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포(白圃) 서일(徐一)과 대종교-그 정체성(正體性)의 여정(旅程)-김 동 환 (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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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포(白圃) 서일(徐一)과 대종교-그 정체성(正體性)의 여정(旅程)-김 동 환 (국학연구소)

1. 머리말 - 왜 서일인가

역사는 인간의 자취이다. 그 속에 나타나는 사건 역시 개개 인물들의 이해관계로 얽혀있다. 또한 역사에서 취급되는 개인은, 수많은 '군상(群像, A large group of people)'들 중의 '한 사람(Personal)'으로, 그 시대 그 개인과 관련된 가치나 무리를 대표하는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어떤 역사 속의 두드러진 인물이,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그 시대 삶의 일면을 보여주는 역사적 성격의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특정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인물에 대한 연구만큼 우선하는 것도 없다. 인물연구가 역사연구의 출발이자 본질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인물에 대한 선택과 해석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가치관과 무관치 않다. 그러므로 선택의 기준이 무엇보다 중요시된다. 그러나 그 기준이 기득권과 맞물려 역사적 무게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종교 혹은 대종교 관련 인물들에 대한 선택과 평가가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일제의 탄압에 의해 유일하게 망명하여, 모든 것을 산화시킨 집단이 대종교다. 그 구성원들 역시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끝까지 저항했던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대종교(인)들에 대한 평가는 너무도 인색하다. 해방 이후 기득권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 어느 진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백포 서일(1881-1921)에 대한 평가 역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치 수준과 그대로 맞물린다. 그는 일제강점기를 포효한 몇 안 되는 인물에 꼽힌다. 그럼에도 가장 저평가 된 인물 중의 하나다. 물론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평가된 인물들이 적지 않지만 서일을 꼽고자 이유는 간단하다. 일제하 짧은 생을 사는 동안에 종교·철학·교육·무장투쟁 등 여러 방면에서 실로 기적에 가까운 업적을 쌓은 인물이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일에 대한 집중적 인물연구는 해방 후 지금까지 거의 외면되었다. 다만 무장독립투쟁분야 연구에 있어,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와 관련하여 간접적으로 언급된 것이 다소간 있지마는 이것도 그의 삶에 근본이 되는 사상적 측면에서의 접근은 극히 희소하다. 무장투쟁 부분도 김좌진이나 홍범도·이범석 등의 명성에 덮혀, 그들을 통솔했던 서일의 이름이 일반인들에게는 그 이름마저 생소한 상태다. 인간 행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행동실천의 바탕이 되는, 그 개인의 가치관, 즉 정신이다. 이점을 고려한다면 서일에 대한 인물 접근에서 정신적 측면을 간과한 행동적 방면에서만의 접근은 체(體)를 모르고 용(用)만에 집착하는 이치라 할 수 있다. 본질을 외면한 채 현상구명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과연 백포 서일이 수많은 독립군들을 통솔하던 용기와 지혜의 바탕은 무엇이며, 그리고 종교적 수행·연구 속에서도 무장투쟁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군교일치(軍敎一致)·수전병행(修戰竝行)의 삶의 토대는 무엇인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바로 그의 사상에 이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 주목하고자 한 것은 백포 서일의 정신적 측면이다. 그는 대종교의 경험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과 일치시켜 초지일관했다. 그러므로 먼저 그를 각성케 했던 나철의 중광(重光) 정신이 무엇일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과 결합한 그의 항일투쟁의 본질을 수전병행과 군교일치의 가치로 접근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철학적 업적을 근대 우리 정체성의 불씨로 새겨보면서, 그의 정신이 지금도 현재진행형에 있음을 평가하고자 한다.

2. 백포 서일과 대종교

1) 중광의 선봉에 서서

1894년 갑오개혁과 청일전쟁을 계기로 개화정책론 내지 동도(東道)를 본(本)으로 한 서기수용론(西器受用論)으로서의 동도서기론은 현실적 의미를 잃게 된다. 갑오개혁은 이미 동도를 ‘본’으로 한 서기수용의 범주를 넘어섰으며, 청일전쟁에서 일찍부터 서구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일본이 승리하였다는 현실은 서도의 일부 혹은 전부까지 수용하자는 문명개화론에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개는 20세기에 들어서도 동양과 서양을 도(道, 도덕·정신)와 기(器, 과학·기술)로 구분하여 이해하려는 사고는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근래의 아시아적 가치론이란 것도 동양의 정신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핵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동도서기론의 범위를 많이 벗어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런 점에서 동도서기론은 좁게는 19세기 마지막 4반세기를 지배한 개화의 한 방법론이자 전략이지만, 넓게는 서양 문명 대두 이후 길게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일각에 존재하는 문명 독법의 하나로 이해되어 왔다. 그 동안 동도서기론에 대한 주요 연구들이 적지 않게 나왔다. 그러나 서구중심주의의 극복에 대한 측면에서만 조명되었을 뿐, 동도의 탈유교적 정체성 부재에 대한 역사적 재구에 대해서는 극히 소홀했다. 당시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이나 화혼양재(和魂洋才)와 우리의 동도서기를 그대로 등치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의 중체·화혼정신에 숨어 있는 그들의 고유한 정체성과는 달리, 우리가 내세운 동도는 우리의 정체성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당시 우리의 동도는 유교라는 소중화적 가치의 연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탈유교적 정체성에 대한 진정한 자각은, 20세기 일어난 단군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 단군에 대한 인식은 1896년에 설립된 독립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한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의 역할 뿐만 아니라, 1906년에 결성된 서우학회(후일 서북학회로 개편)의 활동과 더불어 『대한매일신보』라는 매체가 큰 기여를 하였다. 1905년 정교와 최경환이 편찬한 『대동역사』에서는 단군조선을 서술함에 있어, 우리 민족이 단군시대부터 문물제도와 문화를 갖춘 민족이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류근(柳瑾)이 원영의(元泳義)와 함께 편찬하고 장지연(張志淵)이 교열한 『신정동국역사(新定東國歷史)』에서는 ‘조선’이라는 국호의 의미를 설명한 후, 「단군조선기」를 맨 앞에 싣고 있음이 주목된다. 여기서는 개국기원을 시작으로 단군 탄생으로부터 도읍과 국호를 정하는 과정을 서술했을 뿐만 아니라, 문물제도를 비로소 세웠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마니산 제천단과 삼랑성(三郞城)의 연유를 서술함과 아울러, 태자 부루(夫婁)의 도산회의(塗山會議)에 대해서도 언급했으며, 구월산 당장경(唐莊京)으로 도읍을 옮긴 과정까지도 말하고 있다. 더욱이 단군의 부인인 비서갑(斐西岬)뿐만 아니라, 구월산 삼성사와 평양의 단군릉·숭령전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러한 단군에 대한 열기는 1909년 대종교가 성립되면서 최고조를 맞게 된다. 그 중심에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나철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의 길을 걷던 인물이었으나 우국의 뜻을 품고 벼슬길을 포기했다. 나철이 벼슬길을 포기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내우외란이 그치지 않고 국운이 쇠망해가던 시기였다. 동학혁명(1984년)·청일전쟁(1984년)·을미사변(1985년) 등 실로 커다란 사건들이 연속되었다. 당시 국가적 위기의 상황에서 보여준 고위 지도층의 행태는, 관료적 병폐의 고질이었던 가렴주구나 일삼고, 친청파·친일파·친러파 등등으로 갈리어 국가와 민족은 안중에도 없었다. 나철의 벼슬에 대한 염증과 우국적 울분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나철 우국운동의 첫 행보는 민간외교적 교섭을 통한 동양평화론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미 국권이 기울어진 뒤였기에 개인의 노력을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간외교적 노력에 실패한 나철은 을사늑약에 도장을 찍은 매국대신들을 처단하기 위해 오기호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적극적 주살(誅殺) 계획을 모의했다. 그리고 모금을 통하여 권총을 구입하고 계획을 실행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거사는 당시 고민하는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감명과 더불어 나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교(鄭喬, 1856-1926)가 평한 다음의 기록이 한 예다.

“(나철은) 세계의 대세를 두루 살펴보면서 나라에 대해 근심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이에 일본 도쿄에 가서, 정부와 각 성(省)에 편지를 보냈다. 또 일본 천황에게도 편지를 올렸다. 논한 바가 근엄하고 명쾌하여, 각 신문에서 베껴 보도했다. 세계에서 비로소 우리 한국에 인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 조정의 신하들도 모두 감탄하면서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 의로운 선비 150명을 모아 박제순 등을 죽이려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 사람들도 통쾌해 하며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정교(조광 편/변주승 역주), 『대한계년사』1, 소명출판, 2004, 104쪽.

나철은 이 사건으로 인해 내란죄의 죄목을 쓰고 유형(流刑) 10년의 선고를 받지만 고종의 배려로 유형살이 몇 개월 만에 사면되었다. 고종의 특별사면으로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나철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절망적으로 치닫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1908년 11월(음력) 네 번째 도일(渡日)을 시도하여 국운을 돌리려는 노력을 하지마는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나철은 이 네 번째 도일에서 대종교 중흥과 관련된 운명적인 만남을 경험했다. 일본 동경에서 신교(神敎, 전래의 단군신앙) 수행의 우두머리였던 백봉신사(白峯神師)의 제자인 두일백(杜一白) 노인을 만났던 것이다. 두일백은 나철에게 단군신앙 관련 서책들을 전해주며, 미래의 사명이 이 정신의 중흥에 있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한다. 나철은 민족의 절망적 현실 앞에서 새로운 선택을 모색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나철은 1908년 12월 9일(음력) 밤, 다시 찾아온 두일백 노인으로부터 단군교 의식을 통해 기꺼이 영계(靈戒)를 받고 귀국 길에 올랐다. 나철이 1905년 12월 30일(음력) 단군교에 입교한 지 꼭 3년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마음에 새긴 것이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이다. 나철은 국망(國亡, 일제의 강점)이라는 절망감 속에서 도존(道存, 단군사상)으로써 미래의 희망을 찾고, 그 구체적 방법으로 단군신앙의 중광(重光, 다시 일으킴)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철 개인으로 본다면 과거의 족쇄였던 유교적 자아의 껍질을 벗고 민족적 자아로 변모하는 것이며, 민족적인 면에서는 단절되었던 민족정체성의 거대한 줄기를 재건하는 역사(役事)이기도 했다. 이 ‘국망도존’이라는 가치는 대종교의 중광과 더불어 한국정신사의 판을 뒤집은 일대 외침이었다. 이 구호는 나철이 대종교 중광 이전부터 품었던 가치로, 1916년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이 나철의 순교를 추모하기 위해 쓴 치제문(致祭文)에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전략)… 君嘗語余 그대(나철-필자 주)가 일찍이 나(김윤식-필자 주)에게 말하길 昨非今悟 어제가 잘못이었음을 오늘에야 깨달았다고 國亡道存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은 남았으니 天所畀付 하늘이 위임한 바라 하였네 …(후략)… 『雲養集』제13권, 「祭文」, 〈祭大倧敎都司敎弘巖羅君喆文〉.


대종교를 일으키기 전 나철이, 정치적 스승인 김윤식에게 ‘국망도존’을 내세워 유교적 지식인으로 살아온 과거의 삶을 후회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대종교를 일으키는 일이 하늘이 준 사명이라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나철의 신념은 1909년 대종교를 중광한 이후, 수많은 동지들을 규합하는 명분으로도 외쳐졌다. 그 대표적 사례가 단애 윤세복의 경험에서 드러나고 있다. 윤세복이 대종교 3세 교주가 된 이후인 1925년, 만주 지역에서도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내려져 7년 동안이나 지하활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만주괴뢰정권의 합법적인 양해 속에 대종교 포교 재개의 의지를 다지면서 다음과 같은 각오를 되새겼다.

"우리 대교(大敎, 대종교-인용자 주)가 중광한 지 25년 동안 너희 일본의 무리한 박해를 늘 받아왔으나, 지금 시국의 정세는 더욱 변천되고 갈 데 올 데가 없는 오늘날, 나는 한배검의 묵시를 받고 스스로 순교의 길을 떠나는데, 만일 너희 당국의 양해를 얻으면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이라 하신 신형(神兄, 홍암 나철을 가리킴-인용자 주)의 유지(遺志)를 봉승할 것이오. 또 여의치 아니하면 나의 일신을 희생하여 선종사(先宗師, 2세 교주 김교헌을 가리킴-필자 주)의 부탁하신 대은(大恩)을 갚겠노라" 종경종사편수회편, 『대종교중광육십년사』, 대종교총본사, 1971, 444쪽.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아서도 대종교를 일으킨 스승 나철의 유지를 잇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다는 말이다. 또한 윤세복의 삶의 정신적 지표가 무엇인가도 분명해 진다. 나철이 내세운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라는 대종교 중광의 명분을 다시금 새기고 있다. 윤세복은 1910년 서울 간동(諫洞)에서 나철을 처음 만나 음 12월 23일‧25일‧27일 사흘 밤을 독대했다. 그리고 역사와 대종교와 시국에 대한 깨우침을 얻고 대종교에 입교했다. 윤세복(정열모 편), 「譯解會三經序言」,『譯解倧經四部合編』, 대종교총본사, 1949, 105쪽. 그가 나철로부터 ‘국망도존’이라는 각성의 구호를 접한 시기도 이 시기였을 것으로 추찰된다. 김교헌이 대종교에 입교한 시기도 1910년 음력 정월 15일 중광절이었다. 앞의 김윤식이나 윤세복의 경험에서 보더라도, 김교헌 역시 나철의 ‘국망도존’에 깊은 공감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서일이 나철을 만난 때에도 마찬가지였을 듯하다. 마침내 나철은 1909년 1월 15일, 오기호·최전·유근·정훈모·이기·김인식·김윤식 등,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과 더불어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선포하고 단군신앙을 다시 일으킨다. 그리고 나철을 비롯한 그 중심인물들은 과거의 몰민족적 자아를 탈각하는 종교적 통과의례의 하나로, 과거의 이름을 외자로 모두 개명(羅寅永은 羅喆, 崔東植은 崔顓, 姜錫華는 姜虞, 金敎獻은 金獻, 申圭植은 申檉, 趙琬九는 趙亮, 曺成煥은 曺煜으로 바꿈)했다. 대종교의 중광(重光, 다시 부활함)은 절망적 현실 속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북돋워 준 사건으로, 우리 민족사의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다. 역사 속에 침잠되어 오던 단군신앙의 부활을 통해, 당시 주권을 잃어버린 암울한 민족사회 전반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또한 민족정체성의 와해 속에서 방황하던 수많은 우국지사들과 동포들에게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하게 된다. 특히 국망(國亡)이라는 수모를 당하게 된 역사적 원인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함께 도존(道存)이라는 정신적 일체감을 통한 치유방안을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정체성 재건의 당위적 방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나철이 창교(創敎)가 아닌 중광(重光)을 선택함도 눈길을 끈다. 나철은 대종교가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연면히 흘러온 종교이며, 우리 민족의 종교적 사유를 가장 옹글게 간직한 것이 단군신앙으로 보았다. 대종교의 전래 경전이 단군시대로부터 유래되는 것이며 그것의 역사적 전개 또한 교명(敎名)만 달리 할 뿐, 동북아 전역에 이어 왔다는 것이다. 즉 부여에서는 대천교(代天敎) 고구려에서는 경천교(敬天敎) 발해에서는 대도진종(大道眞倧), 그리고 신라는 숭천교(崇天敎)로 고려는 왕검교(王儉敎)로 만주에서는 주신교(主神敎)로 흘러 왔음을 밝혔다. 또한 삼신제석으로 떠받드는 성조신(聖祖神)과 태백신제(太白神帝)인 산상신(山上神), 그리고 만주족이 신봉하는 주신(主神)과 태고단신(太古檀神), 중국인들이 떠받드는 동황대제노백신(東皇大帝老白神) 등도 같은 하느님의 이음동의어로 보고 있다. 나철, 「중광가」, 『홍암신형조천기』, 대종교출판사, 2002, 63쪽.

또한 몽고 침입 이후 7백 년 간 단절되었던 위와 같은 종교적인 맥을 다시 세운 것이 중광이라는 것이다. 즉 단군신앙 고유제전인 팔관(八關)이 몽고의 침략으로 무너졌다는 것이다. 까닭에 나철은 순교 당시 유서를 통해서도 진실한 정성을 위해 팔관의 재계(齋戒)가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팔관은 고려조 이지백(李知白)의 상소 내용에서도 전래되어온 선랑(仙郞)의 유풍이었음이 확인되고, 고려 의종은 선풍(仙風)과 팔관회를 받들어 따를 것을 명한 바가 있으며, 그 행사 내용도, 백희가무(百戱歌舞)와 사선악부(四仙樂部), 다섯 길이 넘는 채붕(綵棚) 설치와 모든 신하들이 포홀행례(袍笏行禮)를 하는 등의 불교적 행사와는 완전히 다른 전래 행사였다. 김동환, 「國學과 홍암 나철에 대한 연구」, 『국학연구』제9집, 국학연구소, 2004, 229-230쪽.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자 단군신앙의 원형인 전래 신교(神敎)의 계승의식을 분명히 천명한 것이다. 동학의 최제우나 증산교의 강일순처럼 창교주로 화려하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군교에 입교한 일개 교인으로써 단군신앙의 연결자로 스스로를 낮추었다. 이것은 몽고 침입 이후 단절되었던 배달민족 고유신앙에 대한 부활로써, 나철이 민족사적 명분 앞에 개인의 욕심을 기꺼이 양보한 모습을 살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은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들로부터 공감을 얻는 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종교라는 중광의 사건이 종교적 차원을 넘어 민족사의 전반에 우국적 반향을 일으킨 요인이 되었다. 김동환, 「己酉重光의 민족사적 의미」, 『국학연구』제1집, 국학연구소, 1988, 참조.

대종교 무장항일투쟁의 기반 역시 이러한 중광 정신과 맞닿는다. 그 중심을 이룬 인물이 백포(白圃) 서일(徐一)이다. 그는 만주로 건너온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1911년 3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였다. 만주 왕청현(汪淸縣)에서 조직된 중광단은 만주 무장투쟁의 효시로 꼽히는 항일단체였다. 당시 서일은 31세의 나이로 단장에 추대되었다. 그 중심인물들은 서일을 비롯한 현천묵·백순·박찬익·계화·김병덕·채오·양현·서상용 등, 모두 대종교인이었다. 중광단의 거점이었던 왕청현은 1910년 국내 대종교에서 시교사(施敎師) 박찬익(朴贊翊)을 파견하여 포교의 거점을 잡은 곳이다. 이 시기에 이미 만주로 이주해 살던 한인(韓人)들의 수가 20만 명이 넘었고, 이 중 많은 인구가 이미 대종교를 직·간접적으로 신봉하고 있었다. 단체의 명칭을 중광단이라 칭한 것도 남다르다. 우리 고유의 정체성에 대한 부활을 의미하는 대종교의 중광에서 따온 명칭이다. 중광단이 독립운동단체 이전에 우리의 정체성으로 뭉쳐진 종교적 결사임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후일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이나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일명 北路軍政署) 그리고 신민부(新民府)로 이어 가면서도 그 정신은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대종교 중광의 최선봉에 섰던 인물이 서일이다. 그의 무장투쟁에 나타나는 군교일치(軍敎一致)의 정신이나, 중화(中華)의 그늘을 뚫고 일제의 질곡(桎梏)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든 정체성(正體性)의 외침 역시 중광의 정신을 떼어 놓고는 말하기 힘들다.

2) 군가와 신가의 하모니

서일은 나서지 않은 인물이다. 모든 이들이 그를 ‘보이지 않는 선생’으로 존경한 이유다. 대종교의 항일선언이자 중광단선언(重光團宣言)인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1919년에는 대종교 교주(敎主)였던 무원(茂園) 김교헌(金敎獻)이 교주의 자리를 양여하려 하였을 때도 겸허히 사양하였다. 서일이 「대한독립선언서」 서명자 명단에 빠져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의문이다. 서일뿐만 아니라 현천묵·백순·계화·정신(鄭信)·고평(高平)·진학신(秦學新) 등 중광단과 그 시기 대종교에서 동도본사의 주축들이 모두 빠져있다. 주목되는 것은 대종교단 내의 다음 기록을 보면, 서명에는 빠져 있는 서일·정신 등이 서명자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무오(서기 1918) 봄에 기미독립선언의 전주곡으로 서일·김동삼·김좌진·유동열·여준·정신 등 39인의 동서(同署)로 독립선언을 발포하였으며 삼일운동 후에는 군사적 적극 행동을 취하기 위하여 동북만에 산재하여 있는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정의단을 조직하고 강령발포와 단원모집 및 신문발간 등 독립사상 고취에 심혈을 경주(傾注)하여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종교중광육십년사』, 앞의 책, 301쪽.


이 당시 대종교 교주는 김교헌이었다. 김교헌은 「대한독립선언서」를 주도하고 맨 앞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서일은 김교헌이 1917년 9월 화룡현 청파호에서 제1회 교의회를 개최한 이후 왕청현 덕원리(德源里)에 있는 대종교동도본사로 거처를 옮기게 주선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서일은 자신의 거처로 김교헌을 영접하고 2년간이나 대종교 교무의 중심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대종교의 총회 모임도 동도본사(대한군정서의 총재부와 병설)가 있는 덕원리 시교당에서 개최하였으며, 대종교의 재도약을 위해 동분서주한 중심지도 그곳이었다. 교주 김교헌은 서일과 대종교 항일투쟁 방략 논의는 물론 교주의 자리까지 양여하려 하였다. 물론 서일은 항일투쟁에 집중할 때이므로 5년을 유예해 달라는 간청과 함께 정중히 사양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의 모든 과정 역시 김교헌과 깊이 의논되었을 듯하다. 서일을 비롯하여 앞에 열거한 인물들의 대종교적 위상을 감안해 보면 당연히 서명자로 이름을 올려야 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 서명에서 빠져 있다. 아마도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중광단 단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의 효율적 수행을 위한 전술전략의 하나였다. 빠진 것이 아니라 교주 김교헌과의 숙의 끝에 전략적 은둔을 택한 것이다. 서일이 도모한 동원당(東圓黨)이라는 비밀단체도 주목된다. 동원당의 실체는 서일의 그림자와 같았던 이홍래(李鴻來)의 가출옥문서에 등장한다. 또한 1925년 4월 6일 청진지방법원 판결서에도 그 명칭이 언급되고 있다. 이홍래는 중광단과 대한정의단, 그리고 북로군정서의 핵심으로 마지막까지 서일과 동고동락했던 인물이다. 동원당은 서일을 중심으로 한 대종교의 비밀결사다. 서일이 수명의 동지가 협의하여 1912년 음력 8월 화룡현 삼도구(三道溝) 청파호(靑波湖)에서 조직하였다. 독립운동을 완수하기 위한 체계적 활동을 결정하고 이를 지도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당시 청파호는 대종교 교주인 나철이 기거한 곳으로 대종교 포교와 항일투쟁의 거점이었다. 강우·이상설·신규식·류완무(柳完茂)·현천묵·백순·박찬익·김영학(金永學) 등등이 드나들며 대종교의 발전과 항일투쟁의 포석을 구상하던 공간이었다. 그 공간 확보에 물심양면으로 헌신한 인물이 안중근의 백부(伯父)인 안태진(安泰鎭)이었다는 점도 흥미를 끈다. 동원당이 언제까지 존속했고, 대종교의 또 다른 비밀결사인 귀일당(歸一黨)과 동체이명(同體異名)인지의 여부 또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동원당이 ‘대종교=항일투쟁기지’의 등식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조직이라는 점에는 의문이 없다. 이러한 움직임은 1919년까지도 지속되었다. 서일이 1919년에도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서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자유공단(自由公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것이 그 근거다. 그 단원이 무려 1만 5천명에 이르렀다. 서일은 나서는 성격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의 천성이자 덕성이다. 가장 극렬한 저항을 누구도 모르게 실천해 갔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숨겨진 수전병행(修戰竝行)의 삶의 길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진중(陣中)에서도 늘 수행(修行)과 연구(硏究)를 함께 하였다. 서일에게는 우리의 정체성(正體性)이 곧 항일의 무기였다. 그것을 증명해 보인 인물, 그가 바로 서일이다. 중광단은 1919년 5월 일부 공교도(孔敎徒)들과 연합하여 대한정의단으로 변모된다. 그러나 정체(政體)의 이견으로 순수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정비되었다. 당시 공교도들은 보황주의(保皇主義)를 내세웠다. 그러나 대종교인들은 대종교의 교의(敎義)인 홍익인간에 부합한 공화주의를 주장했다. 이것이 결별의 이유다. 이러한 전통은 후일 신민부(新民府)까지도 연결되었다. 신민부 역시 대한군정서를 계승한 단체로서, 그 주요 구성원의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신봉하였던 대종교 이념이 자연스레 신민부의 주요한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아나키스트로 신민부 요원이기도 했던 이강훈의 다음의 회고가 이를 방증한다.

“신민부의 기본철학은 대종교의 홍익인간과 중광정신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봉건적이었다거나 파쇼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강훈, 『민족해방운동과 나』, 제삼기획, 1994, 126쪽. ; 박환, 「신민부」, 『한민족독립운동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88, 참조.


또한 신민부가 추구한 정치형태 역시 배달국 공화주의 추구였다. 이것은 ‘대동단결선언’(1917년)부터 이어져온 대종교 계열의 전통이기도 했다. 같은 책, 119쪽.

대한정의단 역시 대종교 정신을 토대로 한 무장투쟁을 추구했다. 단장을 추대된 서일은 독립군정회(獨立軍政會)라는 무장조직을 따로 설치하고 본격적인 무장혈전을 준비하였다. 또한 『일민보(一民報)』와 『신국보(新國報)』라는 순수한글신문을 발행하여 재만동포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순수한글신문 발행 역시 대종교 정신과 무관치 않다. 언어와 역사와 철학을 통한 정체성 투쟁의 중심이 대종교였다. 한글과 민족주의역사학 그리고 삼일철학(三一哲學)의 정착이 그것이다. 일제강점기 홍암 나철의 정신을 이은 주시경·김두봉·이극로·최현배 등, 한글개척의 선각자들 역시 모두 대종교도였음을 상기해 보자. 서일의 한글 구사 능력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 백미가 전래해 오는 얼노래[神歌, 於阿歌]에 대한 아래와 같은 우리말 번역이다. 이 얼노래는 본디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1904년)에 실린 다음의 ‘원본신가(原本神歌)’와 ‘해명신가(解明神歌)’를 순 우리말로 새긴 것이다.

[原本神歌] 어아 어아(發語辭) 我等大祖神大恩德 倍達國我等皆 百百千千年勿忘 어아 어아 善心大弓成 惡心矢的成 我等百百千千人皆大弓弦同善心 直矢一心同 어아 어아 我等百百千千人皆大弓一 衆多矢的貫破 沸湯同善心中 一塊雪惡心 어아 어아 我等百百千千人皆大弓堅勁同心 倍達國光榮 百百千千年大恩德 我等大祖神 我等大祖神 「原本神歌」(古經閣發布, 『檀君敎佈明書』, 1904, 14쪽.) (解明神歌) 어아어아 大皇祖 놉흔 恩德 / 倍達國의 우리들이 百千萬年 잇지 마셰 / 어아어아 善心은 활이 되고 惡心은 관혁이라 / 우리 百千萬人 활줄갓치 바른 善心 곳은 살갓치 一心이예 / 어아어아 우리 百千萬人 한활쟝에 無數貫혁 穿破하니 熱湯 갓흔 善心中에 一點雪이 惡心이라 / 어아어아 우리 百千萬人 활갓치 굿센 마암 倍達國의 光彩로다 / 百千万年 놉흔 恩德 우리 大皇祖 우리 大皇祖(같은 책, 14-15쪽.)


[[[서일]]의 우리말 번역가사) 어아 어아 우리 한배검 가마 고이 배달 나라 우리들이 골잘 해로 잊지 마세 어아 어아 차맘은 활이 되고 거맘은 설데로다 우리 골잘 사람 활줄 같이 바른 마음 곧은 살 같이 한맘이에 어아 어아 우리 골잘 사람 한활터에 무리 설데 마버리아 한김 같은 차마음에 눈방울이 거맘이라 어아 어아 우리 골잘 사람 활 같이 굳센 마음 배달 나라 빛이로다 골잘 해로 가마 고이 우리 한배검 우리 한배검 강수원, 『대종교요감』, 대종교총본사, 1983, 260쪽.


또한 서일의 스승 나철이 1916년 순교하며 「순명삼조(殉命三條)」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종교를 위하여, 천하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이 유언의 골자다. 서일은 그 삼조의 유언을 새기며 스승의 주검 앞에 「가경가(嘉慶歌)」라는 추모가사를 아래와 같이 바쳤다.

한검교 참이치 밝히려고 목숨을 다하신 한스승이여 가냘프고 약한 어린 우리 가셔도 못잊음 아옵나니 아사달메에 두르던 그 노을빛 그 환으로 더러운 티끌을 녹이시며 늘 도우소서 늘 도우소서

한배검 큰 도를 넓히려고 목숨을 마치신 한스승이여 옳으신 그 뜻을 아오나 저희는 두려울 뿐이오니 저만치 밀지 마옵시고 늘 때때로 일깨우소서 저 환하고 거룩한 그 빛깔에 늘 쪼이소서 늘 쪼이소서

우리의 허물을 걷어지고 목숨을 바치신 한스승이여 저희는 귀먹고 눈 어두워 즐거움과 새로움도 모르오니 아사달메 하늘집에 둥근 송이 큰 얼굴로 피었던 고운 꽃 그 빛으로 늘 씻으소서 늘 씻으소서 성세영, 『본사행일기』(필사본, 1922)


무장투쟁의 대명사로만 인식되는 서일의 우리말 구사 능력이 범상치 않음을 알게 해 주는 가사다. 우리말의 탁월한 구사는 많은 대종교지도자들의 상식적 능력이기도 했다. 이 추도가사는 후일(1942년) 고루 이극로(李克魯)가 개사(改詞)·정리하여 대종교 노래 「가경가」로 정식 편입되었다. 한편 서일대한정의단에 대한 정비와 더불어 왕청현을 중심으로 대종교 정신을 통한 민중적 기반 또한 확고히 다져 갔다. 이러한 토대 위에 김좌진·조성환·박성태 등 대종교계 군사전략가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들 역시 대종교의 중심인물들로서 대한정의단의 약점이었던 체계적 무장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가들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태동하는 것이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일명 북로군정서)다. 대한군정서는 중앙조직 체계를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누었다. 총재부는 주로 대한정의단의 중심인물들이었으며 사령부는 주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물론 그 연결의 끈은 대종교였다. 정신의 상징인 총재부와 행동의 상징인 사령부의 체제는 서일이 지향하던 군교일치(軍敎一致)·수전병행의 효율적 수행(遂行)을 위한 조직체계였다. 김동환, 「백포 서일의 삶과 사상」, 『ᄋᆞᆯ소리』6, 국학연구소, 2008, 102쪽. 또한 대한군정서 관할 구역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종교 신자들이었던 까닭에 모연대(募捐隊)를 통한 군자금의 징수와 모금이 훨씬 수월했다. 일제강점기 대종교의 교당은 곧 학교이자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내는 종교적 성금은 곧 후학을 기르는 학자금인 동시에 항일투쟁을 위한 군자금이었다. 군교일치의 실천을 그대로 확인시키는 부분이다. 대한군정서의 경신국(警信局) 조직을 보면 이러한 군교일치의 지향이 더욱 확연해진다. 경신국이란 경사(警査)와 통신(通信)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경사 업무는 민정시찰, 각 단체의 행동과 적정(賊情) 정찰, 군사기밀조사, 내부 불순분자 색출, 임원 경호 등이었다. 또한 통신 업무는 신보(新報) 전파, 보도 및 통신 전달, 서령(署令) 및 선유문(宣諭文) 배포, 하물(荷物) 운반 등을 관할하였다. 대한군정서의 경신국 조직이 39분국까지 펼쳐졌다는 점도 흥미롭다. 나아가 각 분국을 보면, 소분국은 1과에서 대분국은 20과까지를 두어 총 218과를 운영하고 있었다. 「朝鮮側 警察이 朝鮮人 金順 등을 拘引시킨 것에 관한 건」(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28, 受20669호-公제259호, 한국사DB, 국사편찬위원회) 더욱이 그 분국장이나 과장들이 모두 대종교인들이었다. 대한군정서 경신국 조직이 대종교의 시교당·포교소 조직과 동일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대한군정서의 경신분국이 제39분국(네모 안)까지 조직되었음을 보여주는 일제의 문서.

당시 관할 지역 교포의 7할 이상이 대종교도였으며, 대종교의 확장 곧 독립운동의 확장이었다는 주장과도 합치된다. 또한 독립군들 대부분이 대종교의 신앙에 뭉쳐서 파벌이나 사리잡념이 없었고 광명정대했다는 증언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10월 상달이 되면 돌로 제단을 쌓아, 어려운 재정에도 불구하고 돼지와 소를 잡아 제천보본하고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빌었다고도 한다. 양대석, 「철기 이범석 장군과의 대담」, 『한얼』10월호, 한얼청년회, 1971, 49-55쪽 참조. 이 역시 대종교 군사제천(軍事祭天)의 전통과 그대로 부합하는 주장이다. 대종교단에 전해 내려오는 아래의 신가(神歌, 어아가·얼노래) 내력을 알면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신가(얼노래)는 어느 시대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사기(古事記)에 ‘동명성왕 시절 제천 때가 아니더라도 항상 이 노래를 불렀으며, 광개토대왕 시절 전쟁에 임할 때에 군사들에게 반드시 이 노래를 부르게 하여 사기를 북돋웠다’고 한다.” 『檀君敎佈明書』, 앞의 책, 14쪽. 右神歌如自何代未詳 而古事記中 東明王雖非祭時常歌此曲 又廣開土王每於臨陣時 使士卒歌之以助軍氣云


청산리독립전쟁 당시 대한군정서의 연성대장으로 참전한 이범석은, 청산리전쟁의 승리 또한 대종교라는 신앙의 힘과 민족정신에 불타는 신념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양대석, 「철기 이범석 장군과의 대담」, 앞의 책, 52-53쪽. 서일의 군교일치·수전병행의 행동가치가 승리의 원인임을 알게 해 준다. 서일 총재를 비롯한 말단사병, 심지어는 경신조직에 참여한 민간인들까지도 대종교 정신으로 무장된 이념집단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한 일제는, 그들이 당한 수모를 대종교도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로 앙갚음했다. 당시 희생당한 대종교도들만도 수만 명이 넘었다는 것이 대종교 내부의 증언이다. 해방 이후 서일을 추모한 다음의 헌사(獻詞)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 손에 단신(檀神)의 성서(聖書)를 높이 들고/또 한 손에는 항마(降魔)의 보검이 날카로우매/김좌진 장군들과 독립군을 일으켜/북로군정서의 총재로 싸운 광복의 의용/저 천하무적을 자만하던 왜군을/청산리전역에서 도탕한 원동력이여/군가(軍歌)와 신가(神歌)가 하모니를 이루는 군교일치(軍敎一致)로 무장한 사랑이어늘” 朴永朗外 編輯, 「白圃徐一先生篇(獻詞)」, 『獨立血史(Ⅰ·Ⅱ卷合本)』, 大韓文化情報社, 1956, 220쪽.

서일은 청산리독립전쟁 이후 동포들의 희생을 최소화시킨다는 계획 하에 북만주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였다. 그 때가 1920년 12월 말 경이다. 서일은 이곳에서 대한군정서를 중심으로 10여 개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총재로 추대되었다. 군단 휘하에 상급부대로 여단을 두고 그 아래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를 편성하였으며 총병력은 3,500여명에 달하였다. 당시 대한독립군단의 수뇌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排日鮮人 等의 行動急報의 건」(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12, 機密 제53호, 한국사DB, 국사편찬위원회)


총 재 서일(徐一) 부총재 홍범도(洪範圖) 고 문 백순(白純)·김호익(金虎翼) 외교부장 최진동(崔振東) 참모부장 김좌진(金佐鎭) 참 모 이장녕(李章寧)·나중소(羅仲昭) 군사고문 지청천(池靑天, 이청천) 제1여단장 김규식(金奎植) 참 모 박영희(朴寧熙) 제2여단장 안무(安武) 참 모 이단승(李檀承) 제2여단기병대장 강필립 중대장 김창환(金昌煥)·조동식(趙東植)·오광선(吳光鮮)

만주 항일운동지도자들이 총집합하였다. 그러나 대한독립군단은 재정의 궁핍과 군세(軍勢)의 분산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완전한 정착을 이루지 못하였다. 더욱이 서일의 반대에도 홍범도·이청천·오광선·안무 부대 등이 자유시로 넘어갔다. 이후 러시아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군들이 살상되는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된다. 서일은 밀산에서 둔전(屯田)을 통한 재기를 도모했다. 이 시기 이홍래(李鴻來)를 대동하고 수행과 연구에도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1921년 음력 8월 26일, 수백 명의 토비들이 야습하여 살인·방화 그리고 약탈을 자행했다. 함께 둔전(屯田)하며 훈련하던 전사들이 이들을 대적하다 장렬하게 산화했다. 청산리 치욕을 씻기 위한 일제의 광란, 독립군의 전선(戰線)을 무너뜨린 자유시 참변, 그를 따르고 의지했던 최후의 전사들, 역사의 무게가 한 순간에 그를 덮쳤다. 그들의 대부분이 대종교도이자 독립군이었다. 종단(宗團)의 최고 간부로, 독립군을 지휘하는 총수로, 자진순명(自盡殉命)의 비장한 각오를 새기게 된다. 서일의 마지막 상황을 『독립신문』은 이렇게 적고 있다.

“씨(氏, 서일-인용자 주)는 무장군인 십이 명을 거느리고 앞서 말한 한 촌가에 머무르면서 군무(軍務)에 관한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바, 돌연히 같은 해 구월 이십 팔일에 토비 한 무리가 이 촌락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며 재물을 약탈을 행하므로, 그의 부하 열두 의사(義士)가 그들을 대항하여 분전하다가 중과부적이 되어 마침내 몰사한지라. 산상(山上)에서 이 비참한 광경을 바라보던 씨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호천호지(呼天號地)하다가, 이 슬픔을 견디지 못해 자상(自戕)하야 비상한 최후를 마쳤는데, 그가 통제하던 군서(軍署)에서 이 놀라운 소식을 접하고 달려와 그의 유체를 수장한 후에, 곧 총재 대리를 보선하야 군무를 진행 중이다.” 『독립신문』1921년 12월 6일자. 「獨立軍總裁 徐一氏 自戕」


1921년 음력 8월 27일 서일은 살신성인의 길을 택한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자신의 죽음으로 대종교의 재도약과 흩어진 독립진영의 재기를 다지고자했다. 그는 죽음의 목전에서도 스승인 나철의 가르침을 되뇌었다. 나철 유서 중의 다음 한 구절을 읊조리면서 생을 마감했다.

“귀신이 휘파람을 불고 도깨비 뛰노니 하늘·땅의 정기빛이 어두우며, 뱀이 먹고 돼지가 뛰어 가니 사람·겨레의 피고기가 번지르하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오.” 『대종교중광육십년사』,앞의 책, 392쪽. 鬼嘯而魅跳 天地之精光晦明 蛇食而豕突 人族之血六淋漓 日暮途窮人間何處


때로는 죽음의 힘이 삶의 의미를 앞설 때가 있다. 물론 생사의 경계를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담보되어야 한다.

“마땅히 살아야 하지 않을 때 오래 살면 이것은 도리어 욕됨이다.” 『譯解倧經四部合編』, 앞의 책, 155-156쪽. 不當壽而壽 斯反辱矣


독립군 총재 서일의 저술 속에 담긴 구절이다. 그는 황천(黃泉)에 늘 발을 걸치고 살았다. 그에게 죽음이란 한걸음 내딛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죽을 때와 죽음의 의미를 진정으로 알았던 인물이 서일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의 수전병행의 본질과도 맞닿는다. 서일의 죽음은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슬픔이었다. 종교와 이념을 넘어선 아픔이었다. 나라를 걱정하는 모든 이들이 통곡했다. 기독교 목사로서 『독립혈사(獨立血史)』의 저자인 일재(一齎) 김병조(金秉祚)도 울었다. 김병조의 추모글(필자가 현대어로 번역·윤문함)을 여기 소개해 본다.

아, 슬프도다. 선생의 돌아가심이여! 누구를 위하여 오늘의 소동이 일어났으며 누구를 위하여 오늘의 죽음을 맞이하였는가.

선생의 죽음은 과연 이천만 동포의 자유와 존영을 위한 것이며 선생의 죽음은 또한 십삼 의사와 수백 양민이 무고히 피해 입음을 위함이시니 생을 마침도 나라를 위하심이요 비장한 죽음도 동포를 위하심이라.

곧 선생의 고결한 의기는 스스로의 목숨을 자신의 목숨으로 인정치 아니하고 오직 동포의 생명으로 자신의 목숨을 삼으심이며 동포의 생사도 자신의 생사와 같이함이시니 그의 삶도 동포와 더불어 사셨고 그의 죽음도 또한 동포를 위하여 돌아가셨도다.

선생이시여! 선생이 만일 나라를 되찾고 나라를 살피는 자리에 계셨더라면 나라의 희로애락를 같이하는 충성스런 신하의 자격이 선생이시며 필부의 얻지 못함으로 세상을 채찍질함과 같이 천하를 떠맡은 어진 선비 또한 선생이실지라.

만리초보(萬里初步)의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바로 눈앞에 두시고 죽음으로써 살신성인하시며 의를 취하심은 비록 선생의 양심에 부끄럼 없고 천손만대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실지나 아직도 살아있어 거적에 누워 창을 베고 백전고투 중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만리장성이 무너짐이며 큰 집의 대들보가 부러짐과 같도다. 하물며 청산리 전역에 승리의 노래를 부르시던 소리 우리의 귀에 잊혀질 수 없는 경종(警鐘)이 되질 않았던가.

밀산(密山)의 송백(松柏)이 만고에 푸르름은 우리 선생의 절의(節義)를 딛고 선 것이요 파저강수(婆猪江水)가 천추(千秋)에 오열함은 우리 선생의 풀지 못한 한을 울음으로 안고 흐르는 것이니 아! 송백(松柏)아 끝없이 푸르고 아! 강수(江水)야 한없이 울어라! 감지 못할 선생의 두 눈이 해와 달이 되어 보시느니라. 『독립신문』1921년 12월 6일자. 「故 徐一 先生을 吊함」


『독립신문』 1면 맨 앞에 실린 일재 김병조의 서일 선생 추모 글


3) 정체성의 불씨

고대엔 학문의 영역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서양에서는 신학(神學)이나 철학 속에 대부분의 학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학문 간의 소통이 쉽게 이루어지는 시대였다. 특히 인문학의 토대인 문(文)·사(史)·철(哲)은 하나의 학문 범주에서 인식되고 호흡했다. 그러나 후대로 넘어오면서 효율성과 전문성이라는 명분으로 학문이 세분화되었을 뿐이다. 흔히들 과거 우리의 정체성을 바라봄에 역사인식에만 주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언급했듯이 문·사·철은 별개가 아니다. 그 중에서도 철학은 정체성의 근간을 이룬다. 올바른 ‘얼(철학)’ 속에서 사관(史觀)이 바로 선다. 말과 글 역시 ‘얼’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얼’이 바로서야 우리의 역사와 언어가 올곧게 자리 잡음을 말하는 것이다. 근대 대종교는 우리 문·사·철 중심에 있었다. 대종교의 중광을 계기로 국어·국문·국사·국교(國敎)가 비로소 회복되었다. 노예적 사관에서 자주적 사관으로, 유·불 정신에서 배달교(倍達敎) 정신으로, 그리고 한문어를 국문어로 혁신하여 독립운동의 선봉에 우뚝 섰다는 주장이 이를 대변한다. 한편 철학이란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 원리와 그 본질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한국철학 은 한국인의 세계관에 대한 삶의 원리를 궁구하는 학문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우리는 철학하면 불교와 유교 그리고 도교 등을 떠올리는 종적인 사고에 익숙하다. 또한 근대 이후에는 서양철학만을 논리적 학문인 양 치부하는 횡적 사고도 적지 않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우리 역사의 오랜 기간을 중국적 사유(思惟) 속에 허우적거리며 살아왔다는 것, 둘째, 근대 학문적 방법론이 도입·정착한 시기가 식민지시기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 끝으로 해방 후 노도처럼 밀려드는 서구 사조를 여과하며 받아들일 장치가 무너졌던 탓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어느 경우든 우리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사유를 토대로 우리의 삶에 대한 가치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기회가 원천봉쇄 된 요인들이다. 그 동안 사유의 종속이 정상적인 지적 생활로 받아들여진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철학을 이들에 기대어만 바라보기는 무언가 찝찝하다. 가령 인도철학인 불교와 중국철학인 유교를 우리 삶의 현상을 만들어온 한국사상으로는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본질을 관통하는 한국철학이라 하기는 왠지 주저가 된다. 더욱이 근대 이후 우리의 삶을 재단한 서양철학으로 우리의 살아온 과정마저 싸안으려는 것은 시간적 모순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착각에 의해 모방이 주체로 자리 잡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모방적 주체가 무의식적으로 그림자를 형성하고, 그러한 지배가 오래 지속되어 주체적 자아를 대체하게 되는 현상이다.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어느덧 모방적 주체라는 그림자가 자아를 동화시켜 자아의 참모습인 듯 착각하게 된다. 우리의 철학 현실이 그 대표적 경우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귀착되는 이유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과연 우리에게도 철학이 있었는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더욱이 그 부류들이 우리의 지식층들이라는 점이 의아스럽다. 그 중에서도 철학을 전공하고 철학을 가르치는 학자들의 입에서도 적지 않게 나온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박종홍(朴鍾鴻, 1903-1976)의 넋두리를 들어보자.

“혹자는 한국사상이란 게 뭐가 도대체 있었느냐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만 그 분들에게 나는 묻고 싶다. 외국 것을 알기위하여 허비한 시간과 노력의 얼마를 우리 것을 찾기 위해 바쳐 본 일이 있느냐고. 알아본 일도, 아니 관심조차도 가져본 일이 없으면서 단안부터 내리는 용기와 의아심은, 자기의 일을 남의 일같이 대하는 너무나 딱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박종홍, 『한국사상사』, 서문당, 1972, 11쪽.


다시 ‘나를 바라보는 용기’가 요구된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오랜 시간 정체성의 와해로 인한 자신감의 상실이다. 아(我)와 비아(非我)를 구별할 기준점마저 문드러졌다. 역사적 수난으로 인한 자료적 한계 역시 걸림돌이다. 한국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관련 문헌들은 대부분 은닉·유실되었다. 남아있는 자료 역시 신빙성을 문제 삼아 홀대받기 일쑤다. 문득 보편성이 특수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 메를로 퐁티(Merleau Ponty)의 말을 상기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특수성을 포기함으로써 보편성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성을 타자와 만나는 방식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즉 서로 이해 가능한 상황으로 만드는, 알 수 없는 친화력에 의해 도달하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권혁민 옮김), 『의미와 무의미』, 서광사, 1985, 132-133쪽.


다시 서일을 주목하는 이유다. 그는 무장항일투쟁을 이끈 독립운동지도자이기 이전에 철학가였다. 특히 한국적 사유의 경험을 통해 이룩한 그의 철학적 위상은 우리 민족사에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미를 던졌다. 정체성이 상실된 우리 근현대사에서 스승 나철을 계승하여 삼일철학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체계화했기 때문이다. 삼일철학이란 인간 사고의 인식체계를 일(一)과 삼(三)의 원리에 의하여 파악코자 한 우리 고유의 수리적 사유방식을 말한다. 김동환, 『국학이란 무엇인가』, ᄒᆞᆫ뿌리, 148-161쪽 참조. 서일의 스승인 나철은 “교문을 세우니 이름하여 대종이요 현묘한 도의 근원은 삼일이라.” 『역해종경사부합편』, 앞의 책, 65쪽. 乃設敎門曰大倧 玄妙之原道三一 고 밝힘으로써, 최치원이 언급한 현묘지도(玄妙之道)의 근원이 삼일이라 단정했다. 즉 접화군생(接化群生)의 가치가 삼일철학이라는 인식이다. 나철은 선도(仙道)·풍류도 혹은 현묘지도라는 추상적인 가치로 전래해 오는 우리 민족 고유의 사유체계를 유·불·선을 통섭(統攝)하는 삼일철학(三一哲學) 혹은 종사상(倧思想)이라는 가치로 체계화시켰다. “대종(大倧)의 이치는 삼일(三一)일 뿐이니, 하나만 있고 셋이 없으면 이것은 쓰임이 없을지요, 셋만 있고 하나가 없으면 이것은 그 몸이 없을지라, 그러므로 하나는 셋의 몸이 되고 셋은 하나의 쓰임이 되느니라.” 같은 책, 65쪽. 에서는 삼과 일의 철학적인 관계가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또한 “주재유일(主宰惟一)이나 작용유삼(作用惟三)이로다. 진리미묘(眞理微妙)하시니 만유포함(萬有包涵)이라.” 『대종교중광육십년사』, 앞의 책, 191쪽. 는 천명에서 삼일철학이 온갖 것을 아우르는 이치임을 밝혔다. 삼일철학을 조화(調和)와 상생(相生)의 핵심으로 바라본 것이다. 삼일철학의 원리는 대종교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을 토대로 『삼일신고(三一神誥)』로 운용된다. 대종교의 전래 문적을 보면, 이 『삼일신고』의 흐름이 ‘단군조선⟶기자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흘러오고 있다. 「三一神誥奉藏記」(『역해종경사부합편』, 앞의 책, 42-43쪽.) 그리고 20세기 초 백두산 수련집단의 수장(首長)인 백봉신사(白峯神師)의 도맥에 의해 나철에게 전해졌다. 그러므로 서일은 이 삼일의 원리야말로 백봉신사께서 나철 스승에게 전하여준 것으로 밝히고, 자신과 같이 갖추지 못한 사람이 다행히도 나철 스승으로부터 친자(親炙)의 가르침을 받았음에 감격했다. 『대종교중광육십년사』, 앞의 책, 112쪽. 그리고 서일은 그 깨달음의 희열을 다음의 도각시(道覺詩)로 표현하였다.

來賓有事主人知(내빈유사주인지) 道室從容日影遲(도실종용일영지) 我本不迷惟一意(아본불미유일의) 爾初無間莫三思(이초무간막삼사) 理無後覺先天息(이무후각선천식) 名不虛存實地宜(명불허존실지의) 錯綜平生疑信半(착종평생의신반) 孜孜說道夕陽時(자자열도석양시)

세사로 찾아가니 그대 마음 안다 하네 고요한 수도실엔 햇빛도 넘흘러라 나는 본시 미혹함 없어 한 뜻을 품었다 하며 자네 비로소 거리 허물고 세 뜻을 정했다 짚으니 철리(哲理)의 깨달음을 타고난 듯 밝은 사람 명성도 헛됨 없이 소문과 하나 같다 평생을 헷갈리며 반신반의했건만 힘써 깨달으니 날은 이미 어스름

나철을 찾아가 온종일 많은 대화 끝에 삼일철학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내용이다. 이 시는 서일의 저술인 『삼문일답(三問一答)』이라는 글 속에 실려 있다. 『삼문일답』은 대종교의 삼일철학의 이치를 일의자(一意子)와 삼사생(三思生)의 대화를 통해 깨우쳐 가는 글이다. 안타깝게도 이 저술은 머리말과 한시(漢詩) 20여수만 남아 있고 본문은 없어졌다. 여기서 ‘일의(자)’는 스승 나철이며 ‘삼사(생)’은 서일 자신이다. 무지한 자신(삼사생)이 스승 나철(일의자)의 훈수로 깨달아간다는 내용이 숨어있다. 스승 나철의 당호(堂號)는 일지당(一之堂)이다. 깨달음 이후 서일은 자신의 당호를 삼혜당(三兮堂)으로 명명했다. 그가 삼혜당으로 당호를 명명한 이유가 분명해진다. 삼일철학의 뜻을 잇고 완성하겠다는 의지다. 어찌 보면 일지당과 삼혜당은 한국인 사유의 처음이자 끝이다. 누구나 돌아가야 할 우리 정체성의 집일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삶은 삼(三)으로 시작하여 삼으로 돌아간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돌아감의 섭리까지 삼으로 일관한다. 하느님의 쓰임[用]인 삼신(三神)의 점지로 삼가르고 태어나, 삼신줄(검줄·금줄)의 보호로 삼칠일을 넘기고, 삼(삶)을 삼(살)다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는(뒈지는·죽는) 것이 그것이다. 김동환, 『국학이란 무엇인가』, 앞의 책, 150쪽.

또한 삼일철학은 직관에 의한 총체적 진리 파악과 상대적 입장에서의 해명이라는 묘한 논리를 담고 있다. 그래서 절대적 통찰이라는 일(一)과는 거리가 있다. 대립적 인식이라는 이(二)와도 차이가 난다. 그 둘을 질서 있게 끌어안으며 창조(一)와 확산(三), 조화(三)와 통섭(一)으로 무한 반복하는 것이 삼일철학이다. 『삼일신고』「진리훈(眞理訓)」에 나오는, ‘하느님[三神]→삼진[三眞, 성(性)·명(命)·정(精)]↔삼망[三妄, 심(心)·기(氣)·신(身)]→삼법[三法, 지감(止感)·조식(調息)·금촉(禁觸)]→하느님[三神]’의 이치와도 부합하고 있다. 나철이 지은 『신리대전(神理大全)』 역시 신(神)의 이치를 삼일철학적 질서 속에 부연한 것이다. 이러한 삼일철학을 독보적으로 체계화시킨 인물이 서일이다. 그는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執一含三 會三歸一)는 것과, ‘셋에서 하나로 돌아감을 몸으로 삼고 하나에서 셋으로 나뉘어짐을 쓰임으로 삼는다’(三一其體 一三其用)는 철학적 질서를 완성했다. 서일은 이 원리 속에서 신관(神觀)과 내세관(來世觀), 인간관(人間觀)과 수행관(修行觀) 그리고 진리관(眞理觀) 등, 대종교의 종교학적 틀을 완성하였다. 서일은 삼일철학을 정리함에, 전래 경전인 『삼일신고』를 주경(主經)으로 삼았다. 그리고 스승 나철의 『신리대전』을 모전(母典)으로 받들며 그의 철학적 질서를 정리해갔다. 『삼일신고도해강의(三一神誥圖解講義)』·『구변도설(九變圖說)』·『진리도설(眞理圖說)』·『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삼문일답』 그리고 『회삼경(會三經)』 등이 그가 남긴 대표적 저술들이다.『구변도설』은 대종교의 상징인 원(圓)·방(方)·각(角)의 삼묘(三妙)를 정리한 글이다. 그것을 대종교 교리의 삼덕(三德)으로 통하는 성(性)·명(命)·정(精)의 이치와 연관시켜 그림을 통해 해설하였다. 또한 『진리도설』은 천·지·인 삼극(三極)의 원리와 관련된다. 생(生)·화(化)·성(成)의 변칙에 의하여 가달[妄]을 돌이켜 참[眞]으로 돌아가 성통공완(性通功完, 깨달음의 완성 경지)에 이르는 삼일(三一)의 이치를 밝힌 글이다. 『오대종지강연』은 전래되어 오는 대종교의 오대종지(五大宗旨)를 풀이한 글이다. 공경으로 하느님을 받들 것(敬奉天神), 정성으로 성품을 닦을 것(誠修靈性), 사랑으로 인류를 합할 것(愛合種族), 고요함으로 행복을 구할 것(靜求利福), 부지런함으로 살림에 힘쓸 것(勤務産業) 등의 다섯 계율을 종교철학적 측면에서 강해하였다. 또한 『삼문일답』은 언급한 바와 같이 삼사생(三思生-서일 자신)과 일의자(一意子-스승인 나철)의 문답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글은 상·하권으로 나뉜다. 상권에서는 머리말과 함께 대종교의 삼일철학을 토대로 ‘하늘에 대한 헤아림[天論]’, ‘하느님에 대한 헤아림[神論]’, ‘하늘집에 대한 헤아림[天宮論]’, ‘누리에 대한 헤아림[世界論]’에 대해 구명하고, 하권에서는 ‘참이치에 대한 헤아림[眞理論]’에 대한 네 편의 이치 설명과 더불어 맺음말을 담고 있다. 특히 『삼문일답』은 다른 종교의 교리와 대종교의 삼일철학을 비교강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안타깝게도 머리말만 남고 대종교의 임오교변(壬午敎變, 1942년 대종교지도자 일제 구속사건)당시 모두 분실하였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회삼경』으로, 서일 삼일철학의 백미다. 전래하는 대종교의 『삼일신고』를 삼일원리에 맞춰 과학적으로 증명한 글이다. 『회삼경』이라는 책이름 역시 발해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이 지은 『삼일신고예찬』에서 따왔다. 그 예찬(禮讚) 속에 나오는 “하나로부터 셋이 됨이여, 참과 가달이 나누이도다. 셋이 모여 하나가 되니[會三之一] 헤맴과 깨침의 길이 갈리네.” 「三一神誥禮讚」(『역해종경사부합편』, 앞의 책, 36쪽.) 自一而三 眞妄分圖 會三之一 迷悟判途 任化之間 殃慶自呼 錯綜至理 惟神之符 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회삼경』 내용의 핵심은 ‘돌아감의 미학’이다. 본자리[一神, 하느님]의 분신으로 태어나 올바른 수행과 정행(正行)을 통해 다시 본자리로 돌아가는 길을 제시하였다.


三一哲學 이해의 기본이 되는 徐一의 會三之一圖


또한 서일이 『회삼경』에서 유·불·선 삼교의 원리인 불교의 묘법(妙法), 유교의 역학(易學), 그리고 도교의 현리(玄理)를 종합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를 끈다. 최치원이 언급한 우리의 현묘지도가 삼교를 포함하고 있다는 이치를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회삼경』의 질서 역시 삼일의 원리를 충실하게 따랐다. 전체를 삼신(三神)·삼철(三哲)·삼망(三妄)·삼도(三途)·삼아(三我)·삼륜(三倫)·삼계(三界)·삼회(三會)·귀일(歸一)의 9장으로 나누어, 하느님으로부터 나와 다시 하느님으로 돌아가는 논리를 ‘3·3’의 체계로 펼치고 있다. 그리고 ‘참함으로 돌이켜 하느님이 된다[返眞一神]’고 하는 삼진귀일(三眞歸一) 과정을, 각 편마다 도해(圖解)를 통해 정리함으로써 이해를 편하게 하였다. 서일은 연구뿐만이 아니라 그 연구의 정리와 보급에도 관심이 컸다. 그가 대종교동도본사(大倧敎東道本司)를 이끌던 시절인 1918년 1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책합부(四冊合附)』를 발간했다. 말 그대로 『신사기(神事記)』·『신리대전』·『도해삼일신고강의』·『회삼경』 4종을 합친 책이다. 『신사기』는 전래되어 오는 문적이며 『신리대전』은 스승 나철의 저술이다. 그리고 『도해삼일신고강의』와 『회삼경』 서일 스스로의 연구물이다.


1918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종교동도본사 명의로 발간된 『四冊合附』의 표지(왼쪽)와 판권


특히 이 책의 출간에는 서일뿐만이 아니라, 당시 대종교동도본사의 주요 인물들이며 후일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의 핵심이 되는 계화(桂和)·정삼(鄭森)·고평(高平) 등의 인물들도 모두 참여했다. 계화는 『신사기』의 주해(註解)를, 정삼은 『회삼경』의 발문(跋文)을 썼으며, 고평은 『사책합부』의 편수(編修)를 담당하였다. 대종교 항일투사들이 단순한 행동가만이 아님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서일은 진중(陣中)이나 전장(戰場)에서도 헝겊보따리를 늘 메고 다녔다. 「情報 제728호 - 被檢擧不逞鮮人진술의 요지」(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24, 關參諜 제887호, 한국사DB,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철학에 대한 연구보따리다. 그는 죽음의 직전까지도 그 보따리를 놓지 않았다. 1924년 4월 6일 하얼빈에서 일제에 체포된 이홍래(李鴻來)와 관련된 다음 기록이 그것을 말해 준다.

“ (대한독립군단)은 흑용주 흑하에서 군사위원회를 개최하여 만주시베리아의 독립단체의 통일을 꾀하고 대거 남하할 목적으로 이곳에 이주하였을 때 이홍래는 일시 밀산으로 물러나 이곳에 머물렀다. 그 후 이 독립군단은 시베리아 각 단체와 함께 김석하(金夏錫)·오하묵(吳河默) 등의 군정위원회와 충돌하여 자유시에서 전투를 벌인 결과 대타격을 입고 서일·조성환 등은 밀산으로 돌아왔다. (이홍래)는 서일과 함께 대종교 경전(經典)의 교정(校正)에 노력하고 있다.” 「獨立軍團員 李鴻來 等 逮捕에 관한 件」(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8, 公 제195호-普通受 제211호, 한국사DB, 국사편찬위원회)


문득 한힌샘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이 떠오른다. 늘 서책들을 보자기에 싸들고 다녔던 인물이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주보따리'다. 주시경과 서일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대종교정신에 투철한 인물들이라는 점과 항상 보따리를 갖고 다녔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만 ‘주보따리’ 주시경은 그것을 들고 다니며 한글을 갈고 닦았고, ‘서보따리’ 서일은 그것을 메고 다니며 철학을 일궜다는 차이가 있다. 인간의 자존심은 자아로부터 움튼다. 자아는 그 개체의 정체성과 맞물려 있다. 그 정체성은 집단의 철학과도 조응하는 것으로, 그것이 없으면 자존심도 사그라진다. 과연 나와 우리의 자존심은 무엇인가. 그러나 현상에 묻혀 사는 우리들에게는 그저 어벌쩡 넘어갈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우리의 가치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서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우뚝 세우는데 작업에 독보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시대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다시 서일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3. 맺음말 - 왜 다시 서일인가

인간사의 중심에는 늘 종교가 있다. 일제강점기도 예외는 아니다. 일제는 영구적 지배의 완성으로 신도국교화(神道國敎化)를 추진했다. 이에 맞서 우리의 정체성을 자처하며 투쟁한 집단이 바로 대종교다. 두 집단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과 맞물려, 탄압과 저항의 대립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일제는 단군을 정점으로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자처한 대종교를 반드시 말살시켜야 할 궁극의 가치로 보았다. 그들이 대종교에 입교하는 자체를 항일투쟁으로 간주한 배경이 된다. 한마디로 정체성과 정체성의 충돌이었다. 이 정체성 충돌의 중심에 서일이 있었다. 그는 그 정체성의 본질을 대종교에서 찾았으며, 그 촉발의 계기가 대종교 중광이라 확신한 인물이다. 서일에게는 우리의 그 정체성이 곧 항일의 무기였다. 그가 진중에 대종교 동도본사를 병설하고, 전장(戰場)에서도 단주(檀珠, 대종교 수행의 상징)를 걸고 다니며 군교일치와 수전병행을 실천한 이유다. 더욱이 그에 의해 정리된 삼일철학은 한국근현대철학사에 신기원을 만들었다. 중화(中華)의 그늘에서 숨쉬어온 천 년의 암흑을 뒤엎은 것이다. 그러한 인물이 서일이다. 그는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개인의 영달과 명예를 백안시하고 종교적 신념과 조국을 위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기꺼이 바쳤다. 올 해는 그가 순국한 지 꼭 100주기가 되는 해다. 한 편에서는 해외에 머물던 독립군지도자의 유해 봉환과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 승급으로 더욱 떠들썩했던 한 해였다. 물론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한 선택이었다. 백 번 공감한다고 해도 절차와 원칙에서 어긋난 행태에 씁쓸함을 숨길 수 없다. 더욱이 그러한 인물들에게 응집의 정신가치를 제공하고 솔선수범했던 독립군 총재 서일에 대해선 일체 언급이 없다. 기득권에서 밀려난 집단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우리의 정체성은 늘 소외의 가치였다. 반민족적(反民族的) 보수와 몰민족적(沒民族的) 진보, 그 어느 곳에도 숨 쉬지를 못했다. 하기야 이 땅에 진정한 보수·진보가 어디 있는가. 그저 기득권에 의해 양진영이 갈릴 뿐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구호도, 몸뚱이를 망각한 우리에게는 허망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진정 정체성이 사라진 집단의 비애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갈등이나 분단 문제는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다. 동북아시대와 세계화시대도 우리 삶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이념 놀음에 우리 사회 전체가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집단의 비정체성(非正體性)은 불안정과 늘 정비례하기 때문이다. 현상(비정체성)이 복잡할수록 본질(정체성)을 놓아서는 안 된다. ‘왜 다시 서일인가’에 대한 답이 분명해진다. 나라를 찾기 위해 만주를 호령하던 독립군 총재의 의기도 그립지마는, 그가 정체성의 여정을 통해 우리에게 남기고자 한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서일(徐一) 총재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과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종교인.개설본관은 이천 서씨(利川). 함경북도 경원 출신.

본명은 서기학(徐夔學), 호는 백포(白圃).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鏡城咸一師範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하고 교육구국사업에 종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에서 항일투쟁의 어려움을 느끼고 만주로 건너갔다.1911년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청년동지들에 대한 민족정신과 한학을 가르쳐 정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교육에도 뜻을 두어 간도지방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1912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리의 연구와 포교활동에 주력하였으며, 1916년 총본사(總本司) 전강(典講)이 되어 활동한 결과, 나철(羅喆)의 교통(敎統) 계승자의 물망에 올라 사교(司敎)로 초승(超陞)되고 영선(靈選)에까지 올랐다.1917년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겨 만주와 노령(露領)의 동포에게까지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을 발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듬해 중광단을 토대로 군사적 행동을 위해 계화(桂和) 등과 대한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다.1919년 대종교 2세교주인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이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려고 하였으나 독립군 양성과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교통의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같은 해 8월 현천묵(玄天默)·김좌진·계화 등과 함께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軍政府)로 만들고, 12월에는 다시 한 민족에게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 하여, 이것을 토대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면서 총재에 취임하였다.또한 틈틈이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하며 수도에 힘써 교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저술에도 힘을 기울이며 포교활동도 하였다.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고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마련해준 군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정규병력 1,500명으로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였다.또한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세워 중견사관을 길러내고, 각지에 야간강습소와 소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찔렀고 병력을 북만(北滿)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시켰다. 이듬해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인해 밀산현으로 들어온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의 도독부군(都督府軍) 및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등 여러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1921년 6월 27일 자유시 수비대 29연대, 2군단 기병대대, 라키친 저격연대가 동원되어 사할린 부대에 대한 무장해제에 들어갔다.그러나 러시아 군인과 항일무장독립군 부대원 사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러시아 군인은 사할린 부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동원된 러시아 부대는 무장을 한 항일무장독립군에 대하여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청년장병 다수가 희생당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나게 되었다.이에 같은해 8월 27일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라는 글귀를 남기고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활동과 지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대종교에서는 그를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증명으로 종교의 교리를 체계화한 대철(大哲)로 성인(聖人)이라고 추앙하고 있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 그리고 계시를 받고 지었다는 『회삼경(會三經)』 등이 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계

부인 : 채씨

장녀 : 서모(徐模, 1902~?)

차녀 : 서죽청(徐竹淸, 1906~?)

사위 : 최관(1900~?)

아들 : 서윤제(1908~1969) 독립운동가

자부 : 권씨(1907~1931)

손자 : 서경섭(徐敬燮, 1925~2008)

손자 : 서만섭(徐萬燮, 1930)

가족

1세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의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 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

4세 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掌冶署令).정 3품.장관)

5세 서면(徐冕 주부(注簿).정 4품.차관보)

6세 서린(徐嶙 판대부사(判大府事).정 2품.부총리)

7세 서찬(徐瓚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

8세 서인(徐諲 교수(敎授).도승지(都承旨).정 3품.장관.대학자)

9세 서욱(徐勖 도승지(都承旨).정 3품. 장관)

10세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判司宰事).종 2품.부총리)

11세 서유(徐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 정2품. 장관.양경공파(良敬公派))

12세 서경흥(徐敬興. 목사(牧使). 정3품.당상관.차관)

13세 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

14세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

15세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

16세 서희안(徐希顔. 사용공(司勇公)

17세 서득천(徐得天. 의병장(義兵將).부사용(副司勇) · 창의순절(副司勇 · 倡義殉節)

18세 서사도(徐思道. 의병장(義兵將).율곡 이이(栗谷 李珥) 문인.임진란 순절(壬辰亂殉節 )

서사근(徐思近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判決事)·.의병장(義兵將))

서사원(徐思遠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서사적(徐思迪)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19세 서일원(徐一元 .용기위사정(龍驥衛司正).학자(學者)

서종언(徐從彦 이흥군(利興君).오위부총관(五衛副摠官). 종 2품.차관)

서일회(徐一會)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대종교(大倧敎)

1909년 나철(羅喆)이 조직한 종교.

대종교 삼종사 묘역(大倧敎)

삼종사 묘역은 들 가운데 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 청호종산의 작은 구릉. 옛 주소는 화룡현 청파호이다. 삼종사란 대종교(大倧敎)의 홍암(鴻巖) 나철(羅喆, 1863~1916) 대종사,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7~1923) 종사,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 종사를 말한다.

중광단(重光團)

1911년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서일(徐一) 등이 국외로 탈출하는 의병들을 규합해서 조직하였다. 단장은 서일이 맡았고, 본부는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에 있었다. 둥베이 지방 무장독립운동의 효시가 된 단체로,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군사활동보다는 청년 지사들의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애국운동 함양 등 정신교육에 치중하였다.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3·1운동 직후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 등이 중광단(重光團)의 토대 위에 적극적인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동북만주의 대종교도(大倧敎徒)를 규합하여 조직하였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지린성 옌지시 이란구(吉林省 延吉市 依蘭區) 북로군정서 사령부 터.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되었던 독립군 단체.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군정회(大韓軍政署, 약칭 군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약칭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대한군정서로 인준받았다.

청산리대첩

1920년 10월 21∼26일, 서일(徐一)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靑山里 抗日 大捷 紀念碑)

청산리(靑山里) 대첩 80주년을 기념하여 2001년에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청산리 산림장 입구에 건립된 비석.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서일(徐一)이 1920년 만주에서 조직한 독립군 연합부대.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서일총재항일투쟁기념비(徐一总裁抗日斗争纪念碑)

흑룡강성 계서시 118현도 영성촌(黑龙江省 鸡西市 一一八县道 永胜村)

서일(徐一)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순국지 부근에 세운 기념비

백포 서일(徐一) 선생의 시어록비(독립기념관 어록비공원)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동 삼방로 95 (남화리) 독립기념관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회삼경(會三經)

백포 서일(徐一) 종사 저서(白圃宗師著)

이 경의 내용은 삼일(三一)의 원리를 강해한 것으로 대종교 교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또 대종교는 유교·불교·도교의 세 교를 포함한 것인데, 이 경전은 실로 불교의 묘법(妙法)과 유교의 역학(易學)과 도교의 현리(玄理)에 관한 오묘한 뜻이 갖추어진 것이므로 혹시 [삼동계(參同契)]와 대조해볼지도 모르나 [삼동계]는 그 방술만을 탐구한 것이요, 이 경은 그 철리를 강술하여 인생철학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사단법인 서일총재기념사업회

위치는 인천 연수구 연수동 먼우금로 251번길 27, 201호

법인은 일제하 이국 만리에서 오로지 조국 독립과 민족 자주를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신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장군님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고, 순국선열유족과 더불어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조국과 민족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손자를 만나다

대를 건너 이어지는 북로군정서 창설의 역사

1911년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선택하고 고향을 떠난 서일 총재가 두만강을 건너 처음 만난 사람이 봉오동을 무장독립군 기지로 건설하고 있던 최운산 장군이다. 북간도 봉오동에서 처음 만난 최운산 장군과 서일 총재는 서로의 의기를 알아보았고 그 자리에서 무장투쟁을 결의하였다. 서일총재는 최운산 장군이 내어준 덕원리, 즉 서대파에 머물며 학교를 열었고, 서대파를 근거지로 대종교인들을 이끌었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함께 북로군정서를 창설하고 서대파를 무장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백포 서일 총재의 고손자 서영승씨 “독립지사 후손답게 고국 위해 봉사”

“선조의 항일·희생 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백포 서일 총재의 고손자로 이날 행사에 참석한 서영승씨(인천시 연수구)는 2대째 독립지사 가문의 후손이다. 서영승씨의 아버지인 서희우씨부터 서만섭, 서일 총재까지 이어지는 가계도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기 위해 평탄치 않은 가정사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 통해 재조명 '청산리 독립 전쟁의 서일 총재'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 ”로 시작하는 가곡 <선구자>의 첫 소절이다. 한때는 한국인이라면 이 가사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졌던 시기가 있었다. 가곡 <선구자>는 1절만 윤해영 작사이고, 2·3절은 후에 작곡자 조두남이 작사했다고 한다. 1절이 자주 불려서 2·3절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원래 제목은 ‘용정의 노래’ 였다. 1980년대까지는 널리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에 나오는 지명 때문에 만주, 특히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리하여 1980년대까지 매우 자주 불리던 노래였다. 가사나 곡 모두 훌륭한 가곡으로 평가되었으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던 가곡으로 매번 선정될 정도였다.

항일무장투쟁의 별 -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 정길영 (지은이)

서일은 교육자이며 애국계몽운동가요, 종교지도자이며 철학자요, 군사전략가이며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는 짧은 일생을 살면서 오로지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살신성인한 인물이었다.   

백포(白圃) 서일(徐一)과 대종교-그 정체성(正體性)의 여정(旅程)-김 동 환 (국학연구소)

백포 서일과 청산리대첩- 김 병 기 (광복회학술원)

1910~20년대 중국 동북지역 - 항일무장투쟁과 서일- 이 동 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백포 서일의 독립운동과 자유시참변- 장 우 순 (성균관대학교)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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