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백상(尹百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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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4년(중종 39)∼1621년(광해군 13) = 78세]. 조선 중기 명종~광해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내수사(內需司) 별감(別監)이다. 자는 상지(祥之)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고, 여주(驪州) 출신으로서 거주지는 서울이다. 공조 참판(參判)윤옥(尹玉)의 서자이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세자빈 덕빈 윤씨(德嬪尹氏)의 오빠다.

내수사 별감 시절

1561년(명종 16) 그의 둘째누이가 순회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는데, 그 덕택으로 그는 내수사(內需司)별좌(別坐)에 임명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가 18세였고, 누이는 겨우 9세였다. 1562년(명종 16) 명종이 며느리 세자빈을 덕빈(德嬪)으로 책봉(冊封)하였고, 그는 내수사 별감으로서 어린 누이를 가까이에서 도왔다. 내수사는 궁중에 사용할 물품을 조달하는 관청이었는데, 그가 그 별좌에 임명되면서부터 정직하게 물건과 장부를 관리하였으므로 임금과 왕비가 그의 청렴결백한 것을 알고 매우 신임하였다. 1584년(선조 17) 그가 아버지 윤옥의 상(喪)을 당해서 3년 동안 상복을 입게 되자, 선조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업무를 대신하게 하였다가, 그가 아버지 상례를 끝마치자마자, 다시 그 자리에 임명하였다. 그는 내수사에서 25년 동안 근무하면서 명종과 선조를 가까이에서 모셨다.

1592년(선조 25) 3월 3일 그의 누이 덕빈윤씨(德嬪尹氏)가 병에 걸려서 나이 40세로 돌아가자, 그는 손수 염습(殮襲)하여 관곽(棺槨)빈전(殯殿)에 안치하고,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음달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적이 북상하자, 선조가 비빈(妃嬪)과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북 지방으로 피난하였으므로, 그는 덕빈의 빈전을 지키지 못하고 내수사 별좌로서 선조를 호종(扈從)하였다. 일행이 개성(開城)에 이르렀을 때, 선조는 모든 왕자와 왕녀를 연고지를 따라 여러 곳에 보내어 피난하게 하였다. 서출 제 2왕녀 정혜 옹주(貞惠翁主)를 책임지고 피난시켜줄 사람을 찾았는데, 내수사 별좌윤백상이 자원하고 나서서 정혜 옹주와 몇 사람의 별감과 시녀를 데리고 왜적의 눈을 피하여, 일부러 황해우도(黃海右道)의 험준한 산골로 들어가서 피난하였다. 선조 일행이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정세가 조금 안정이 되자, 윤백상이 옹주 일행과 함께 샛길로 평안도로 가서 의주의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선조가 감격하여, 즉시 그를 허통(許通)시키라고 명하고, 그를 위하여 다음날 정시(庭試)를 특별히 보이도록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고 끝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윤백상은 다시 내수사 별좌에 복직되었는데, 1594년(선조 27) 선조가 서울로 환도(還都)한 뒤에 사온서(司醞署)직장(直長)으로 옮겼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594년(선조 27) 사옹원(司饔院)봉사(奉事)에 임명되었으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끝난 뒤에 나라가 안정되자, 사간원에서 윤백상의 신분이 미천하므로 사온서·사옹원의 관직에 임명할 수 없다고 끈질기게 주장하자, 결국 선조가 그들의 주장을 따라서 그를 파직하였다. 선조가 그를 보호해주지 않은 데 크게 실망하여, 이때부터 그는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경기도 여강(驪江)의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때 그의 나이가 54세였는데, 고향 여주의 농장에서 땅을 갈고, 남한강에서 낚시를 하면서 여생을 보내려고 생각하였다.

후반기의 방랑 생활

실직(失職)한 윤백상은 고향으로 내려와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러나 본래 성품이 소탈한 데다 술을 좋아하였으므로, 노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자신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생활하였다. 세속(世俗)을 멀리 떠나서 죽림(竹林)에서 살다가 간 옛날 사람들을 사모한 나머지, 농장의 농삿일도 집어치우고 애첩(愛妾)과 함께 경기도 여주에서 충청도 내포(內浦)로 옮겨가서 살면서, 더욱 풍광(風光)이 수려한 땅을 얻어서 노년을 끝마치려고 생각하였다. 이때 그는 중국 남북조 시대 ‘죽림 7현(竹林七賢)’의 현실도피적 성향을 나타냈다.

그러나 실업한 처지에 수입이 없었으므로 입에 풀칠도 할 수 없게 되자, 현실을 도피하려는 생각을 잠시 버리고, 남의 땅을 빌려서 둔전(屯田)을 하고, 어량(魚梁)을 빌려주고 세를 받는[稅魚] 사업에 종사하여 먹고 살았다. 그러나 경영하는 사업마다 번번이 일이 잘못되어 결손이 크게 나서, 결국 고향의 토지와 노비 등을 모두 팔아서 빚을 갚았다. 이리하여 집안이 매우 군색(窘塞)해져 친척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와 가까운 친척들이라 할지라도 그가 우활(迂闊)하다고 비웃었으나, 정작 그 자신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면서, “내가 어찌 오늘날 지혜가 모자라서 그렇게 되었겠는가? 지금 나의 명운(命運)이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택당집(澤堂集)』 별집 권12 「서구 윤백상전(庶舅尹百祥傳)」 참고, 이하 「윤백상전」이라 약칭.)

1615년(광해군 7) 그의 나이 72세 때 서자 윤기(尹錡)가 절도 사건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당하여 심문을 받으면서, 그는 아버지 윤백상과 역모(逆謀)를 꾀하였다고 무고(誣告)하였다. 죽을 운명에 처하였으나, 우의정심희수(沈喜壽)가 그를 구원하여 겨우 죽음은 모면하고, 평안도 구성(龜城)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가족을 남겨놓고 혼자 구성으로 귀양 가서, 6년 동안 북방의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1621년(광해군 13) 노병으로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8세였다.(「윤백상전」 참고.)

정혜 옹주의 피난과 윤백상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내수사 별좌윤백상은 평안도로 피난 가는 선조를 호종하였다. 일행이 개성에 이르렀을 때, 선조는 전쟁에서 모든 왕자와 왕녀가 한 곳에 있다가 변을 당하면, 후사(後嗣)가 끊어진다고 생각하여, 왕자와 왕녀를 연고지를 따라 여러 곳에 보내어 피난하게 하였다. 세자 광해군(光海君)은 전라도 전주(全州)로 내려가서, 분조(分朝)를 만들고 하3도(下三道)의 군관민을 동원하여 왜적과 싸웠다. 서출 제 1왕자 임해군(臨海君)은 처자식을 데리고 강원도로 가서 피난하면서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다른 왕자와 옹주들도 모두 흩어져 각각 따로 떠났다. 그러나 서출 제 2왕녀 정혜 옹주(貞惠翁主)는 나이가 아직 어렸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인빈김씨(仁嬪金氏)는 따라갈 수 없었다. 인빈 김씨는 선조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으로서 4남 5녀를 낳았는데, 정혜옹주는 그 둘째딸이었다. 다급해진 선조는 호종하는 신하들에게 난리 중에 정혜 옹주를 책임지고 피난시켜줄 사람을 찾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마침 내수사 별좌윤백상이 자원하고 나서서 그 임무를 맡았다. 윤백상은 정혜 옹주와 몇 사람의 별감과 시녀를 데리고 왜적의 눈을 피하여, 일부러 황해우도의 험준한 산골로 들어갔다. 윤백상은 일행을 이끌고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온갖 어려움과 고초를 겪었다. 마을에서 양식을 빌려 식사를 마련하여 끼니를 거르게 한 적이 없었으며, 풀밭과 바위 사이에 노숙하면서도 옹주에게 반드시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주었고, 옹주가 두창(痘瘡)을 앓아서 위급했을 때에는 약초를 구해 와서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였다.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의 왜군이 강원도로 침입하자, 서출 제 1왕자 임해군 일행은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다시 피난갔다. 또 서출 제 6왕자 순화군(順和君) 일행도 왜적에게 쫓겨서 회령으로 피난갔는데, 회령의 토호 국경인(鞠景仁)이 반란을 일으켜서 두 왕자 일행을 체포하여 가토 키요마사에게 넘기고 말았다. 고니시 유카나카[小西行長]의 왜군은 황해도로 침입하였으나, 윤백상은 정혜옹주 일행을 데리고 왜적의 눈을 피하여 다녔다. 카토 키요마사가 회령에서 두 왕자를 사로잡았다는 소문을 들은 고니시 유카나카는 조선의 왕자와 왕녀를 사로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윤백상은 정혜 옹주 일행과 함께 샛길로 평안도로 가서 선조가 머무르고 있던 의주의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선조가 감격하여, “그대가 지성으로 옹주를 보호해 준 그 마음씨에 대하여 내가 마땅히 보답해야 하겠다.” 하고, 즉시 그를 허통시키라고 명하고, 그를 위하여 그 다음날 정시를 특별히 보이도록 하였다. 윤백상은 서출이었으므로, 당상관(堂上官)으로 허통시키려고, 바로 다음날 과거 시험을 보게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고 끝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당시 사림파(士林派)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가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소윤(少尹)으로 활동한 할아버지 윤사익 때문에 당상관의 관직에 의망(擬望)될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정혜 옹주는 그를 아버지처럼 따르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을 보내어 사소한 일이라도 반드시 그에게 의논하였고, 또 건강을 당부하였다. 마침내 정혜 옹주는 서인의 영수 윤두수(尹斗壽)의 아들 해숭위(海嵩尉)윤신지(尹新之)와 혼인하였는데, 그가 서울에 볼일이 있을 때마다 정혜 옹주의 집을 찾아가서 만났으나, 옹주의 시댁에서 그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는 탄식하기를, “궁문(宮門)이 깊고도 깊어서, 옷자락을 끌고 다닐 곳이 못된다. 내가 옛날에 무슨 수고를 한 것이 있다고 옹주를 만나러 다닌다는 말인가?” 하고, 두 번 다시 옹주의 집을 찾아가지 않았다. 1608년 2월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였을 때 그는 선조를 위하여 통곡하고 상복을 입었다.

공회빈의 재궁(梓宮) 발굴과 윤백상

1592년(선조 25) 3월 3일 덕빈 윤씨(德嬪尹氏)가 돌아가자, 순회세자가 묻힌 순회묘(順懷墓)에 합장하려고, 덕종(德宗)의 무덤인 서오릉(西五陵)의 경릉(敬陵) 옆에 합장할 지역에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때 윤백상은 덕빈의 재궁(梓宮)을 지키면서 부장할 지역을 돌아보곤 하였다. 다음달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군이 서울로 북상하자, 미처 공회빈(恭懷嬪)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선조가 급히 피난을 떠나게 되었으므로, 내수사 별감으로 있던 윤백상도 선조를 호종하였다. 얼마 뒤에 왜구가 서울에 침공할 때 궁전에 불이 나는 바람에 궁중을 지키던 관리들도 모두 흩어져 도망하였고, 공회빈의 재궁(梓宮)은 빈전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서울의 난민(亂民)들이 궁중을 지키던 관리와 군인들이 도망하자, 텅 빈 궁궐로 난입해서 약탈하였는데, 덕빈의 빈궁(殯宮)에도 난민들이 들어와서 빈전과 재궁을 파괴하고 잡물(雜物)들을 다투어 가져가면서 덕빈의 시신을 그대로 내팽개쳤다.

이때 사평(司評)이충(李忠)이 신립申砬)의 충주 싸움에서 참전하였다가 패배하여 후퇴하면서 서울로 들어왔는데, 창경궁(昌慶宮)을 지나다가 우연히 덕빈의 빈궁을 들여다보았더니, 서울의 난민들이 난입해서 빈궁의 잡물들을 다투어 가져가고, 덕빈의 시신이 내버려져 뒹굴고 있었으므로, 너무나 참혹해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가 덕빈의 시체를 거두어 바깥으로 옮겨서 함춘원(含春苑)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덕빈의 오빠 윤백상이 이 말을 듣고 사평이충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죽고 없어서 만날 수 없었고, 함춘원을 여기저기 파서 뒤졌으나, 덕빈의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 참고.)

1593년(선조 26) 10월 예조에서 아뢰기를, “덕빈의 상구(喪柩)가 있는 곳을 윤백상을 불러다가 물어보니, 윤백상의 말이 ‘전일 이충이 말한 함춘원에 시신을 묻어 놓았다는 것은 곧 중간에서 사실을 모르고 전파한 말이다. 내가 덕빈의 가까운 친족으로서 상구가 있는 곳을 항시 염두에 두고 탐문해 보았으나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도성에 들어온 뒤에 덕빈의 노비를 찾아다니며 물어보아도 역시 아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하니, 선조가 몹시 실망하여, “알았다.”고 대답하였다.(『선조실록』 참고.)

1595년(선조 28) 5월 겸 사복(兼司僕)현응민(玄應旻)이란 자가 나타나서 자기가 공회빈을 매장한 군사라고 자칭하였으므로, 예조에서 그가 매장하였다고 주장하는 창경궁(昌慶宮)명정전(明政殿) 뒤쪽에 가서 우묵하게 들어간 구덩이를 조사하였으나, 잡초에 뒤덮여서 형적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예조에서 공회빈이 묻힌 곳을 발굴해 볼 것인지 여부를 의정부 대신들에게 상의하였는데, 영의정유성룡(柳成龍) 등이 말하기를, “발굴해서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파서 확인할 때 옛날 모셨던 궁인과 가까운 친척들을 함께 참석시키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해 6월 덕빈의 시신을 발굴하는 날 예조에서 덕빈의 오빠인 전 직장윤백순(尹百順)을 여주(驪州)에서 부르고, 덕빈의 서출 오빠인 사옹원 봉사윤백상을 사기소(沙器所)에서 불러서, 덕빈을 모시던 궁녀들과 함께 현장에 입회하게 하였다. 그러나 현응민이 임시 매장처라는 곳을 발굴하여 썩은 뼈 2개를 발견하였는데, 의관(醫官)에게 그 뼈를 살펴보게 하니, 사람의 뼈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때 예조로부터 자세한 보고를 받은 선조는 크게 한탄하면서, “이제 이와 같다고 하니, 더욱 참혹스럽다.” 하였다.(『선조실록』 참고.) <임진왜란> 때 왜적이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조가 서울의 도성(都城)을 비우고 서쪽 지방으로 피난가자, 성난 군중들이 텅빈 궁전으로 들어와서 덕빈의 관곽을 약탈하고 덕빈의 시신을 팽개쳐서 내버렸는데, 서울에 남아 있던 덕빈의 친족들이 겨우 시신을 수습하여 명정전 뒤쪽 뜰에다 매장하였다. 뒤이어 궁전에 들어온 왜적들이 덕빈의 시신을 파내어 불태워버렸다. 당시 서울의 왜군은 임해군과 순화군처럼 왕족을 포로로 사로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환도(還都)한 뒤에 윤백상은 덕빈의 시신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녔으나, 왜적들이 덕빈의 시신을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윤백상은 일찍이 홀로 된 누이 덕빈이 죽어서도 시신마저 찾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죽을 때까지 덕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오열(嗚咽)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성품과 일화

윤백상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소탈하고 행동이 민첩하며, 머리가 지혜롭고, 특히 말재주가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수업하여, 그 대의(大義)에 정통하였으며, 의술과 방술[方技], 음률과 잡술(雜術) 등을 널리 섭렵하였으므로, 담론(談論)할 때 박학다식하여 모든 방면에 능통하였다.(「윤백상전」 참고.)

윤백상은 자신이 서자로서 고통을 겪었는데, 일찍이 사랑했던 애첩(愛妾)과의 사이에 윤기라는 서출 아들을 낳았다. 서자 윤기는 점차 자라면서 서자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고, 아버지 윤백상에게 반항하다가 마침내 집을 나갔다. 서자 윤기는 장사를 한다고 장사치들을 따라다니면서 3년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아버지 윤백상이 아들 윤기를 나무라는 편지를 보냈다. 마침 아들 윤기가 장사치 무뢰한들과 절도행각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서 심문을 당하였다. 아들 윤기는 아버지 윤백상이 궁중과 잘 통하므로, 아버지를 끌어들여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아버지 윤백상과 함께 역모를 꾀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이리하여 윤백상 부자는 역모를 꾀한 ‘모반 대역 죄인(謀叛大逆罪人)’으로 몰려서, 부자가 모두 사형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광해군 시대 정치가 불안하여 무고가 끊임없이 일어나서 아무런 죄도 없이 ‘모반 대역 죄인’이 되어 처형당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국청(鞫廳)에 참여한 우의정심희수(沈喜壽)는 윤백상이 3년 동안 아버지 윤백상을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던 사실을 들어서, 아버지 윤백상이 그 모의를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아들 윤기의 보따리에서 아들을 질책하는 아버지 윤백상의 편지가 나왔기 때문이다. 또 윤백상이 고인이 된 덕빈의 오빠라는 점을 들어서, 광해군에게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여 겨우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심희수는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의 4촌 동생으로서 시어머니 인순왕후와 며느리 덕빈이 과부가 되어 서로 의지하고 살던 것을 항상 애처롭게 생각하였고, 광해군도 <정혜 옹주의 피난> 사건과 <덕빈의 재궁 발굴> 사건을 통하여 윤백상의 이름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이리하여 윤백상은 다행히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으나, ‘모반 대역 죄인’으로서 변방(邊方)에 자원(自願) 안치(安置)되었다. 그러나 그의 외아들 윤기는 처형되었다.

1615년(광해군 7) 평안도 구성(龜城)으로 자원하여 유배되었는데, 그곳에 그의 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성에서 외가집의 친척 원응명(元應命)·원사강(元嗣康)을 비롯하여, 허위선(許爲善)·전성민(全聖民) 등에게 글을 가르쳐서 가족의 도움 없이 의식주를 해결하였다. 그는 귀양 간 지 6년 만에 1621년(광해군 13) 혼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는데, 그 제자들이 그의 어머니 원씨(元氏)의 묘역(墓域)에다 장례를 지내주었다.(「윤백상전」 참고.)

묘소와 후손

묘소는 평안북도 구성군 원씨 묘역(墓域)에 있는데, 그의 조카 택당(澤堂)이식(李植)이 지은 「윤백상전」이 남아 있다.(『택당집(澤堂集)』 별집 권12 「서구 윤백상전(庶舅尹百祥傳)」) 그는 부인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교수(敎授)이경침(李景沈)에게 출가하였다. 또 애첩과의 사이에 서자 윤기가 있었는데, ‘대역 무도 죄인’으로 처형되었다. 사위 이경침이 그의 영구(靈柩)를 구성에서 옮겨와서 부인의 무덤에다 합장하려고 계획하였으나, 병화(兵禍)를 입는 바람에 실행하지 못하였다.(「윤백상전」 참고.) 1621년(광해군 13) 봄에 윤백상이 노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구성에서 그에게 수학한 원응명·원사강·원국한과 허위선·전성민·허내성(許乃成)·허사문(許斯文) 등의 제자들이 관곽(棺槨)을 갖추어 어머니 원씨의 묘역 남쪽에다 장례를 지내고, 세시(歲時)마다 제자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택당집(澤堂集)』
  • 『외재집(畏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