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서(趙之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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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4년(단종2)∼1504년(연산군10) = 51세]. 조선 초기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 자는 백부(百符), 호는 지족(知足) · 지족정(知足亭)이다. 본관은 임천(林川)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진주(晉州) 산음(山陰)이다.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조찬(趙瓚)이고, 어머니 진주정씨(晋州鄭氏)는 생원 정참(鄭參)의 딸이다. 대유학자 조식(曺植)의 할머니가 조지서의 누이였다.

성종 시대 활동

1474년(성종5) 생원시(生員試)에서 1등 장원으로 뽑히고, 진사시(進士試)에서 2등으로 합격하였다. 같은 해에 식년(式年) 문과(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나, 5년 뒤인 1479년(성종10) 중시(重試)에서 다시 1등 장원으로 뽑혔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진주에 살았는데, 부근에 삼장원봉(三壯元峯)이 있었다. 그가 사마시(司馬試)의 초시(初試)와 생원시, 그리고 중시에 모두 장원급제하자, 고향 사람들은 삼장원봉의 정기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떠들었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경주판관(慶州判官)으로 나갔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에서 몇 년을 보냈다. 1488년(성종19) 성종은 “조지서는 쓸 만한 사람이다. 병세가 위중하지 않으면 경직(京職)에 임명하도록 하라.”라고 전교하여 그를 서용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대사간(大司諫)권정(權侹)이 “병으로 사임한 지 이제 겨우 수 년이 되었는데, 갑자기 경직(京職)을 제수하는 것은 미편합니다.”라고 반대하였으나, 형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이어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의 교리(校理) ·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 1489년(성종20) 경연(經筵)시강관(侍講官)에 임명되어, 성종에게 역사를 강론하였다. 이때 성종은 시강관을 분야별로 나누어, 사학(史學)에는 조지서를, 시학(詩學)에는 조위(曺偉) 등을 임명하였다.

또한 성종은 조지서의 학문과 인격을 인정하여 세자 연산군의 스승으로 삼았다. 1493년(성종24)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 · 보덕(輔德)에 임명되어, 세자를 엄격하게 가르치고 훈계하여 연산군을 사람답게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연산군의 반감을 사서, 조지서는 연산군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되었다.

갑자사화의 피화

1494년(연산군즉위) 연산군이 즉위하자, 그 이듬해 연산군의 성격을 알던 그는 가까이 있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기를 자청하였다. 그리하여 경상도창원부사(昌原府使)로 나갔다가 임기가 찬 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산음에서 10여 년 동안 은거하였다. 그 사이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서 김종직(金宗直) 등 사림파(士林派)의 선비들이 화를 당하였다.

그러나 6년 뒤인 1504년(연산군10) 연산군이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서 어머니 윤씨(尹氏: 제헌왕후)의 원수를 갚을 때, 그는 앙화(殃禍)를 피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체포되어 압송당하였다. 그리하여 심문을 받다가 윤4월 16일 저자거리에서 참수(斬首)를 당하였다. 이후 팔도에 조리돌리고, 나머지 시신은 강물에 내던져졌을 뿐만 아니라, 고향의 집은 허물고 집터를 파헤쳐서 연못으로 만들었다. 처음에 연산군은 어머니 윤씨가 성종 때 사사(賜死)된 경위를 잘 모르고 있다가,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어머니가 폐위(廢位)되어 죽게 된 전후사정을 알게 되었다. 결국 극도로 흥분한 연산군은 <폐비(廢妃) 사건>에 관여한 윤필상(尹弼商) · 이극균(李克均) · 김굉필(金宏弼) 등 살아있는 대신 10여 명을 극형에 처하고, 한명회(韓明澮) · 권람(權擥) · 정창손(亭昌孫) 등 죽은 여러 대신들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 멸족시켰다. 또 연산군에게 바른말로 간언했던 홍귀달(洪貴達)을 비롯하여 조지서 · 권달수(權達手) · 정성근(鄭誠謹) 등의 유학자들도 아울러 죽음을 당하였다.

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증손녀였다. 조지서가 붙잡혀 갈 때 그는 아내 정씨에게 조상의 신주를 부탁하였는데, 조지서가 죽음을 당하고 그 집이 적몰되자, 정씨는 의탁할 데가 없었다. 친정아버지가 “시집이 이미 망했으니, 친정으로 돌아와서 사는 것이 어떠냐.” 하니, 정씨는 의리를 내세워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막내 아이를 뱃속에 가진 몸으로 어린 둘째 아이를 업고 신주를 품에 안은 채, 이집 저집 떠돌면서 아침저녁으로 신주에 곡을 하고 제사지냈다.(『국조보감(國朝寶鑑)』 권18 참조)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에 나라에서 적몰한 옛 집을 돌려주고, 그 집에 정문(旌門)을 세워서, 그 정절(貞節)을 길이 기렸다.

천문학의 계승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조지서가 천문학에 정통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1490년(성종21) 윤9월 석강(夕講)에서 강론하기를 끝마치자, 시강관(侍講官)조지서가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예악문물(禮樂文物)은 모두 세종(世宗)이 창제한 것인데, 흠경각(欽敬閣)의 제도는 지극히 정교(精巧)하여 낮과 밤의 운행이나 사시(四時)의 대서(代序)가 조금도 차이가 없어서 국초(國初)에는 천문(天文)을 아는 자로 하여금 이를 점검 · 관찰하게 하였으나, 근래에는 오랫동안 폐지되어 왔습니다. 신이 일찍이 금내(禁內)에 들어가서 보니, 그 설치(設置)한 곳에 풀과 나무가 우거지고 여러 물건들이 파괴된 것이 많았으며, 자격루(自擊漏)의 제도 같은 것도 훼손되었으니, 뒷사람들이 어찌 성인(聖人)의 절묘한 제작(制作)을 알겠습니까. 청컨대, 천문(天文)을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물을 부어서 교정(校正)하게 하소서.” 하였다. 세종과 문종 이후에 정변을 겪으면서 40여 년 동안 천문학이 홀대를 받아 왔던 결과였다. 이에 성종이 그 말이 옳다고 찬성하고, 도승지김응기(金應箕)와 함께 역관(曆官)들을 데리고 흠경각의 자격루를 복원한 후 천체를 관측하여 백성들의 생활에 시각(時刻)과 절기(節氣)를 정확하게 알리게 하였다. 그리고 1490년(성종21) 11월 성종이 전교(傳敎)하기를, “김응기와 조지서가 밤낮으로 천상(天象)을 관측하느라고 추위를 무릅쓰고 있다. 호구(狐裘)를 각각 한 벌씩 내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같은 해 11월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는데, 김응기 · 조지서가 서계(書啓)하기를, “지난밤에 약간의 빛이 있는 별이 위성(危星)의 궤도로 옮겨 들어갔고, 또다시 유성(流星)이 작은 병(甁)과 같은 모양으로 꼬리가 있었는데, 그 길이가 2, 3척(尺) 남짓한 것이 삼성(參星)의 궤도에서 나와 유성(柳星)의 궤도로 들어가서 없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이러한 천체 관측은 과학적으로 24절기의 변화와 일기(日氣)를 알려줌으로써 백성들의 농경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점성학적으로 국가와 왕가의 운명을 상징하는 해와 달과 별들의 변화를 관측하여 미리 점을 침으로써 제왕(帝王)의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던 것이다.

성품과 일화

조지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몸이 비대하고, 성품이 강직하였다. 1489년(성종20) 성종이 홍문관 응교조지서를 충청도에 보내어 민간의 병폐와 고통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명하였다. 이 일에 대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에서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이번 사행(使行)에서 조지서가 서둘러 적발(摘發)하였으므로, 며칠이 안 되는 동안에 온 충청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몸소 권농(勸農)이나 이정(里正)의 집에 드나들며 수령(守令)들이 역사(役使)에 차출(差出)한 첩자(帖字) 명단을 수색하였다. 모든 고을의 수령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놀라서 무서워하였으나, 촌락(村落)의 아이들과 길거리의 부녀자들은 모두 조지서란 것을 알고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였다. 그 뒤에 조지서가 다른 사명(使命)을 받들고 광주(廣州)로 가게 되었는데, 고을 수령이 마침 손님과 대좌(對座)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을 아전(衙前)이 ‘조지서가 옵니다.’ ‘조지서가 옵니다.’ 하자, 수령과 손님이 허둥지둥 자리를 피하였지만 한참 있다가 조지서에게 그 꼬리가 잡혔다.” 하였다.

그의 성격은 칼날처럼 날카로와서 남의 결점을 꼭꼭 꼬집어서 말하였으므로, 연산군이 평소 그를 아주 싫어하였다. 연산군이 세자로 있을 때 허침(許琛)은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고, 조지서는 보덕이 되었다. 연산군은 날마다 유희와 오락만을 일삼고 학문에는 전혀 마음이 없었으나, 다만 아버지 성종의 엄한 훈계가 두려워서 마지못하여 서연(書筵)에 나왔을 뿐이었다. 동궁(東宮)의 사부들이 비록 정성을 다하여 강론을 하여도 연산군은 모두 귀 밖으로 들었다. 조지서는 천성이 굳세고 곧아서 언제나 서연에 나아가서 강론할 때마다, 책을 세자 앞에 던지며, “저하가 학문에 힘쓰지 않는다면, 신은 마땅히 임금께 아뢰겠습니다.” 하니, 연산군이 매우 곤혹스러워 하였다. 그러나 허침은 그렇지 않고 부드러운 말로써 조용히 일깨워 주었으므로 연산군은 그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때 연산군이 벽 사이에 글을 써 붙이기를, “조지서는 큰 소인(小人)이고, 허침은 큰 성인(聖人)이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조지서의 앞날을 매우 걱정하였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고,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연산군은 맨먼저 조지서를 잡아다가 목을 베어 죽이고 그 집을 적몰하였다. 그러나 허침은 우대하여 우의정으로 삼았다. 우의정에 임명된 허침은 비록 연산군의 잘못을 바로잡지는 못했으나, 연산군의 명령을 받고 의정부에 앉아서 죄수를 논죄할 적에 열심히 구원하여 그 덕분에 매우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권6 참조)

묘소와 제향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 때 참수당하여, 팔도의 백성들에게 조리돌리고, 시신은 강물에 내던져졌으므로 묘소가 없고, 남명(南冥)조식이 지은 묘지명(墓誌銘)만이 남아 있다.(『남명집(南冥集)』 권2) <중종반정> 직후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경상도 진주의 신당서원(新塘書院)에 제향되었다. 자녀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조정(趙珵)이고, 차남은 조침(趙琛)이며, 3자는 조이(趙理)이다. 그러나 그 후손이 번창하지 못하여, 그 증손자 조린(趙璘) 때 봉상시(奉常寺)정(正)조희진(趙希進)을 양자로 삼았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남명집(南冥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미수기언(眉叟記言)』
  • 『순암집(順菴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음애일기(陰崖日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홍재전서(弘齎全書)』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