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원(원불교)
■ 법명 : 서대원(徐大圓) ■ 법훈 : 대봉도 ■ 속명 : 서대웅(徐大雄) ■ 생멸 : 1910~ ■ 관계 : 부친-서기채(徐奇采), 모친-박도선화(朴道善華), 연원-조갑종 ■ 비고 : 이천서씨 절효공파
원산 서대원(1910~1945)
깨달음에 대한 집념의 구도자
가라앉은 목소리에 법의(法衣) 두른 학(鶴)으로서 한 번 법에 미치매 몸도 정(情)도 모두 모르고, 청신한 자연 속에 순박한 인간으로 세속적인 집념에서 해방된 구도자 원산(圓山) 서대원(徐大圓) 대봉도(大奉道)는 1910년 3월 10일,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에서 부친 서동환 선생과 모친 영타원 박도선화 정사의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 집에서 한학을 배우며 백수공립보통학교에 이어 법성보통학교 5학년으로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원기 14년 의산 조갑종의 권유로 새 회상에 귀의하였다. 멀리 해외로 나가 크게 활동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외숙되는 소태산 대종사를 총부에서 뵙고 1개월 동안 동선을 마친 후 전무출신을 서원하였다. 원기 14년 1월, 농업부원으로 총부생활을 시작하여 서무부 서기로 근무하였고, 15년 동선에 입선(入禪)하여 전문훈련을 받은 후 상조부·공익부 서기와 출납원을 거쳐 연구부장, 순교무, 교감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교단 일에 오롯이 일관하였다. 원산 대봉도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에서도 도인스러운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 원기 25년 총부교감이 되어 강습을 나며 각지를 순회할 때는 맑은 음성으로 소태산 대종사의 법을 전하여 듣는 이 마다 감동을 받았다. 소태산 대종사도“대원아 천도법문을 읽어라, 너의 음성을 들으면 저절로 천도가 되는것 같구나.”할 정도였다. 주위에서 결혼을 권유하면“결혼이 문제가 아니라 먼저 생사의 이치를 깨치고 자신을 제도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라고 하며 결혼을 거부할 만큼 깨달음에 집념이 강하고, 순실(純實)한 정남(貞男)으로 계행(戒行)이 청정하 였으며 용모 또한 단정한 가운데 수양심을 증장시켰다. 원산 대봉도는 깨달음에 대한 강한 집념을 놓을 수 없어 계룡산 선방과 수덕사 등을 비롯하여 산사(山寺)로 수양의 행로를 펼치며 구석진 방 하나를 얻어 하루에 3시간 수면으로 불경과 염불 참선에 주력하였다. 그러자 주위에서는 생활 속의 불법공부를 버리고 입산하였다고 비난의 소리가 높았다. 자신의 참뜻을 모르는 대중에게, 변함없는 신성의 표시로 손을 자르는 결단을 실행 하였다. 제자 가운데 신(信)을 바치는 뜻으로 손을 끊은 사람이 있는지라, 대종사 크게 꾸짖어 말씀하시기를“몸은 곧 공부와 사업을 하는 데에 없지 못할 자본이어늘 그 중요한 자본을 상하여 신을 표한들 무슨 이익이 있으며, 또는 진정한 신성은 원래 마음에 달린 것이요, 몸에 있는 것이 아니니, 앞으로는 누구든지 절대로 이러한 일을 하지 말라.”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아무리 지식과 문장이 출중하고 또는 한 때의 특행(特行)으로 여러 사람의 신망이 높아진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이 회상의 종통을 잇지 못하는 것이요, 오직 이 공부 이 사업에 죽어도 변하지 않을 신성으로 혈심(血心) 노력한 사람이라야 되나니라.”며 크게 꾸중하였다. 한문과 고경에 조예가 깊었던 원산 대봉도는 교단 초기에 고경학습과 주해에 큰 몫을 담당하였고,《 불교정전》편찬시에는‘무시선법’과‘참회문’을 수필했으며,‘ 일원상의 유래와 법문’등 문답을 통해 받든 소태산 대종사의 법설을 많이 수필하여 오늘날《정전》과《대종경》의 기초가 되게 하였다. 고향에서 보내온 돈으로 구입한 일어와 한문으로 된 불교 경전들은 총부 도서실에서 후진들의 공부길이 되었고, 후일 원광대학교 도서관 도서의 한 모체가 되었다. 그러나 손을 잘라 심한 출혈을 한 뒤 결핵까지 앓게 되어 응산 이완철을 따라 서울교당에서 요양하던 중 원기 28년 6월 1일, 소태산 대종사의 열반을 맞이하였다. 서울에서 부음을 받고 내려와 소태산 대종사의 영구 앞에 엎드리어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안았다. 1. 스승님을 뵈옵던 그날부터 쓸쓸한 내 가슴 한 모퉁이에 희망의 꽃망울 맺히었더니 서러운 영이별이 웬일일까 내 등불 밝게 켰다가 후일에 이 몸 마칠 때에 또 다시 뒤를 따르리
2. 스승님을 뵈오면 뵈올 때마다 마음의 그 꽃이 피어올라서 언제나 행복을 꿈꾸었더니 허망타 영이별이 웬일일까 내 등불 밝게 켰다가 후일에 이 몸 마칠 때에 또 다시 뒤를 따르리
3. 고요히 피어오른 그 꽃송이 몇 개의 어여쁜 열매가 맺어 스승님이 보시면 즐기시더니 망연타 오실 때는 어느 때실까 내 등불 밝게 켰다가 후일에 이 몸 마칠때에또다시뒤를따르리 《( 성가》53장)
소태산 대종사 열반 후 스승님이 그리워지는 마음을 노래에 담아 남긴 원산 대봉도는 원기 30년 5월 2일, 서른다섯 젊은 나이로 열반하였다. 원산 대봉도는 시문 속에서도 신앙과 수행의 깊은 경지를 읽을 수 있다. ‘물을 긷고 나무를 운반할지라도 불(佛)의 진리를 알고 하면 활불이요, 밭을 갈고 똥을 칠지라도 불의 지행을 알고 하면 활불(活佛)이다.’‘연잎에 비 내리니 이슬만 궁글더라 그다지 내린 비가 흔적이 어디런고 이맘도 저러하면 연화대인가 하노라.’
원산 서대원 대봉도 관련 법문 서대원(徐大圓)이 여쭙기를 과거 부처님 말씀에“이 세계가 괴겁(壞劫)에는 소천소지(燒天燒地)로 없어진다 하오니 사실로 그러하오니까.”대종사 말씀하시기를“그러하나니라.”또 여쭙기를“소천소지가 되오면 현재 나타나 있는 천지는 다 없어지고 다시 새 천지가 조판되나이까.”대종사 말씀하시기를“소천소지가 된다 하여 일시에 천지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니, 비하건대 인간의 생·로·병·사와 같아서 인생이 한편에서는 낳고 한편에서는 늙고 한편에서는 병들고 한편에서는 죽는 것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 같이, 천지에도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이치가 천만가지 분야로 운행되어 지금 이 시간에도 이루어지는 부분이 있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부분도 있으며, 무너지는 부분도 있고 없어지는 부분도 있어서 늘 소천소지가 되고 있나니라.” 《대종경》변의품 4) 또 여쭙기를“과거 부처님 말씀에 삼천대천세계가 있다 하오니 사실로 있나이까.”대종사 말씀하시기를“있나니라. 그러나, 삼천대천세계가 이 세계 밖에 따로 건립된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안에 분립된 가지가지의 세계를 이른 것이니, 그 수효를 헤아려 보면 삼천대천세계로도 오히려 부족 하나니라.”다시 여쭙기를“현 천문학계에서도 이 우주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밖에 더 큰 세계가 많이 있다 하옵는데 어떠하나이까.”대종사 말씀하시기를“부처님 말씀은 해석하는 사람의 견지에 따라 다른 것이며 현재의 학설도 비록 분분하나 멀지 않은 장래에 견성한 큰 학자가 나의 말을 인증할 것이니 나를 믿는 사람이라면 다시의심하지 말라.” 《대종경》변의품 5) 또 여쭙기를“천지에 진강급(進降級)이 있다 하오니 조선이 지금 어느 기(期)에 있나이까.”대종사 말씀하시기를“진급기에 있나니라.”다시 여쭙기를“진강급의 기한은 얼마나 되나이까.”대종사 말씀하시기를“과거 부처님 말씀에 일대겁(一大劫)으로 천지의 한 진강급기를 잡으셨나니라.” 《( 대종경》변의품 6) 또 여쭙기를“이 천지가 성·주·괴·공이 될 때에는 무엇으로 되나이까.”대종사 말씀하시기를“과거 부처님 말씀과 같이 수·화·풍(水火風) 삼륜(三輪)으로 되어지나니라.” 《( 대종경》변의품 7) 또 여쭙기를“선성의 말씀에 일월과 성신은 천지만물의 정령이라 한 바가 있사오니 사실로 그러하나이까.”대종사 말씀하시기를“그러하나니라.”《( 대종경》변의품 8) 서대원이 여쭙기를“천도를 받는 영으로서 천도법문을 그대로 알아들을 수 있나니이까.”대종사 말씀하시기를“혹 듣는 영도 있고 못 듣는 영도 있으나 영가(靈駕)가 그 말을 그대로 알아들어서 깨침을 얻는 것보다 그 들이는 공력이 저 영혼에 쏟히어서 알지 못하는 가운데 천도의 인(因)이 되나니라. 그리하여 마치 파리가 제 힘으로는 천리를 갈 수 없으나 천리마의 몸에 붙으면 부지중에 천리를 갈 수도 있듯이 그 인연으로 차차 법연을 찾아오게 되나니라.”《( 대종경》천도품 31) 서대원이 여쭙기를“미륵불 시대가 완전히 돌아와서 용화회상이 전반적으로 건설된 시대의 형상은 어떠하오리까.”대종사 말씀하시기를“그 시대에는 인지가 훨씬 밝아져서 모든 것에 상극이 없어지고 허실(虛實)과 진위(眞僞)를 분간하여 저 불상에게 수복(壽福)을 빌고 원하던 일은 차차 없어지고, 천지만물 허공법계를 망라하여 경우와 처지를 따라 모든 공을 심어, 부귀도 빌고 수명도 빌며, 서로서로 생불(生佛)이 되어 서로 제도하며, 서로서로 부처의 권능 가진 줄을 알고 집집마다 부처가 살게 되며, 회상을 따로 어느 곳이라고 지정할 것이없이 이리 가나 저리 가나 가는 곳마다 회상 아님이 없을 것이라, 그 광대함을 어찌 말과 글로 다 하리요. 이 회상이 건설된 세상에는 불법이 천하에 편만하여 승속(僧俗)의 차별이 없어지고 법률과 도덕이 서로 구애되지 아니하며 공부와 생활이 서로 구애되지 아니하고 만생이 고루 그 덕화를 입게 되리라.”《( 대종경》전망품 18) ▲《대종경》교단품15, 전망품 18.《 성가》2, 6, 12, 32, 33, 36, 44, 53, 110
원산 서대원 대봉도 관련 일화 신심 바친다고 손을 자른 서대원 - 원산 서대원은 원기 14년 봄에 의산 조갑종의 인도로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하고 바로 이어 전무출신을 서원하였다. 서대원은 출가 후 깨달음에 대한 강한 집념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어느 행 동선에 서대원도 입선하였다. 총부 공회당에서 선을 나던 어느 날 저녁, 소태산 대종사가 달마 대사에게 손을 잘라 바친 혜가 대사의 이야기를 법문으로 하시면서 공부와 사업을 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자본인 몸을 상하게 하여 신을 표한들 무슨 이익이 있는가. 진정한 신성은 마음에 달린 것이며 몸에 있는 것이 아니니 그대들은 몸을 상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시었다. 서대원은 달마 대사 앞에서 팔을 잘라 바친 혜가 대사처럼 자기도 소태산 대종사에 대한 절대의 신성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튿날 새벽 4시, 소태산 대종사가 거처하는 조실인 금강원 마루에서 자기의 왼 손가락 전부를 잘라버렸다. 서대원은 인력거를 타고 시내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는데 치료가 용이치 않아 손목을 자르고 치료를 한 후 총부로 돌아왔다. 이 소식을 소태산 대종사가 듣고 서대원을 사무실인 영춘원(현 구조실)으로 불러 크게 꾸중하시며 말씀하였다.“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구나. 왜 손목을 잘랐느냐? 일이 하기 싫어서 그랬느냐 아니면 편해지고 싶어서냐?”“그런 것이 아닙니다. 실은 달마 대사에게 팔을 잘라 바친 혜가 대사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그만…….”“뭐라구! 혜가 대사의 흉내를 내었다고?”“흉내를 낸 것이라기보다 한 쪽 팔을 끊을 수 있을 만큼 독실한 신심이 있어야만 도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서요.”“그렇다면 달마 대사와 혜가 대사의 이야기를 한번 해보아라.”“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서 양무제가 불사를 많이 한 자기의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을 때 소무공덕(所無功德)이라 대답한 후 숭산 소림사에 들어가 9년 면벽을 했지요.”“그렇지, 그때 혜가가 달마 대사를 찾아와 법을 청하는데 흰 눈이 내려 무릎에까지 쌓이도록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 그때 달마 대사가 무상묘법을 불석신명자(不惜身命者)에게만 준다고 했지.”“그렇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혜가 대사는 즉시 칼을 들어 자기의 왼팔을 잘라 달마 대사에게 바쳤습니다.”“혜가 대사가 비록 자기의 왼팔을 자르는 신성을 보였으나 그래도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해 달마 대사에게‘저의 마음이 매우 불안하오니 편안하게 해 주소서.’라고 간청했지.”“그 말을 들은 달마 대사는‘그렇다면 너의 그 불안한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그러면 내가 편안하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혜가 대사는 아무리 자기의 불안한 마음을 찾아보아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달마 대사에게 무어라고 말했던가?”“아무리 불안한 마음을 찾아보아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그때 달마 대사는 무어라 말했던가?”“불안한 마음을 찾아보아도 없다면 너는 이미 안심을 얻었노라고 대답했습니다.”“그 다음에는?”“그 말에 혜가 대사가 도를 깨쳤습니다.”“그렇다면 혜가 대사는 팔을 자르고 도를 깨쳤는가? 아니면 이미 안심을 얻었다는 말에 도를 깨쳤는가?”“그야 물론 안심을 얻었다는 말에 도를 깨쳤습니다.”“그렇게 잘 알면서 대원이는 무엇 때문에 팔을 잘랐나? 나에게 신성을 바치기위해서 손을 잘랐단 말인가? 그런 신성을 바쳐서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왜 아무 대답도 못해, 대원이는 우리 회상에서 크게 기대되는 인물인데, 그렇게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다니, 만약에 후진들이 대원이를 본받아 손을 자르는 사람들이 자꾸 나온다면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람의 몸이란 공부와 사업을 하는데 없지 못할 가장 중요한 자본이다. 그 중요한 자본을 상하여 신성을 나타낸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진정한 신성이란 마음에 있는 것이지 몸에 달린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 회상은 초창기라 할 일이 많다. 이럴 때 손을 잘라 일을 못하게 되면 그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앞으로는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아무리 지식과 문장이 뛰어나고, 한 때의 특행으로써 여러 사람의 신망을 얻는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우리 회상의 참 주인이 될 수는 없다. 오직 이 공부 이 사업에 죽어도 변하지 않을 신성으로 혈심 노력하는 사람이라야 우리 회상의 참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소태산 대종사는 이후로 서대원의 예를 들어 제자들을 크게 경계하고, 영육쌍전 이사병행의 정신에 바탕하여 공동출역 등을 강조하였다.원산 서대원은 정산 송규, 주산 송도성과 더불어《불조요경》형성에 공헌하였다. 그는 불경공부를 많이 해서 소태산 대종사를 보필해야겠다는 뜻에서 얼마 동안 산중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온 일이 있었다. 서대원이 입산하였을 때 소태산 대종사는 크게 꾸짖었고 총부 대중들도 그를 규탄하였다. 총부 대중들은 회의를 열어 그를 교단에서 제명 축출하기로 결의하고 소태산 대종사께 제명결의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는 결의서를 찢으며 결의서를 가져온 김대거를 호통 치며 말하였다. “이 종이를 바로 재도 남기지 말고 불살라 버려라. 내가 아무리 대원이를 꾸짖는다 할지라도, 그대들은 나에게 대원이가 잠시 입산한 뜻은 결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회상을 위한 것이니, 용서해 달라고 해야지 내 보내자는 회의를하다니, 그렇게 내 뜻을 모르고 동지애도 없다는 말이냐?” 원기 26년 도산 이동안의 열반으로 수위단 보궐선거에서 서대원은 수위단원에 당선되었다. 서대원은 깨달음에 대한 강한 집념을 놓을 수 없어 다시 계룡산 선방과 수덕사 등을 비롯하여 산으로 또는 절로 수양의 행로를 펼쳤다. 그러자 주위에서는 생활 속의 불법공부를 버리고 입산하였다고 비난의 소리가 높았다. 그리하여 원기 28년에 전무출신에서 탈퇴 당하고 서울교당 교무인 응산 이완철을 따라 서울교당(돈암동 회관)으로 가 허약해진 몸을 치료하였다. ※ 위의 내용이《대종경》신성품 17~18, 교단품 15.《 대종경선외록》변별대체장 3 이되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이천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정 2품.부총리) 세손 .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국무총리)
4세 서유걸(徐維傑 좌복야(尙書左僕射).부총리)
5세 서존(徐存 태원군(太原君). 병부상서(兵曹尙書).장관)
6세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장관)
7세 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부총리)
8세 서찬(徐贊 백주지사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 대호군(대장군). 종3품 차관).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
9세 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부제학.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
10세 서능(서릉)(徐稜 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 국무총리)
11세 서준(徐俊 대장군(大將軍). 종 3품.차관. 공신)
12세 서민경(徐敏敬 상장군(上將軍). 정 3품. 장관)
13세 서정희(徐廷希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14세 서홍찬(徐洪贊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15세 서인조(徐仁朝 상장군(上將軍). 정 3품.장관)
16세 서원절(徐元節 판도찬중. 차관)
17세 서영계(徐永桂 밀직사(密直使).종 2품. 부총리)
18세 서천량(徐天亮 밀직사(密直使).정 2품. 부총리)
19세 서식(徐湜 진안감무(晉安監務). 시장)
20세 서화(徐華 성균 생원(成均生員). 학자)
서굉(徐紘.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정 3품. 차관)
서관(徐寬 이조참의(吏曹參議: 정3품. 堂上) . 국장)
21세 서흥조(徐興祖 성균 진사(成均進士))
22세 서경창(徐景昌 청평파(淸平公派))
서찬창(徐贊昌 성균 생원(成均生員))
23세 서숭로(徐崇老 병조참의(兵曹參議).국장)
24세 서의손(徐義孫 성균 생원(成均生員).진참공파)
서의신(徐義臣 진일제공(眞一齋公))
25세 서윤좌(徐允佐. 정일제공)
26세 서덕양(徐德讓 신암공파(愼菴公派))
서덕인(徐德認 판관공파(判官公派)
목차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작은고고고조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린(徐嶙) (종2품 판대부사)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가족
-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정 2품.부총리)
-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국무총리)
-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국무총리)
- 서유걸(徐維傑 좌복야(尙書左僕射).부총리)
- 서존(徐存 태원군(太原君). 병부상서(兵曹尙書).장관)
-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장관)
- 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부총리)
- 서찬(徐贊 백주지사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 대호군(대장군). 종3품 차관).정당문학(政當文學.종 2품 .부총리)
- 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부총리)
-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장관)
- 서존(徐存 태원군(太原君). 병부상서(兵曹尙書).장관)
- 서유걸(徐維傑 좌복야(尙書左僕射).부총리)
-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국무총리)
-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국무총리)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서능초당지(徐稜草堂址)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때의 문신으로 벼슬이 문하시중(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최고관직)에 이르렀던 서능(徐稜 ?~?)이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던 학당의 터이다.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모암마을의 용소(龍沼) 위쪽에 터가 있는데 현재 축대 일부만 남은 상태이다. 1919년 후손 서용호가 이 자리에 ‘절효 서선생 초당 유허비(節孝徐先生草堂遺墟碑)’를 세웠다.
서능은 고려시대의 이름난 효자이기도 하다. <고려사> 열전 효우편에 기록된 10여 명 중 한 명이며, 세종 때 편찬한 <삼강행실도에도 그의 효행 행적이 실려 있다. 또한 ‘거가십훈(居家十訓)’을 남겨 후세의 지침이 되게 하였다.
장성 서능 정려비 (長城 徐稜 旌閭碑)
정려비란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에서 그들이 살던 마을의 입구에 세우는 것으로, 이 비는 고려 고종 때의 문신인 서능 선생의 효심을 기리고 있다.
선생은 스무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에까지 올랐다. 어려서 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는 문하시중으로 있을 때 어머니가 병이 들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의원이 청개구리가 있어야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때가 한겨울이라 구할 길이 없어 고심하던 중에 난데없이 청개구리가 약탕기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약과 함께 짜서 드리니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고종이 후에 이 사실을 듣고 표창을 하면서, 그의 효심을 기리는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정려각 안에 놓여 있는 이 비는 사암 박순이 비문을 짓고, 옥봉 백광훈이 글씨를 써 놓았다.
전라도(장성) 용전사(龍田祠)-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1587년(선조 20년) 서릉(徐稜)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
건립 당시의 명칭은 모암서원이었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76년 서릉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이건하면서 용전사로 변경되었다.
서릉은 본관이 이천서씨(利川徐氏)로 절효공파((節孝公派) 중시조.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종1품 국무총리)까지 올랐으나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모 든 관직을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 성덕리 226번지 용암마을에 위치한다.
재각 용전재(龍田齋)
모암서원(慕巖書院)
1587년에 서삼면 모암리에 세워진 모암서원(慕巖書院)은 절효공 서능(徐稜)을 모신 사당(祠堂)과 양편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그리고 앞에 큰 강당이 있어 고을의 선비들이 절효공의 거가십훈(居家十訓)을 벽에 걸어 높고 그 아래서 글을 읽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어 현재는 빈터에 모암서원유허비(慕巖書院遺虛碑)와 칠현비(七賢碑)만 남아있다
화남사(華南祠)-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에 있는 현대에 서릉(徐稜)·서식(徐湜)·서숭로(徐崇老)·서영우(徐永佑)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사우.
월산사(月山祠) - 이천서씨(利川徐氏) 절효공파(節孝公派) 사당
향토문화유산 제1호.
전남 무안군 몽탄면 한재길 42-4.
월산사(月山祠)는 1752년 영조(英祖 2년) 이천서씨(利川徐氏) 후손들에 의해 구거지인 반월산(현재 대치마을 뒷산)의 서쪽 기슭에 창건하여 고려 고종(1214~1259)조에 시중을 지낸 절효 서릉(徐稜)을 주향으로 창건하여 9대손인 사암 서식(徐湜), 사암의 현손이며 예조참의에 이르렀으나 무오사화(1498) 때 낙향하여 연산하에서 향민을 교화하였던 정암 서숭로(徐崇老, 1422~?)를 배향하였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