회학술원)
- 21 1910~20년대 중국 동북지역 - 항일무장투쟁과 서일- 이 동 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 22 백포 서일의 독립운동과 자유시참변- 장 우 순 (성균관대학교)
- 23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 24 이섭대천(利涉大川)
- 25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26 같이 보기
가족
1세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의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 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
4세 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掌冶署令).정 3품.장관)
5세 서면(徐冕 주부(注簿).정 4품.차관보)
6세 서린(徐嶙 판대부사(判大府事).정 2품.부총리)
7세 서찬(徐瓚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
8세 서인(徐諲 교수(敎授).도승지(都承旨).정 3품.장관.대학자)
9세 서욱(徐勖 도승지(都承旨).정 3품. 장관)
10세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判司宰事).종 2품.부총리)
11세 서유(徐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 정2품. 장관.양경공파(良敬公派))
12세 서경흥(徐敬興. 목사(牧使). 정3품.당상관.차관)
13세 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
14세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
15세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
16세 서희안(徐希顔. 사용공(司勇公)
17세 서득천(徐得天. 의병장(義兵將).부사용(副司勇) · 창의순절(副司勇 · 倡義殉節)
18세 서사도(徐思道. 의병장(義兵將).율곡 이이(栗谷 李珥) 문인.임진란 순절(壬辰亂殉節 )
서사근(徐思近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判決事)·.의병장(義兵將))
서사원(徐思遠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서사적(徐思迪)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19세 서일원(徐一元 .용기위사정(龍驥衛司正).학자(學者)
서종언(徐從彦 이흥군(利興君).오위부총관(五衛副摠官). 종 2품.차관)
서일회(徐一會)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대종교(大倧敎)
1909년 나철(羅喆)이 조직한 종교.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삼종사 묘역은 들 가운데 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구릉. 옛 주소는 화룡현 청파호이다. 삼종사란 대종교(大倧敎)의 홍암(鴻巖) 나철(羅喆, 1863~1916) 대종사,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7~1923) 종사,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 종사를 말한다.
중광단(重光團)
1911년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서일(徐一) 등이 국외로 탈출하는 의병들을 규합해서 조직하였다. 단장은 서일이 맡았고, 본부는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에 있었다. 둥베이 지방 무장독립운동의 효시가 된 단체로,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군사활동보다는 청년 지사들의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애국운동 함양 등 정신교육에 치중하였다.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3·1운동 직후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 등이 중광단(重光團)의 토대 위에 적극적인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동북만주의 대종교도(大倧敎徒)를 규합하여 조직하였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지린성 옌지시 이란구(吉林省 延吉市 依蘭區)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되었던 독립군 단체.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군정회(大韓軍政署, 약칭 군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약칭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대한군정서로 인준받았다.
청산리대첩
1920년 10월 21∼26일, 서일(徐一)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靑山里 抗日 大捷 紀念碑)
청산리(靑山里) 대첩 80주년을 기념하여 2001년에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청산리 산림장 입구에 건립된 비석.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서일(徐一)이 1920년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군 연합부대.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흑룡강성 계서시 118현도 영성촌(黑龙江省 鸡西市 一一八县道 永胜村)
서일(徐一)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
백포 서일(徐一) 선생의 시어록비(독립기념관 어록비공원)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동 삼방로 95 (남화리) 독립기념관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회삼경(會三經)
백포 서일(徐一) 종사 저서(白圃宗師著)
이 경의 내용은 삼일(三一)의 원리를 강해한 것으로 대종교 교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또 대종교는 유교·불교·도교의 세 교를 포함한 것인데, 이 경전은 실로 불교의 묘법(妙法)과 유교의 역학(易學)과 도교의 현리(玄理)에 관한 오묘한 뜻이 갖추어진 것이므로 혹시 [삼동계(參同契)]와 대조해볼지도 모르나 [삼동계]는 그 방술만을 탐구한 것이요, 이 경은 그 철리를 강술하여 인생철학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사단법인 서일총재기념사업회
위치는 인천 연수구 연수동 먼우금로 251번길 27, 201호
법인은 일제하 이국 만리에서 오로지 조국 독립과 민족 자주를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신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장군님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고, 순국선열유족과 더불어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조국과 민족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손자를 만나다
대를 건너 이어지는 북로군정서 창설의 역사
1911년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선택하고 고향을 떠난 서일 총재가 두만강을 건너 처음 만난 사람이 봉오동을 무장독립군 기지로 건설하고 있던 최운산 장군이다. 북간도 봉오동에서 처음 만난 최운산 장군과 서일 총재는 서로의 의기를 알아보았고 그 자리에서 무장투쟁을 결의하였다. 서일총재는 최운산 장군이 내어준 덕원리, 즉 서대파에 머물며 학교를 열었고, 서대파를 근거지로 대종교인들을 이끌었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함께 북로군정서를 창설하고 서대파를 무장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백포 서일 총재의 고손자 서영승씨 “독립지사 후손답게 고국 위해 봉사”
“선조의 항일·희생 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백포 서일 총재의 고손자로 이날 행사에 참석한 서영승씨(인천시 연수구)는 2대째 독립지사 가문의 후손이다. 서영승씨의 아버지인 서희우씨부터 서만섭, 서일 총재까지 이어지는 가계도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기 위해 평탄치 않은 가정사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 통해 재조명 '청산리 독립 전쟁의 서일 총재'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 ”로 시작하는 가곡 <선구자>의 첫 소절이다. 한때는 한국인이라면 이 가사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졌던 시기가 있었다. 가곡 <선구자>는 1절만 윤해영 작사이고, 2·3절은 후에 작곡자 조두남이 작사했다고 한다. 1절이 자주 불려서 2·3절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원래 제목은 ‘용정의 노래’ 였다. 1980년대까지는 널리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에 나오는 지명 때문에 만주, 특히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리하여 1980년대까지 매우 자주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나 곡 모두 훌륭한 가곡으로 평가되었으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던 가곡으로 매번 선정될 정도였다.
항일무장투쟁의 별 -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 정길영 (지은이)
서일은 교육자이며 애국계몽운동가요, 종교지도자이며 철학자요, 군사전략가이며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는 짧은 일생을 살면서 오로지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살신성인한 인물이었다.
백포(白圃) 서일(徐一)과 대종교-그 정체성(正體性)의 여정(旅程)-김 동 환 (국학연구소)
백포 서일과 청산리대첩- 김 병 기 (광복회학술원)
1910~20년대 중국 동북지역 - 항일무장투쟁과 서일- 이 동 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백포 서일의 독립운동과 자유시참변- 장 우 순 (성균관대학교)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