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창(痘瘡)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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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두창 |
한글표제 | 두창 |
한자표제 | 痘瘡 |
동의어 | 두진(痘疹), 두역(痘疫), 마마병[마마病], 완두창(豌豆瘡), 역, 천연두 |
관련어 | 고금경험활유방(古今經驗活幼方), 두창경험방(痘瘡經驗方),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종두법(種痘法) |
분야 | 문화/의학·약학/병명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집필자 | 원보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두창(痘瘡)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현종실록』 9년 4월 28일 |
두창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급성 법정 전염병.
개설
두창(痘瘡)은 두진(痘疹), 손님, 마마, 두역(痘疫), 완두창(豌豆瘡) 외에도 『훈몽자회』 「질병부」에 역이라 나와 있는가 하면, 일본식 이름인 천연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감염성 급성 질환으로, 사망률이 높다. 오한, 고열, 동통을 동반하고 피부 발진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역사상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무서운 전염병 중 하나로, 1967년에만 200만 명이 사망했을 정도로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인류를 괴롭혀 온 질병의 하나였다. 1979년 전 세계에서 사라진 질병으로 선언된 뒤 현재까지 자연적인 발생이 보고된 적은 없다.
내용 및 특징
우리나라에 두창이 전염된 경로는 대부분의 전염병이 그러하듯 랴오둥 반도를 건너 들어오거나 산둥 지방으로부터 황해를 거쳐 들어오는, 두 개의 경로를 통하여 전파되었으며, 대마도를 거쳐 일본에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두창이 유행되었는지에 대한 국내의 기록은 자세하지 않고, 『일본서기』나 『속일본기』에 몇 군데 시사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미 『삼국사기』에도 신라선덕왕(宣德王)이 질진(疾疹)에 걸려 흉(薨)한 것으로 나오고 있으며, 문성왕(文聖王) 역시 질진에 전염되어 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질진이란 두창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뒤 고려 때 만들어진 『향약구급방』 하권인 「소아잡방」 중에 "소아 완두창이 발생하려 하거나 이미 발생하여 숨어 있는 것은 모두 마땅히 빨리 치료하여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 고유의 의료 관계 문헌으로서는 이것이 두창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이라 여겨진다.
예방법은 물론 치료법도 없던 조선시대에는 두창에 대한 대처가 왕실과 민간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에는 "세속에서는 어린아이가 두역을 하면, 신을 신봉하며 기휘(忌諱)하고 약도 쓰지 않고 기도만 했기 때문에 많은 인명이 요절하여 애석하기 이를 데가 없다……"고 하여, 민간에서 두신(痘神)을 병인(病因)으로 보아서 생기는 폐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두창의 발생과 예후가 두신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두신은 몹시 까다로운 신으로 인식됐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금기가 동반되었다. 초상집 출입과 연회, 방사(房事), 외인의 출입을 꺼리고, 유밀(油蜜, 기름과 꿀)과 성전(腥羶, 노린내 나는 짐승 또는 누리고 비린 냄새), 오예(汚穢, 더러운 것) 등도 삼가도록 하였다. 또한 즉효약이 없었으므로 무속 등의 신앙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무속의 의례 절차인 굿거리에 두신을 모시는 호구거리와 별상거리가 있을 정도로 민간 종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두창은 일생 동안의 통과 의례와 같은 질병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두창을 무사히 앓고 난 후에는 두신에 대한 감사를 겸하여 간단한 의례를 치르거나 무당을 동원한 마마배송굿이 행하여졌다.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 「잡저」 편에도 마마신을 배송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전염병으로서의 두창에 대한 두려움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익숙한 사실이어서, 두창이 민간에서 역병으로 돌 때는 중국 사신을 배웅하기 위한 왕의 교외 출입조차 삼갈 정도였다.
변천
종두법이 도입, 보급되기 이전인 조선시대 전반에 두창은 왕실은 물론 여항에 이르기까지 일생에서 꼭 한 번은 겪어야 할 질병의 하나로 인식될 정도로 홍역과 함께 유아 사망률을 높이는 데 일조한 심각한 질환이었다. 조선시대에 두창이 크게 자주 발생하였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418년(태종 18) 무술 정월에 "성녕대군(誠寧大君) 종(種)이 완두창에 걸려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를 비롯해 두창은 1418년(태종 18)부터 1910년까지 전 시기에 걸쳐서 계속 유행하였는데, 특히 1668년(현종 9) 4월에는 전국적으로 두창이 크게 유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현종실록』 9년 4월 28일).
두창의 예방은 18세기 초에 인두법이 수입, 보급되면서 비로소 이루어졌다. 인두종법은 정약용(丁若鏞)이 수입, 종두술(種痘術)을 시험한 뒤 실시하였는데, 정약용은 종두법을 전파하기 위해 『종두심법요지』를 집필하였다. 종두법은 영남에 전하여 차차로 경향(京鄕)에 널리 보급되었다. 또 개항 이후에는 우두법이 도입되어, 1880년대에 전국 각지에 우두국(牛痘局)이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의의
두창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질환이자 가장 민속적인 질병이었다. 두창에 관한 왕실과 민간의 의료 생활사는 보다 면밀한 탐구가 필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참고문헌
- 『어우야담(於于野談)』
- 『패관잡기(稗官雜記)』
- 『홍재전서(弘齋全書)』
- 김두종, 『한국의학사』, 탐구당, 1966.
- 김호, 「조선 후기 ‘두진’ 연구」, 『한국문화』17, 1996.
- 신동원, 『조선 사람의 생로병사』, 한겨레신문사, 1999.
- 정연식, 「조선시대 천연두와 민간의료」, 『인문논총』14,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