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신지(尹新之)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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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윤신지 |
한글표제 | 윤신지 |
한자표제 | 尹新之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효종 |
집필자 | 이현숙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윤신지(尹新之)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8년 3월 21일, 『인조실록』 10년 5월 11일, 『인조실록』 13년 3월 19일, 『인조실록』 3년 9월 16일 |
총론
[1582년(선조 15)∼1657년(효종 8) = 76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효종(孝宗) 대에 활동한 의친(議親)이자 서예가. 선조의 부마(駙馬)이고, 봉작은 해숭위(海嵩尉)이다. 자는 중우(仲又)이며, 호는 연초재(燕超齋)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의정해창군(海昌君)윤방(尹昉)이고,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판관(判官)한의(韓漪)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윤두수(尹斗壽)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정(正)윤변(尹忭)이다. 숙종(肅宗)의 국구(國舅) 김만기(金萬基)와 대제학김만중(金萬重) 형제 어머니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96년(선조 29) 15세에 선조와 김인빈(金仁嬪) 사이에서 태어난 정혜옹주와 결혼하여 해숭위의 작호를 받고, 2품의 관품에 올랐다. 그는 총명하고 시를 잘 지었는데, 선조는 윤신지를 무척 사랑하여 자주 불러 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으며, “재주가 나라를 빛낼 만하니, 더욱 학문에 전심하고, 문예(文藝)에만 국한하지 말라”며 칭찬하기도 하였다. 1606년(선조 39) 명(明)나라의 조사(詔使)인 주지번(朱之蕃)과 양유년(梁有年)이 사신으로 왔을 때, 영위사(迎慰使)로 선임되었는데, 명나라 사신을 맞아 접대하면서 서로 시로써 창화(唱和)하였다.[『도곡집(陶谷集)』 권11 「해숭위문목윤공신도비명(海嵩尉文穆尹公神道碑銘)」 이하 「윤신지비명」으로 약칭]
선조는 비빈(妃嬪) 중에서 김인빈을 가장 사랑하여 4남 2녀를 낳았는데, 처음에는 김인빈이 낳은 신성군(信城君)을 세자로 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1591년(선조 24) 김공빈(金恭嬪)이 낳은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세우려고 하였으므로, 선조의 노여움을 산 좌의정정철(鄭澈)과 윤신지의 할아버지인 윤두수 등의 서인(西人)들이 모두 귀양을 갔다. 이것이 바로 <건저 문제(建儲問題)>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왜군이 서울로 육박하자, 선조는 의주(義州)로 피난을 가는 4월 28일에야 비로서 광해군을 세자로 정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선조는 젊은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얻자,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고 하다가 끝내 실행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북인(北人)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이 정권을 잡고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비(廢妃)시켜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때 서인들이 이를 반대하다가 귀양 갔는데, 윤신지의 아버지 윤방은 벼슬에서 물러나 노량진(露粱津)의 강촌(江村)에 은거하였다. 부마 윤신지는 아버지 윤방과 형 윤이지(尹履之)가 서인이고, 부인 정혜옹주는 김인빈이 낳은 신성군의 누이였으므로, 두 부부는 광해군이 혹시 위해를 가하지 않을까 항상 불안에 떨어야 했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는데, 인조는 신성군의 친동생 정원군(定遠君 : 원종)의 아들이었다. 정혜옹주는 인조의 친고모였으므로, 부마 윤신지는 인조의 고모부가 되었다. 그러므로 윤신지는 인조 때 아버지 윤방과 형 윤신지의 배경이 되었다. 아버지 윤방이 영의정이 되고, 형 윤이지가 승정원 도승지가 되는 데 정혜옹주와 김인빈의 도움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조반정의 주도 세력은 능성 구씨(綾城具氏)와 평산 신씨(平山申氏) 두 집안이었고,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 윤신지는 새로 왕이 된 인조에게 군왕의 덕에 대하여 진언(進言)하였고, 선왕(先王 : 선조)의 검소함을 이어받아 후대에 본을 보여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윤신지비명」] 그는 부마이기 때문에 관료로 진출할 수가 없었으므로, 의친으로서 시문과 서예에 열중하는 한편, 주로 왕실의 혼인과 상례를 돕는 일을 하였다.
1630년(인조 8) 3월 선조의 목릉(穆陵)을 천릉(遷陵)할 때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관이 되었는데,(『인조실록』 8년 3월 21일) 12월 목릉의 천릉이 끝난 다음에 그 공로로 종1품 상 광록대부(光祿大夫)에 가자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8년 12월 18일] 1632년(인조 10) 4월 원종의 장릉(章陵)을 추숭할 때에는 도감(都監)의 당상관이 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10년 4월 30일] 그해 5월 원종을 추숭(追崇)할 때 수고한 모든 집사(執事)와 도감의 도제조(都提調) 이하에게 상사(賞賜)하였는데, 서사관(書寫官)이었던 윤신지에게는 숙마(熟馬) 1필을 하사하였다.(『인조실록』 10년 5월 11일) 그리고 1635년(인조 13) 3월 인목대비의 부묘례(祔廟禮)를 거행하면서 수고한 모든 관원에게 가자하거나 상사하였는데, 종헌관(終獻官)이었던 윤신지는 숙마 1필을 받았다.(『인조실록』 13년 3월 19일)
당시 윤신지는 능묘(陵廟)의 대사(大事)가 있을 때마다 도감에서 일을 맡아 수고하였으므로 마침내 품계가 정1품에 이르렀다. 부마 윤신지의 지위가 대신들과 같아졌으므로, 큰 조회가 있는 날이면 아버지 윤방은 영의정으로 동반의 1품 자리에 서고, 아들 윤신지는 의친으로 서반의 1품 자리에 서서 동서반(東西班)을 거느렸다. 사람들은 모두 이를 부러워하였으나, 윤신지는 이를 거북하게 여겨 항상 조심하였고, 혹시 반대파의 비난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 않을 때가 많았다.[「윤신지비명」]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그는 왕명을 받고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과 봉림대군(鳳林大君) 등과 함께 강화도로 먼저 피난을 떠났다. 그 뒤에 아버지 윤방이 묘사(廟社)의 제조(提調)가 되어 종묘의 신주 40여 기와 함께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인조도 강화도로 피난하려고 나섰으나,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하였을 때 벌써 오랑캐의 기병이 서쪽 교외에까지 이르렀으므로, 대가(大駕)의 방향을 바꾸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당시 윤신지는 소모대장(召募大將)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죽산진(竹山鎭)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강화도 갑곶나루의 군사가 오랑캐에게 무너지고, 또 남한산성이 오랑캐 군사들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죽기를 작정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강화성으로 달려갔다. 부하들이 이를 말리자 그는 “인신(人臣)이 병란(兵亂)에 달려가지 않으면, 어디 의리(義理)라고 하겠는가. 그대들은 모두 떠나라. 나 혼자 가겠다”고 이들을 꾸짖으며, 말을 몰아 달려가다가 적병을 만났다. 그는 적병과 싸우다가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는데, 뒤따르던 부하들에게 구조되어 살아났다.[「윤신지비명」]
부마 윤신지와 정혜옹주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윤지(尹墀)와 차남 윤구(尹坵) 모두 총명하여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후 혼인하여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그러나 1637년(인조 15) 9월 동생 차남 윤구가 병에 걸려 32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정혜옹주는 막내아들이 갑자기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누워 지내다가, 1638년(인조 16) 11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부마 윤신지는 맏아들 윤지에게 의지하고 살았는데, 1644년(인조 22) 4월 장남 윤지마저 지병으로 4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윤신지는 이후 맏아들 윤지의 소생인 손녀딸 생원(生員)김익겸(金益謙)의 처에게 의지하고 살았다. 김익겸과 윤신지의 손녀 사이에서 영의정김만기와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은 김만중이 태어났다. 부마 윤신지는 막내아들과 부인 정혜옹주, 그리고 맏아들을 차례로 잃고 몹시 슬퍼하여 만년에 거의 20년 동안 대문을 닫고 외부 사람을 만나지 않은 채 비탄과 눈물의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후사가 없이 죽은 두 아들을 위하여 형 윤이지의 손자 윤세흥(尹世興)과 윤세휴(尹世休) 형제를 각각 그 양자로 삼아, 죽은 아들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년) 5월 인조가 세상을 떠나고, 효종이 즉위하면서 북벌(北伐) 사업을 추진하였으나, 그는 세상에 뜻이 없어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노환으로 점차 건강이 나빠져 1657년(효종 8) 5월 3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76세였다.[「윤신지비명」]
그는 시문(詩文)을 잘 지었고 서화에도 능하였는데, 그의 시문을 모아 『현주집(玄洲集)』과 『파수잡기(破睡雜記)』가 간행되었다.
성품과 일화
풍채가 중후하고 늠름하였다. 멀리서 바라보면 키가 크고 남보다 뛰어났으며, 가까이 대하면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하였다.[「윤신지비명」]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비범하여 15세에 부마로 선발되어 정혜옹주와 혼인하였는데, 그때 할아버지 윤두수가 “우리 집안이 과거에 장원 급제할 장원랑(狀元郞) 하나를 잃었구나”라고 탄식하였다.[「윤신지비명」]
그는 어려서부터 작은 할아버지 윤근수(尹根壽)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문장(文章)을 잘 지었고 서화에도 능하였다. 그러므로 이식(李植)과 김세렴(金世濂)이 그를 문예의 대가라고 추대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시문들을 모아서 유고집(遺稿集) 13권이 간행되었다. 또한 그는 서화(書畵)도 모두 절묘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당시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윤신지비명」]
그는 한강이 흘러가는 용산(龍山) 마포(麻浦)의 현호(玄湖)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스스로를 ‘현주산인(玄洲散人)’이라 하였는데,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한가하게 살면서[燕居]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는다[超然]”는 말에 감동을 받아 본인의 호를 ‘연초재(燕超齋)’라고 하였다.[「윤신지비명」]
1625년(인조 3) 9월 윤신지는 선조가 직접 쓴 ‘존덕성 도문학 신기독 사무사(尊德性道問學愼其獨思無邪)’ 12자의 족자를 인조에게 바쳤다. 그 글은 육구연(陸九淵)의 존덕성(尊德性), 주자(朱子)의 도문학(道問學), 증자(曾子)의 신기독(愼其獨), 공자(孔子)의 사무사(思無邪)에서 따온 것이었다. 족자를 받아서 벽에 걸어 놓고 감상하던 인조는 고모부인 윤신지에게 “직언을 구하는 교서를 내린 지 여러 날이 되었으나 충직한 간언을 듣지 못했는데, 경이 나를 하찮게 여기지 않고 제일 먼저 격언을 진달하고, 또 선왕의 보배스런 필적을 바쳤으므로, 내가 벽에 걸어놓고 보니,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 같다. 옛날을 생각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내가 불민하기는 하나, 감히 아침저녁으로 선왕을 대하듯이 하여, 경의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 부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고마워하였다.(『인조실록』 3년 9월 16일)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원당리(元堂里)에 있는데, 부인 정혜옹주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윤신지비명」]
부인은 선조의 딸인 정혜옹주로, 자녀는 2남을 두었다. 장남 윤지는 이조 참판(參判)을 지냈고, 차남 윤구는 이조 정랑(正郞)을 지냈다. 그러나 두 아들 모두 아버지 윤신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의 형인 윤이지의 손자 윤세흥과 윤세휴를 양자로 들여, 두 형제의 후사로 삼았다.[「윤신지비명」] 장남 윤지의 딸이 김익겸과 혼인을 하였는데, 이들 사이에서 숙종(肅宗)의 국구(國舅)이자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인 김만기와 대제학김만중이 태어났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선원계보(璿源系譜)』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도곡집(陶谷集)』
- 『상촌집(象村集)』
- 『서석집(瑞石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복집(愚伏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