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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4 판




총론

[1583년(선조 16)∼1649년(인조 27) = 67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공조 판서(判書)이고, 봉작(封爵)정사공신(靖社功臣) 3등 완천군(完川君)이고, 증직(贈職)은 영의정이다. 자는 자대(子大), 호는 이재(頤齋)다. 본관은 전주(全州), 주거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빙고별제(氷庫別提)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최업(崔嶪)이며, 조부는 좌찬성에 추증된 최수준(崔秀俊)이다. 아버지는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최기남(崔起南)이며 어머니 전주유씨(全州柳氏)는 병조 참판(參判)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영의정최명길(崔鳴吉)의 형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6년(선조 39)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고, 1611년(광해군 3)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9세였다.(『방목』)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성균관(成均館)으로 들어가서 전적(典籍)·직강(直講)·사예(司藝)로 승진하였다.(「최래길 묘지명(崔來吉墓誌銘)」 참고.) 그 무렵에 동생 최명길이 가평(加平)에서 아버지 최기남을 모시고 있으면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획하였다. 서울에 있던 최래길이 그 비밀 전갈을 맡아서 여러 사람의 집을 오갔으나, 항상 신중하게 행동하여 역모(逆謀)가 탄로나지 않았다.

최래길이 성균관 사예로 있을 때인 1613년(광해군 5) 3월 12일 한밤중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그날 밤에 광해군이 여러 여인들과 어수당(魚水堂)에서 연회를 즐기면서 술에 취해 있었는데, 이이반(李而頒)이 반란이 일어날 것을 고변(告變)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술에 취하여 그 상소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광해군은 한밤중에 의금부(義禁府)당상관(堂上官)과 포도 대장(捕盜大將)을 부르게 하고, 도감 대장(大將)이흥립(李興立)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宮城)을 호위하게 하였다. 또 창의문(彰義門) 밖을 수색하게 하였으나, 아무런 이상 징후가 없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이날 밤에 구굉(具宏)은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모시고 연서역(延曙驛) 마을에 주둔하였는데, 대장김류(金瑬), 부장이귀(李貴) 등은 최명길과 김자점(金自點) 등과 함께 홍제원(弘濟院)에 모였고, 장단 방어사(長湍防禦使)이서(李曙)는 이기축(李起築)과 함께 부하 7백여 명을 거느리고 홍제원에 집결하였다. 또 이괄(李适)·김경징(金慶徵)·이중로(李重老)·장유(張維)·신경유(申景裕)·최래길 등도 각각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모두 와서 모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편 참고.) 군사가 모두 1천여 명이었는데, 문무 장사(將士)가 2백여 명이었다.(『인조실록』 참고.) 최래길은 거사를 계획하는 동생 최명길을 도와서 여러 사람들에게 지령을 전하고, 그 의견을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밤 3경에 반정군이 창의문으로 들어가서, 창덕궁(昌德宮) 문 밖에 도착했을 때, 도감 대장이흥립이 지휘봉을 버리고 와서 맞이했는데, 이미 최명길이 그 사위 장신(張紳)을 통하여 그를 설득하였기 때문이다. 대장김류 등이 단봉문(丹鳳門)을 열어젖히고 궁궐로 들어갔고, 능양군이 구굉 등과 함께 도착하니, 김류가 능양군을 인도하여 인정전(仁政殿) 서쪽 뜰 위에 나아가서 동향하여 호상(胡床: 의자)에 앉게 하였다. 여러 장사들이 그 앞에 줄지어 서서 시위하자, 원래 궁궐 안을 지키던 장졸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졌다. 광해군은 북쪽 후원의 소나무숲 속으로 도망하여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갔다. 사복시(司僕寺)의관(醫官)의 집에 숨어 있다가, 반정군에게 붙잡혀 능양군 앞으로 끌려 왔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3월 13일 아침에 대장김류가 서궁(西宮)으로 가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모셔다가 복위(復位)시켰다. 인목대비의 명령을 받아 광해군을 폐위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을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인조(仁祖)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의 모의에 참여한 최래길은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봉해졌다. 이어 장악원(掌樂院)정(正)에 임명되었다가,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하여 예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최래길 묘지명」 참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호위 대장(扈衛大將)이귀가 최내길을 찬리사(贊理使)로 삼도록 계청(啓請)하니, 최래길은 이귀의 부대에 편입되어 이괄의 반란군과 싸웠다. 서울이 함락되자,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공주(公州)까지 갔다가, 반란이 평정된 뒤에 돌아왔는데, 그 공으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이어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가, 1626년(인조 4) 한성부좌윤으로 옮겼다.(『승정원일기』인조편 참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는데, 후금(後金)과 화해가 성사될 무렵에, 그는 인조를 면대하여 울면서, “장차 화친이 이루어지게 되어, 지금 회맹(會盟)을 하려고 하는데, 신은 삼가 통분을 느낍니다. 신에게 패도(佩刀)가 하나 있는데 한칼에 죽어서 화친의 일이 어그러지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인조가 만류하기를, “이미 결정된 일이므로 지금 고치기는 어렵다.” 하였다.(『인조실록』) 1627년(인조 5) 하등극사(賀登極使)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정사(正使)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해로(海路)를 이용하여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의종(毅宗)숭정제(崇禎帝)의 등극을 축하하고 돌아왔다.(『응천일록(凝川日錄)』 권3 참고.)

1628년(인조 6) 인조가 신구 공신(新舊功臣)과 적장자(嫡長子)에게 각각 1등급씩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여, 최래길도 동생 최명길과 함께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하였으나,(『인조실록』) 다시 개정되어 최래길은 도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낮추어졌다.(『승정원일기』인조편 참고.) 1630년(인조 8) 장흥 군수(長興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니,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1631년(인조 9) 형조 참판을 거쳐 공조 참판이 되었다. 1634년(인조 12) 장릉(章陵)을 개수할 때 당상관(堂上官)이 되어 감역(監役)하니 인조가 숙마 1필을 하사하였다.(『인조실록』)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어가(御駕)를 호위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서 45일 동안 후금 군사와 싸웠다. 그 공으로 종2품상 가의대부로 승품하였다.(「최래길 묘지명」 참고.) 1645년(인조 23) 공신 회맹제(功臣會盟祭)에 참여하였고,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었으며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었다. 1648년(인조 26)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교체되었고, 그 해 말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인조실록』) 그가 병이 났을 때 인조가 의원을 보내어 병을 치료하게 하였으나, 1649년(인조 27) 5월 1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는데, 향년 67세였다.

<인조 반정>과 최래길

<인조반정>에 관련된 그의 일화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인조반정>의 거사 날짜를 1623년 3월 12일 한밤중으로 잡은 사람은 최래길의 동생 최명길이었다. 그러나 그날 낮에 이이반이 길에서 친구 이후원(李厚源)을 만났는데, 이후원이 “오늘 반정(反正)이 일어날 것이다.” 하고, 함께 가기를 권하였다. 이이반이 이를 뿌리치고 바로 대궐로 달려가서 이후원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고발하였다. 해가 채 지기도 전에 노수원(盧守元)이 최명길에게 와서 고변(告變)하는 사람이 벌써 궁궐로 들어갔다고 전하였다. 최명길은 일찍 홍제원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고변한 사람 때문에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두려워서 서대문을 닫을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귀와 이괄 등이 이미 먼저 모화관(慕華館)의 홍제원에 가서 있었으므로, 최명길은 먼저 그 형 최래길을 홍제원으로 보내어 긴급하게 여러 사람들에게 부탁하기를, “고변하는 자가 있더라도 부디 흩어지지 말고 당초의 약속대로 반드시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가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모두가 다짐하기를, “잡으러 오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마땅히 끝까지 버티고 싸워야지 어떻게 흩어질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날이 저문 뒤에 최명길과 최래길 형제가 곧바로 홍제원으로 갔었는데, 김류·심기원(沈器遠)·구굉 등도 그의 수하 군병을 거느리고 오다가, 길가에서 서로 만나서 반가워하고, 한꺼번에 사현(沙峴)을 넘어서 홍제원으로 갔다.

그날 초저녁에는 홍제원에 모인 사람들은 겨우 수백 명뿐이고, 또 밤이 깊도록 대장김류도 오지 않았으므로, 여러 사람들은 위구심을 느끼고 웅성거리면서 곧 해산하려고 하였다. 이때 이성부(李聖符)가 이괄에게 제의하기를, “내가 선봉을 맡겠으니, 주장은 장군이 아니고서는 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여러 사람들도 그 제안에 찬동하였다. 이리하여 이괄을 추대하여 주장을 삼고 부대의 배치를 끝마쳤는데, 그때에 비로소 대장 김류가 도착하였다.

이괄이 분노하여 자기가 대장(大將)을 맡으려고 하였으므로, 이성부가 나서서 이괄을 달래기를, “비록 장수를 바꾸면 안 된다고 하지만, 오늘의 거사는 서로 협심하는 데 성패가 달려 있으므로, 장군이 부디 양보하여 처음에 계획한 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이귀도 그를 달래니, 이괄이 그 제의를 받아들여 이성부와 함께 좌우의 선봉장을 맡았다. 나중에 이괄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봉되자, 이에 격분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도 이때 이괄이 임시로 반정군의 주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해 윤10월 이귀가 대장 김류를 비난하기를, “그날 늦게 도착한 것은 사태를 관망하다가 늦게 할 수 없이 온 것입니다.” 하였다. 최명길과 최래길 형제는 김류를 변명하기를, “김류가 뒤늦게 왔다고 한다면, 신들도 똑같이 죄가 있습니다. 이것이 관망하느라고 뒤늦게 온 것은 아니었는데, 이귀가 이렇게 말한 것은 잘못입니다. 이귀가 그렇게 말한다 하더라도 김류도 이것을 개의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인조가 최명길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인조실록』) 이처럼 최래길 형제는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신들 사이에 화해시키는 데 온깆 힘을 기울이고, 공신들의 집안끼리 화목하기를 바랐다.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신 집안을 분석해 보면,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최래길·최명길·최혜길 3형제를 비롯하여, 능성구씨(綾珹具氏)의 구굉과 조카 구인후(具仁垕), 연안이씨(延安李氏)의 이귀와 아들 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 형제, 덕수장씨(德水張氏)장유·장신 형제, 순천김씨(順川金氏)의 김류와 아들 김경징(金慶徵),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신경진(申景禛)과 신경유(申景裕) 형제 등이다. 이들이 함께 쿠테타에 참여하였는데, 모두 서인(西人) 계통의 집안으로 북인(北人)이이첨의 탄압을 당하였으나, 반정이 성공한 뒤에 모두 명문 벌족으로 번창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용인(龍仁) 자봉산(紫鳳山) 구동(駒洞)의 언덕에 있는데, 동명(東溟)정두경(鄭斗卿)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인조가 그의 부음(訃音)을 듣고 매우 애도하며,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최래길 묘지명」 참고.)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왕실 익성군(益城君)이형령(李亨齡)의 딸인데, 2남 3녀를 낳았다. 맏아들 최후윤(崔後胤)은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지냈다. 그런데 기록에 따란(방목) 최후현(崔後賢)이라고도 한다. 둘째 아들 최호(崔好)는 학생(學生) 때 일찍 죽었다.(『인조실록』), 큰 딸은 주부(主簿)이제현(李齊賢)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군수(郡守)윤홍거(尹鴻擧)에게 시집가고, 셋째 딸은 지평(持平)이무(李堥)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편)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오봉집(五峯集)』
  • 『우복집(愚伏集)』
  • 『만운집(晩雲集)』
  • 『월당집(月塘集)』
  • 『백강집(白江集)』
  • 『지천집(遲川集)』
  • 『호주집(湖洲集)』
  • 『탄옹집(炭翁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명곡집(明谷集)』
  • 『도곡집(陶谷集)』
  • 『강한집(江漢集)』
  • 『석담집(石潭集)』