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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4 판




총론

[1624년(인조 2)∼1672년(현종 13) = 49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수원부사(水原府使)와 형조 참의(參議),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 등을 지냈다. 자는 중거(仲擧)이고, 호는 청재(聽齋)이다.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친아버지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원두표(元斗杓)이고, 친어머니 삭녕 최씨(朔寧崔氏)는 최동식(崔東式)의 딸이다. 아들이 없던 작은아버지에게 입적되었는데, 양아버지는 광주부윤(廣州府尹)을 지낸 원두추(元斗樞)이고, 양어머니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강정(姜綎)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를 지낸 원유남(元裕男)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낸 원호(元豪)이다.

인조~현종 시대 활동

1648년(인조 2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음보(蔭補)로 형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1659년(효종 10)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에 제수되었다가 세작익위사 부솔(副率)로 승진하였다. 그해 3월 원만리(元萬里)의 장남인 원몽린(元夢麟)이 효종(孝宗)의 딸인 숙경공주(淑敬公主)와 혼인을 하여 부마(駙馬)가 되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10년 윤3월 11일]

1659년(현종 즉위년) 현종의 즉위와 함께 추은(推恩 : 할아버지나 아버지, 또는 자손의 공로로 관작을 제수 받거나 더 높여주는 일)으로 6품관으로 승진하여 전생서(典牲署)주부(主簿)가 되었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이듬해 형조 좌랑이 되었고, 그해 겨울에 증광별시(增廣別試)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이 되었다.[『방목(榜目)』, 『서하집(西河集)』 권15 「감사원공묘표후기(監司元公墓表後記)」 이하 「원만리묘표」] 1662년(현종 3)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연이어 임명되었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2년 윤7월 8일, 현종 2년 10월 4일, 현종 3년 5월 11일] 이무렵 홍문관(弘文館)에서 홍문록(弘文錄)을 작성하였는데, 거기에 원만리가 포함되었다가 실력이 없음에도 당시 좌의정이던 아버지 원두표 덕에 후보가 되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현종실록』현종 3년 5월 18일, 현종 3년 6월 10일] 이어 병조 참의 및 사헌부 지평, 승정원 승지,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였는데, 이듬해인 1663년(현종 4) 사간원 정원이었던 원만리가 홍우원(洪宇遠)이 송시열(宋時烈)을 공격하면서 윤선도(尹善道)를 옹호한다며, 사간김만균(金萬均) 등과 함께 홍우원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원만리는 정언에서 체직되었다.[『현종실록』현종 3년 10월 18일, 현종 3년 11월 2일, 현종 3년 12월 30일, 현종 4년 3월 22일, 현종 4년 4월 29일]

그리고 그해와 이듬해에 원만리는 연이어 양아버지와 친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였고, 1666년(현종 7) 사간원 정언을 거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현종실록』현종 7년 9월 2일, 현종 7년 12월 3일, 현종 7년 12월 19일] 그러나 이듬해인 1667년(현종 8) 1월 대간(臺諫)을 처치할 때 인피하는 문자를 대거 삭제한 일이 문제가 되어서 파직되었다.[『현종실록』현종 8년 1월 16일] 그러다가 그해 8월 그는 다시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원양도사(原襄都事)정중휘(鄭重徽)의 자질을 문제 삼아 홍문록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하였다가, 홍문관에서 뽑지 않으면 되는데 굳이 홍문록에서도 삭제하자고 한 것이 매우 과격한 주장이었다며 체차되었다.[『현종실록』현종 8년 8월 7일, 현종 8년 8월 20일 현종 8년 8월 21일] 그리고 이듬해인 1668년(현종 9) 5월 세자시강원 사서(司書)에 임명되었다가, 1669년(현종 10) 5월 수원부사가 되었는데, 1671년(현종 12) 며느리 숙경공주가 천연두를 앓자 구완하기 위하여 체직하고 돌아왔다.[『현종실록』현종 9년 9월 14일, 현종 10년 4월 30일, 현종 12년 1월 9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9년 5월 5일, 현종 12년 1월 9일]

그리고 그해 12월 병조 참의를 거쳐, 이듬해인 1672년(현종 13)에는 승정원 승지와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였다.[『현종실록』현종 13년 3월 9일, 『현종개수실록』현종 12년 12월 10일, 현종 13년 4월 23일] 이후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향년 49세였다.[『현종개수실록』현종 13년 6월 4일]

성품과 일화

원만리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기(氣)가 성대하고 품질(稟質)이 후하며 기국(器局)이 남보다 뛰어났다. 선(善)을 즐기고 의(義)를 좋아하였으며 붕우에게는 더욱 신의를 독실히 하였다. 대각(臺閣)에 있으면서는 직언을 하고 아부하지 않아 여러 차례 임금의 안색(顔色)을 범하였다. 수원부사로 있으면서는 더욱 공적이 드러나 사람들이 모두 장래가 원대하기를 기약하였다. 재망(才望)이 점차 높아지고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더욱 크게 쓰이게 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갑작스런 사망으로 그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말았다.[「원만리묘표」]

한편 1652년 홍문관 관원 후보가 되었을 때 그의 성품을 두고 거친 성격에 기세만 부린다거나, 사람됨이 거칠고 포악하여 명망이 결여되었다고 평가받기도 하였다.[『현종실록』현종 3년 5월 18일, 현종 3년 6월 10일] 또한 거칠고 음흉하여 취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악평도 있다.[『현종실록』현종 9년 9월 14일] 이는 그의 기개가 장점도 되었으나, 더러는 그 거친 점을 흠잡기도 한 데서 비롯된 평가이다.[『현종개수실록』현종 13년 6월 4일]

묘소와 후손

원만리의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에 있으며,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와 합장하였다. 이민서(李敏敍)가 쓴 묘표가 남아있다.

부인인 완산 이씨는 이조 참판이시해(李時楷)의 딸로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인 흥평위(興平尉)원몽린은 효종의 딸 숙경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차남은 별검(別檢)원몽익(元夢翼), 3남은 원몽양(元夢陽)이다. 장녀는 사인(士人)이홍미(李弘美)에게, 차녀는 사인 김만지(金萬至)에게 시집갔다.[「원만리묘표」]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서하집(西河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