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루(自擊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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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부력 원리를 이용하여 자동으로 시보 장치를 울리도록 만든 기계식 시계.

개설

자격루(自擊漏)는 15세기 세종 때 왕명으로 장영실(蔣英實), 이천(李蕆), 김조(金銚) 등이 처음으로 자연 원리를 응용하여 개발한 자동 제어 시스템의 일종이다. 자격루는 시간을 측정하는 물시계 부분과 지정된 시각을 자동으로 알려주는 시보 장치로 구성된다. 11세기 송나라 소송(蘇頌)이 제작한 천문시계 장치와 아라비아 시계의 자동 시보 장치에 영향을 받은 이 물시계는 시청각 신호 모델을 사용하여 매 시간마다 종을 울리는 기계인형과 종을 울리면 그것이 몇 시인지를 알려주는 종표(鍾表)로 이루어져 있다. 시(時)·경(更)·점(點)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북·징을 쳐서 시보하도록 고안되었다.

자격루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1434년(세종 16)에 경복궁 경회루 남쪽의 보루각(報漏閣)에 설치한 자격루이며, 다른 하나는 4년 뒤인 1438년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 뜰에 건립한 흠경각(欽敬閣) 속의 옥루(玉漏) 자격루이다.

연원 및 변천

대개 자격루는 143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 한 해 전에 이미 장영실이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었다고 세종이 증언하고 있다. 세종은 안숭선(安崇善)에게 명하여 영의정황희와 좌의정맹사성에게 장영실의 관직을 더해주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다. 행사직(行司直)장영실은 아비가 본래 원나라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태종이 보호하였다고 했다. 세종 역시 장영실을 아껴 매양 강무할 때에는 자신의 곁에 두어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자격궁루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만,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필시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원나라 순제(順帝) 때에도 저절로 치는 물시계인 자격궁루가 있었다 하나, 그 정교함이 아마 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해주고자 한다.” 하였다(『세종실록』 15년 9월 16일). 이렇게 장영실이 정교한 기물인 자격궁루를 만든 공로를 인정하여 호군의 관직에 특제(特除)하고 있는 것이다.

1434년에는 왕이 기존의 누기(漏器)가 정밀하지 못하니 다시 만들도록 명한 이후 이날 보루각을 완공하고 이 속에 설치한 새로운 누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했다. 이 누기가 바로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새로 주조한 자격루이다(『세종실록』 16년 7월 1일). 이를 보통 보루각루(報漏閣漏)라 일컫는다.

대호군장영실이 맡아 건설한 흠경각이 완성되자, 왕이 김돈(金墩)에게 그간의 경위와 작동 방식을 담은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세종이 직접 담당자에게 명하여 각종 의기(儀器)를 제정토록 하였는데, 대소간의(大小間儀), 혼의(渾儀), 혼상(渾象), 앙부일구(仰釜日晷),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규표(圭表), 금루(禁漏) 등의 기구가 이전보다 훨씬 뛰어난 정밀 제품이라고 극찬하였다. 또한 모든 의기를 후원(後苑)에다 설치한 까닭에 시간마다 점검하기 어려워 이번의 새로운 누기는 침전에 가까운 천추전 서쪽 뜰에 작은 한 칸 건물을 세우고 이 속에 설치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세종실록』 20년 1월 7일).

형태

1434년에 만들어진 자격루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우선 물을 담는 파수용호(播水龍壺)는 크기가 다른 4개의 항아리로 조합되었고, 여기에서 흘러내린 물을 바꿀 때 갈아 쓰는 항아리인 수수용호(受水龍壺)는 2개였다. 파수용호에서 나온 물이 수수용호로 들어가면 시간을 알아보도록 세운 화살대인 누전(漏箭)이 떠서 올라가는데, 이 살대는 2개로 구성되었고 살대의 면은 12시로 나누었다. 매 시는 8각(刻)에 초(初)와 정(正)의 여분을 아우르면 100각이고, 매 각은 12등분하도록 표시하였다. 살대가 예전에는 21개여서 번갈아 쓰기 번거로웠지만 이때의 자격루는 12개이며, 수시력에 따라 밤낮을 나누어 오르내리게 하고, 비율을 여름·겨울의 두 시기로 축약하여 살대 하나로 대응케 하였다.

시신(時神)은 기계식 작동 방식으로 일을 한다. 예컨대, 우측 둥근 기둥의 다섯 숟가락은 절반가량이 직통(直筒) 안으로 들어간 상태인데, 파수용호의 누수가 수수용호에 내려서 모이면, 떠 있던 살대가 점점 올라와서 시간에 응하여 왼쪽 동판 구멍의 기계를 건드리고, 이에 작은 구리 구슬은 떨어져 내려서 구리 통에 굴러 들어간다. 작은 구슬이 구멍으로 떨어져 그 기계를 건드리면 기계가 열리고, 큰 구슬이 떨어져 자리 밑에 달린 짧은 통에 굴러떨어지면서 숟가락 같은 기계를 움직이면, 기계의 한 끝이 통 안에서 스스로 시간을 맡은 신의 팔을 치받으면서 종이 울린다. 경점(更點)도 같은 원리로 제작하였다.

1438년(세종 20) 천추전 서쪽 뜰에 새로 만든 자격루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흠경각 속에 풀을 먹인 종이로 7척 높이의 산을 만들고, 그 산 속에다 옥루와 기계식 바퀴를 설치하여 수력으로 돌리도록 하였다. 금으로 제작한 탄환 크기의 태양이 실제 천상의 운동과 유사하게 하루 한 바퀴씩 오색구름이 둘러싸인 산허리 위로 지나면서 낮에는 산 밖으로 나타나고 밤에는 산 속으로 들어가도록 장치하였다. 그 태양의 고도와 출몰 시각은 계절과 일치하도록 하였다. 태양이 지나는 궤도 아래에는 구름을 탄 4명의 옥녀(玉女)가 금 목탁을 잡고 동서남북 사방위에 서서, 인(寅)·묘(卯)·진시(辰時) 초정(初正)에는 동쪽 옥녀 인형이 목탁을 치며, 사(巳)·오(午)·미시(未時) 초정에는 남쪽 옥녀가 목탁을 치고, 서쪽과 북쪽도 이렇다고 하였다. 그 밑에는 네 귀형(鬼形)이 산으로 향하여 섰으며, 인시가 되면 청룡신(靑龍神)이 북쪽으로 향하고, 묘시에는 동쪽으로 향하며, 진시에는 남쪽으로 향하고, 사시에는 돌아서 다시 서쪽으로 향하는 동시에 주작신(朱雀神)이 다시 동쪽으로 향하며, 차례로 방위를 향하는 것은 청룡이 하는 것과 같고, 나머지도 동일하다 하였다. 산 남쪽 기슭 높은 축대에는 시간을 맡은 사람 하나가 붉은 비단옷 차림으로 산을 등지고 섰으며, 또 갑옷과 투구 차림을 한 세 사람의 무사가 하나는 종과 방망이를 잡고서 동립 서향하였고, 하나는 북과 부채를 잡고 서립 동향하였으며, 하나는 징과 채찍을 잡고 남립 동향하였다고 하였다. 매 시간이 되면 종을 치고, 매 경(更)마다 북을 치고, 매 점(點)마다 징을 친다 하였다.

또한 산 아래 평지에는 열두 방위의 십이신(十二神)이 제자리에 엎드려 있고 그 뒤로 각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하였다. 자시에 뒤의 구멍이 저절로 열리면서 옥녀가 자시패를 들고 나오고 서신(鼠神)은 그 앞에서 일어서며, 자시가 다 가면 옥녀는 되돌아 구멍에 들어가고 동시에 서신은 도로 엎드리는 방식이다. 오(午) 방위 앞의 축대 위에는 기울어진 그릇을 놓았고 그릇 북쪽의 인형 관원이 금병(金甁)으로 물을 따르는 형상을 하였으며, 누수의 남은 물로 그릇이 반쯤 차면 반듯해지고, 가득 차면 엎어진다 하였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 『한서(漢書)』 「천문지(天文志)」
  • 『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 『천문류초(天文類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일권, 『(동양 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김일권,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고구려 하늘에 새긴 천공의 유토피아』, 사계절, 2008.
  • 김일권,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대부터 조선까지 한국 별자리와 천문 문화사』, 고즈윈,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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